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신인의 시즌
1992년.
최동원, 김시진이라는 두 거목이 시들해지기 시작하는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야구는 '선동렬'이라는 절대강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구위와 극도의 영리함. 이 두가지 모두를 겸비한 그는 '20승을 밥으로 먹고 0점대 방어율을 반찬으로 하는' 투수라 할수 있다. 그래서 당시 투수부문의 타이틀의 대부분에는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며 특히 방어율 부문에서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건설한 투수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1992에는 단 32이닝을 던지고 사라졌다. '정체모를 부상'이라는, 태업일수도 있던 1992 시즌은 기다렸다는 듯이 타고투저의 시즌이었으며 또한 투수들의 난립기였다.
92년에 뛰어난 투수들은 수두룩했다. 선동렬이 빠진 해태에는 조계현과 이강철이 있었으며 또한 송유석과 문희수, 김정수가 있었다. 당시 최강팀이었던 빙그레에는 송진우와 한용덕, 이상군, 한희민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으며 롯데의 박동희, 윤학길이나 삼성의 성준, 김성길, 쌍방울의 조규제와 태평양의 최창호, 박정현, 정명원, 양상문. LG의 김태원, 정삼흠, 김기범, 김용수. OB의 장호연이나 박철순등 이름값 높거나 91시즌에 큰 활약을 보여준 스타들이 난무하는 92시즌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2인의 신성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염종석과 정민철.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도 가장 적게 실점한 이 2인의 신예 에이스. 이 두명의 대결로 주목을 끌던 92시즌에서 승리자는 염종석이었고 그는 골든글러브와 신인왕 타이틀 2개를 석권하고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에 올려놓으면서 명실상부 92년의 최고 선수로 우뚝서게 되었다.
2.거인의 샛별
필자 자신이 자이언츠의 팬이지만 자이언츠의 2번의 우승 모두 우승전력감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객관적 전력차이를 뛰어넘을수 있게한 것은 자이언츠 특유의 '저돌성'과 하늘이 내린듯한 에이스의 존재가 가장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91시즌에 준플레이오프까지 오른 자이언츠였지만 언제나 빈약한 중계와 마무리는 선발들의 무리한 투구를 강요하게 되었고 한해의 상승세에는 그 이후 여러해의 침체기를 겪어야만 했던 팀이었다. 하지만 92년 자이언츠는 우승을 일궈냈다. 팀 타율 1위. 남두오성의 3할 타율. 그리고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의 17승. 이 모든 것이 자이언츠 우승의 요인이었지만 가장 큰 존재는 92년의 고졸신인 에이스 염종석이었다. 개띠 투수 3총사의 77학번 이후 아마추어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들이 포진한 92학번. 그 92학번들 중 투수 Big3인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가 모두 대학으로 진출한 가운데 가장 먼저 프로무대에서 빛난 이가 바로 염종석이었다. 사실 92학번 투수들 중에서 비교적 무명이었던 그는 자이언츠 입단이후 강병철 감독의 신뢰를 받아 에이스로 성장했다. 192의 키에서 나오는 최고 140 중,후반의 직구와 최고 130중,후반까지 치솟는 고속슬라이더는 타자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92년 한해동안 35경기에 등판해 2.33의 방어율과 17승 그리고 6세이브를 곁들이며 13완투 2완봉으로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4승 1세이브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그해 투수부문의 골든글러브와 신인왕을 획득하게된다.
3.계속된 추락과 끊임없는 노력
92년 전국적으로 서태지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염종석이 서태지보다 더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92년으로 그의 봄날은 끝이었다. 다음해 93년 10승을 거둔 이후 다시는 두 자리 수 승수를 거두지 못했고, 여러번의 수술로 그의 구위는 계속 떨어져만 갔다. 그의 수술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데뷔해에 200이닝을 던지면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는 등판과 150구 이상을 던지는 경기가 많았던 무리한 등판도 있고 어렸을적 핸드볼 선수를 하면서 다쳤던 팔꿈치, 그리고 직구와 슬라이더만 던졌던, 그래서 양날의 검인 '슬라이더'에 의해서 오는 팔의 무리, 투구폼등 여러원인이 겹쳐져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끊임없는 재활과 자기개발을 통해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통산 93번의 승리와 3.76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또 기록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자이언츠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게 했으며 팀의 정신적인 리더로서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4.버림받는 프랜차이즈 스타
2008년 시즌 중후반 이후 부상에서 돌아온 그는 21이닝을 던져 3.65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불안한 롯데의 허리를 어느정도 안정감을 부여했다. 또 오랜만의 포스트시즌의 아주 짧았던 등판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구단은 그에게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종용했다. 자이언츠 홈페이지의 팬게시판은 염선수의 은퇴 반대글로 뒤덮였고, 심지어 어떤이들은 다른팀으로 이적해서라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길 원했다. 코치자리라도 달라는 염선수의 부탁에 구단은 난색을 표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롯데 구단의 횡포에 팬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염종석 선수는 자이언츠의 팬들을 떠날수 없었기에 은퇴를 결정했다. 오직 자이언츠의,부산의 팬들을 위해서 말이다.
5.시간을 초월한 나의 영웅
필자 자신은 91년 1월 출생이다. 92년의 염선수의 실력은 단지 영상만으로 볼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야구에 깊이 심취한 기간, 흔히 구력이라고 말하는 기간도 매우 짧고 지식도 알량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대호, 강민호도 그리고 손민한도 아니다. 그런 현존하는 선수들의 화려한 실력과 스타적 기질보다 염종석 선수의 팔꿈치와 어깨 사진 한장이 내게 너무나도 큰 감동을 주었다. 염종석, 그는 우리시대의 선수는 아니지만 시대를 초월하고 세대를 넘나들며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며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선수다. 그의 팬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100승이나 다승왕이 아니다. 그와 함께한 순간순간이 중요한 것이며 그가 보여준 '자이언츠'의 정신과 눈물겨운 노력과 인내가 우리에게 중요하다. 2009년 4월 4일. 사직 개막전은 그의 은퇴식이다. 17년전 그때처럼 공을 던지는 그를 볼 수는 없지만 마운드에 입을 맞추며 은퇴하는 그를 볼 수 있어 팬들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은퇴식 후기)
정말 은퇴식을 보면서 마음이 찜찜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꼈다. 사장부터 단장까지 어떻게 그런 인간들이 있나 싶다. 겨우 댄스경연대회 시간 