"전우야 잘자라"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서울 시민의 마음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할 것인지 그냥 남아 있어야 할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용감한 우리 국국의 반격으로 3.8선을 넘은 인민군은 곧 퇴각되니 시민들은 안심하십시오 라고 방송을 통해 시민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피난민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강인도교는 군사작전상 공병대에 의해 폭파가 되고 피난가던 시민들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난리 통에 박시춘 선생은 당시 중구 회현동 (문안)에 살고 있었는데 인민군 선발대가 서울에 쳐들어오자 가족들과 왕십리(문밖) 로 피신하고 숭인동에 사는 가수 전칠성에게 서울 시내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반도호텔(롯데호텔) 옆 허름한 창고에 연예계 일부 사람들이 모여 악국 동맹을 만들어 김일성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들은 서울 시민들에게 김일성 노래를 주입시켜주는 공작 대원들입니다. 노래를 다 배우고 사상교육을 마치면 악극 동맹에 가입되어 붉은 완장을 채워주는데 이 완장을 차면 어느 곳이던지 다닐 수가 있다고 하니 선생님 가보지 않겠습니까
박선생은 완장만 차면 어디든지 피신 할 수 가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망설이다가 그곳으로 가보니 벌써 많은 연예계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박 선생의 제자 가수였다.
그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완장을 차야만 어디든지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자가 가까이 와서 박동무 왜 늦게 왔소.... 어제까지 깎듯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제자가 오늘의 동무로 나에게 호칭을 하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교육이 끝나자 완장을 받고 내일 이곳에 꼭 나오라는 약속을 뒤로 한 채 서울을 빠져 나와 망우리를 지나 한강 상류 쪽에 몇 년 전 작품을 쓰기 위해 조그마한 집을 마련해 놓은 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는 전쟁기운이 없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으나 가족 소식이 걱정이 되어 서울문 안으로 다시 들어와 연예계 일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명동성당(뾰족당) 으로 가보니 사람들은 북한 노래를 배우고 있었는데 창문틀 넘어 안으로 살짝 보니 남인수씨도 그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 모르게 남인수씨를 손짓으로 불러낸 박시춘 선생이 자기가 숨어사는 집 약도를 그려 설명하면서 자네 혹시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지지면 도망쳐서 나를 찾아와~~~
전쟁 난리 통에서도 제자 남인수를 사랑하는 박선생의 각별한 마음은 여기에서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때 인민군에서는 대남국민들 노래를 만들 유명 작곡가를 찾고 있다하니 노래 밖에 모르는 순진한 남인수씨는 박 선생의 은신처 약도를 인민군에 내보여 주었거 내일아침 박 선생을 데리러(붙잡으러) 가려고 했는데 하늘이 도와서인지 때마침 9.16인천상륙 작전이 성공되고 국군과 UN군이 서울로 반격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 아군의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지니 박선생을 잡으러 가려던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혼비백산 하여 이북으로 도망을 가고 서울이 수복되어 남인수씨를 만나 그때 들은 이야기로 가수 이난영씨의 남편이자 김시스터즈의 아버지 김해송씨 외 많은 연예인들이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붙잡혀 갔으면 박선생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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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박 시 춘 | 작사가 유호 | 가수 현 인 |
우리 국군과 UN군은 삼팔선을 돌파하여 북진하였고 당시 발간되던 승리일보에 "승리의 용사"라는 노래 가사가 실린 것을 길거리에서 본 박선생은 본가인 회현동으로 가는 도중 흥얼흥얼하며 악상을 떠올려 자기 발걸음에 맞추어 우리 우리 용사 승리의 용사 피로 물든 산과 들 무덤을 넘어 라는 멜로디를 구상하고 집에 들어서자 마자 오선지에 악보를 완성 시켰다.
집으로 들어온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 폭발하는 화산처럼 악상이 한없이 넘쳐 올라 감출 길이 없어 오선지 위에 일대의 명작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노래가 "전우여 잘자라"인데 박 선생은 가사 1절을 대충 만들어 곡을 붙이고 당시 경향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금무하던 유호씨를 찾아가서 대출 만들어진 1절 가사와2.3.4절을 완성시켜 현인씨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 때 뜨거운 감동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세상에 이 노래가 음반으로 보곱되자 전군은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지쳐있던 국민들 가슴속에 불꽃같은 희망을 주었고 국국의 사기는 충만하였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애창이 될때 고상한 음악을 한다는 일부 층에서는 노랫말 첫머리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라는 대목을 보고 왜 하필이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하나냐 라고 들 꼬집고 나섰지만 그 시대의 배경을 잘 모르는 이들의 비아냥이 아닌가 싶다.
당시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비밀리에 이 노래에 대한 여론 조사까지 실시했다는데 진중가 중 1위로 나타났다.
제가 한국연예협회 창작분과위원장 재직 시에도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해마다 전국적으로 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군가를 모집하여 왔으나 아직까지 "전우야 잘자라" 보다 더 좋은 진중가는 나오지 않는다는 당시 정훈국장 (정탁 소장)의 말이었다.
불멸의 작곡가 박시춘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국민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노래는 오늘도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해져 가고 있다.
1982년 문화훈장 보관장 추서
2006년 "가요마을" 여름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