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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고려의 조선술과 배의 종류

작성자바윗돌|작성시간18.06.07|조회수772 목록 댓글 0

고려의 조선술과 배의 종류

뛰어난 제작기술, 중국·일본에까지 알려져

 

철갑 군선과 대형 과선을 만든 태조 왕건

 

통일신라시대부터 우리의 배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튼튼하고 빠르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삼국시대 우리 고유 조선술에 송나라 조선술의 장점을 가미시켜 특히 고려 초기부터 군선(軍船)을 잘 만들었다.

 

서기 914년 왕건이 백제의 왕도인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100여 척의 군선을 건조했는데, 이 중 10척은 대형 군선으로 사방이 16보(길이 약 29m)이고 갑판 위에 전망용 누각(褸閣)과 노가 설치되어 있고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큰 배였다고 <고려사> 중 태조 편은 전하고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만주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해적들이 10세기 말부터 동해로 내려와 고려를 침범 약탈하자 배 앞머리에 쇠뿔이 달린 철갑 군선인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1009년 원산만에서 여진해적선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숙종 때인 서기 1105년 고려는 동해로 계속 침입하는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진명(함남 덕원)과 원흥진(함남 정평)에 군선 조선소인 선병도부서를 설치하고 과선을 만들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인 12세기 초, 무신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군이 정부에 반항하여 서기 1170년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고 새 정부를 세운 후 전라남도의 진도로 이동할 때 1천여 척의 배에 사람·재물·곡식을 싣고 갔다는 기록을 보아도 고려의 조선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뛰어난 조선기술을 이야기할 때 고려와 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선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는 몽골의 28년간(1231∼1250) 침공에 대항하다가 굴복했고, 원종 9년(1268) 원(몽골)나라 세조 징기스칸은 화친을 거절하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군선 1천 척을 만들어 바치라고 강요했다. 고려는 거절을 못하고 군선을 건조했고, 원나라 세조가 일본과 송나라 중 어느 나라를 먼저 칠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다. 삼별초군은 원의 요구로 만들어진 1천 척의 군선을 빼앗아 진도로 이동하는데 사용했다.

 

제1차 일본정벌이 무산되자 원나라는 두 번째로 900척의 일본 원정선을 만들어 바치라고 고려에 강요했다. 원종 15년(1274) 고려는 조선기술자와 일꾼 3만5천 명을 동원해 같은 해 1월부터 5월까지 만 130일만에 1천 석 적재용 대선 300척, 가볍고 빠른 중형군선 300척, 보급용 소형군선 300척 등 900척을 건조해 바쳤다.

 

다카시마박물관에 전장 40미터로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는 여몽연합 함대

 

원나라는 이 군선으로 고려와 송나라군사를 앞세워 처음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일본 규슈 앞바다에서 큰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충렬왕 7년(1281) 원나라는 제2차 일본 원정길에 나서기 위해 역시 고려에게 원정군선 900척을 건조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송나라 군선 3천500척을 동원해 모두 4천400척에 군사 14만 명을 태우고 일본 규슈의 이만리만(伊万里灣)에 집결했으나 이번에도 갑자기 엄습한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중국의 강남에서 건조한 송나라의 배들은 강한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부서졌으나 고려가 만든 배는 튼튼하여 전부 무사했다고 한다. 그만큼 고려의 조선술이 송나라의 기술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원정이 발전시킨 조선술

 

원나라의 일본원정 (元軍의 日本遠征)

시 기

1차 원정

1274년 음력.10월 5일 ~ 10월 20일

2차 원정

1281년 음력.5월 21일 ~ 7월 7일

장 소

일본 대마도, 이키 섬, 규슈 본토

원 인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복 야욕.

교전국

몽골 제국, 고려

가마쿠라 막부

지휘관

몽골 제국

호조 도키무네, 쇼니 쓰네스케,

쇼니 가케스케, 다이라노 가게다카†쇼니 쓰케도키†, 오토모 요리야스 우츠노미야 사다츠나, 소 스케쿠니†

시마즈 나가히사, 기쿠치 다케후사다케자키 스에나가, 미츠이 스케나가

훈둔(흔도), 범문호, 유복형, 홍다구

고려

김방경, 박지량, 김문비, 김신†

병 력

1차 원정

몽골군

25,000 명

17,000여 명

고려군

14,700 명

전선

900여 척

2차 원정

몽골군

30,000 명

40,000여 명

고려군

27,000 명

강남군

100,000 명

전선

4000여 척

피 해

1차 원정

연합군 13,500여명 사상 전선 200 척 침몰

피해 규모 불명

2차 원정

고려군 7,592여명 사상

몽고군 84,000 ~ 141,290여명 사상전선 3500여척 침몰

피해 규모 불명

결 과

가마쿠라 막부의 승리

 

 

일본은 그 후 원나라 군선을 두 번이나 물리친 태풍을 가미가제(神風)라 불렀고, 제2차 대전 때 일본의 자살비행 특공대에도 가미가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고려의 무역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 배가 군선보다 상선이 더 발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나라 무역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가 멸망하고 새로 등장한 중국의 5대 군벌정권, 작은 나라 10국들과 사절을 교환하며 국력을 다지고 무역을 활발히 하여 경제력을 축적했다. 그 후 5대 10국을 통일한 송나라와는 약 200년 동안 긴밀한 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해상무역과 문화를 교류하는 등 역사상 가장 친하게 지냈다.

 

고려 현종 3년(101)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는 고려와 송나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이 기간동안 송나라 무역선단은 126회나 고려를 찾았고 모두 5천여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들어왔다.

 

송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해양선을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 무역선의 장점을 따서 무역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규모가 컸던 송나라 무역선단은 100명 이상 승선할 수 있는 대형선박 10척에 60∼70인승 중형선박 12척, 30∼50인승 소형선 31척이었다.

 

 

고려의 무역선은 송나라 배와 모양이나 구조가 비슷했지만 더 튼튼하고 빨랐다.

가장 큰 송나라 무역선은 길이 30m에 높이 9m, 너비 5.5m로서 배 밑부분이 평평한 첨저선인데, 2개의 돛을 달았고 앞돛의 높이는 24m, 뒷돛의 높이는 30m, 돛의 너비는 5m였다. 큰 돛의 상단에는 풍향을 조절할 수 있는 작은 돛 야호범(野狐帆)이 달려 있고, 뱃머리에 있는 양 기둥 사이에는 길이 150m의 닻줄을 감는 물래가 설치되었다. 배 꽁지에는 방향을 잡는 중심 키 1개와 보조키 3개가 달려 있었다. 노는 한편에 5개씩 모두 10개가 설치되었고 갑판 주위로는 사람이나 화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울타리가 처져있었다. 이런 송나라 무역선은 곡물 2천 석을 싣고 선원 60명이 탈 수 있었다.

 

 

송나라의 무역선 외에 고려의 해양선 건조기술에 영향을 끼친 것은 송나라 사신선(使臣船)이었다. 송의 사신선단은 신주(神舟)와 객주(客舟)로 이루어졌는데, 신주 1척에 여러 척의 객주가 보좌했다. 말하자면 신주는 사신이 탄 주선(主船)이요, 객주는 주선을 호위하는 배였다.

객주는 길이 30m, 높이 9m, 너비 7.5m, 돛의 높이 30m에 쌀 2천 석을 실을 수 있는 배다. 주선인 신주는 객주 3배 크기의 대형선박으로 북송의 사신 서긍이 서기 1122년 고려에 올 때 신주 2척에 객주 6척의 사신선단을 이끌고 왔다.

 

고려의 무역선은 송나라의 무역선과 사신선의 장점을 따고 우리 고유의 조선기술을 이용해 송나라 무역선보다 튼튼했다. 또한 가공목재가 아닌 자연목재를 이용해 배 한 척 만드는 건조시간이 짧아 많은 수의 배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조비용도 적게 들었다. 게다가 송나라 무역선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서 <원사(元史)> 고려전을 보면 고려의 배는 송나라까지 가는데 3일이 걸리고, 아침에 고려를 출발하면 저녁에 일본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군선이 주류를 이룬 고려의 배

고려는 용도별로 여러 종류의 배를 만들어 썼다. 크게 나누면 군선·조운선·무역선인데, 이 중에서 군선의 종류가 가장 많았다. 주력군선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으로, 대선은 왕건이 백제의 나주를 공략할 때 탔던 길이 약 37m의 큰배로서 갑판 위에 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말이 달릴 수 있도록 넓고 크게 만든 지휘선이다.

 

과선은 뱃머리에 쇠로 만든 철각뭉치를 달아 적의 군선으로 돌격, 들이받아 부수는 격파선이다. 또 뱃전 사방에는 날카로운 창 또는 단검을 촘촘히 꽂아 적병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문종이부시랑 벼슬을 했던 문신 김상기(金上琦)가 쓴 <고려사>를 보면, 여진해적에 잡혔다가 고려수군이 구출한 일본여자 내장석여(內藏石女)가 과선에 대해 진술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군선의 선체는 높고 크며 적선을 충돌 파괴하도록 뱃전은 철각구조로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나타나기 전 최강의 군선이었던 과선을 만든 이유는 여진해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후에 중국의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건국 전에는 만주지방에 흩어져 살았지만 일부는 해적으로 변해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을 끝없이 침입하고 괴롭혔다.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100여 척의 해적선으로 경주를 침입 약탈하기 시작해 숙종 2년인 1097년까지 85년간 20회 이상 동해안 일대와 대마도, 일본을 침범해 노략질했다. 이를 막기 위해 고려조정은 해군기지 사령부인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동해안 요지에 설치하고 특수 군선인 과선 75척을 만들어 여진해적들을 물리쳤다.

 

여진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들이 무서워했던 과선 외에 관용으로 쓰이는 배는 해안을 순찰하는 순선(巡船), 행정 지도선인 관선, 관청이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소나무로 만든 송방선과 보통 배인 막선 등이 있었다.

 

고려의 군선 중 가장 많이 만들어진 일본 원정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구조와 규모를 간접적인 기록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려몽 연합군이 일본을 쳤을 때 이 전투에 출전했던 일본 장수 죽기계장(竹奇季長)이 1291년 이때의 전투상황을 그려 만든 병풍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를 보면 일본원정선의 모양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 병풍그림에 있는 배는 당시 고려가 만든 군선으로 몽고군이 타고 있는데, 노와 돛으로 항해했고 뱃머리인 선수가 위로 치솟았으며 배가 풍랑으로 심하게 요동할 때 병사나 물건들이 바다로 떨어지지 않도록 갑판 주위에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또 정박용 닻줄을 감는 도르래까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큰 군선임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수군이 사용한 배들은 평저형에 앞뒤가 반달모양으로 굽어져 위로 치솟았고 심한 풍랑을 만나도 전복되지 않도록 배 밑창에 돌이 깔려 15。 기울기에도 원상회복이 빠르도록 만들어져 있다. 또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을 때 퍼낼 수 있도록 배나무로 만든 물펌프까지 갖추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배였다.

 

일본의 관인(寬仁) 3년인 서기 1019년 북규슈의 태재부가 관인왕에게 올린 고려해적에 관한 보고서에는 이따금 일본해안을 침범한 고려배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배의 길이는 70∼80자(21∼24m)요, 배마다 30∼40개의 노를 가졌고 선원 수는 20∼60명인데 선원을 합쳐 활통을 맨 자 70∼80인이 탄 고려배는 빠르기가 달아나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보면 고려배가 확실히 일본배보다 우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선 다음으로 나라 살림을 하는데 절대 필요했던 배가 세곡 운반선인 조운선(漕運船)이다. 백성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임금이 사는 개경의 국가창고로 운반하는 조운선은 내륙의 강에서 사용하는 강선(江船)과 해안 바닷길에서 사용하는 해선(海船) 두 가지가 있다.

 

강운선 또는 참운선(站運船)이라 불렀던 강선은 곡물 200석을 운반할 수 있는 평저선으로 노와 삿대를 사용해 다녔다. 고려의 조운선으로 추정되는 유물로는 1984년에 발굴한 완도선을 들 수 있다. 이 배는 지금까지 발굴된 배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고려 문종 때(1047∼1087)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만든 평저선이다. 길이 9m에 너비가 3.5m, 높이가 1.7m인 이 완도 발굴선은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조립해 방수처리한 한국고유선인 한선(韓船)의 시원형으로 추정된다.

 

해안의 바닷길을 오가는 조운선은 초마선(哨馬船)이라 했는데, 곡물 1천 석을 운반할 수 있는 반 첨저형의 큰배다. 강선이나 수레, 소, 사람들이 내륙에서 운반한 세곡을 모아둔 서해와 남해안 11곳의 조창에서 세곡물을 싣고 바닷길을 통해 개경을 오가던 해운선이다. 이 해운선을 `초마선`이라 부르게 된 이유를 학자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고려에 조운제도가 확립되기 전 태조 왕건과 후백재 견훤의 대형 군선들은 전쟁이 없을 때는 말을 운반하는데 주로 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을 싣고 다니는 큰 배라 해 초마선이라 불렀고, 후에 조운제도가 생겨 그 모양대로 만들어 조운선으로 사용하자 원래의 이름 그대로 초마선이라 불렀다는 얘기다. 초마선은 한두 개의 돛과 노 그리고 키가 달려 있고 정박용 닻줄을 감는 도르래가 설치된 전형적인 한선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세 번째로 큰 배는 해상(海商)들이 바다를 누비며 무역할 때 쓴 무역선이다. 그렇게도 활발하게 바다를 주름잡았던 고려의 무역선에 대한 기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지만 확실한 유물은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그러나 발달한 조선기술과 좋은 목재로 송나라 무역선의 장점만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송나라 무역선보다 우수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고려의 군선이나 해양선은 튼튼하게 발전했다. 고려 23대 고종 때 문장가 정2품 벼슬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 ‘고려의 배는 남중국과 월남 등 동남아 제국은 물론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마필국(인도), 섬라곡국(태국)까지 왕래했다’고 적고 있다. 배가 튼튼하고 항해용 장비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아라비아까지 항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역선을 만들어 해상교역에 나선 고려

고려 무역선 규모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고려의 해운선으로 보이는 배가 그려진 구리거울인 동경(銅鏡)이 출토되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학자들은 고려 무역선이 동경의 그림대로 돛 1개를 달고 갑판 위에 선실이 있는 첨저형 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고려의 무역선 구조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바로 신안 앞바다 속에서 후세에 발견된 상선이다. 1976년에 발견된 신안해저유물선은 1만3천여 점의 각종 진귀한 상품을 싣고있어 무역선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완전히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고려전기인 14세기 초에 제작된 대형 해운선으로 추정된다.

 

신안해저유물선은 선체 길이가 약 29m, 너비는 6.6m, 높이는 2m이고 배 밑창에 있는 척추격인 거대한 용골이 배 전체를 지탱하는 첨저형 배다. 뱃머리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용골에 고정시킨 두 개의 돛대가 있는 쌍범선인데, 긴 항해에서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선체 한 구석에 마련해둔 나무 수조(水槽)가 무역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사>에는 11세기 초 송나라와 교역이 왕성해지기 시작할 즈음 70인승 고려 상선이 송나라에 갔다는 기록도 있어 고려의 해운선이 송나라 무역선과 버금가는 훌륭한 배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고려의 배는 중국이나 일본과 정치적 교류를 하기 위해 타고 다닌 사신선(使臣船)이다. 고려에서 정치적 교류를 위한 사신들의 중국 파견이 활발했던 것은 건국 때부터 서기 1150년까지였다. 이 시기를 견사항해시대(遣使航海時代)로 보고 있는데, 사신들이 사용한 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시대 때 신라인들이 만들어준 일본의 당나라 파견용 견당선의 발전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고려의 사신선이 삼국통일로 고려에 흡수된 신라의 우수한 조선기술과 풍부한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 초기 왕건이 사용한 군선을 항해용으로 개조한 튼튼하고 빠른 배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와 더불어 고려사신선 건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송의 사신선인 신주(神舟)와 이를 호위하는 여러 척의 객주(客舟)였다.

 

신주는 길이가 30m인 객주의 3배나 될 만큼 큰배로서, 북송 사신 서긍이 서기 1122년 고려를 방문할 때 신주 2척과 객주 6척으로 조직한 사신선단을 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신주는 길이 90m 전후로 성능이 뛰어나고 2개의 돛과 여러 개의 노로 항해했으며 갑판 위에는 사신이 쉬거나 전망할 수 있는 선실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고려 사신선이 신주만큼 불필요하게 크지는 않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쓴 일본 파견용 통신사선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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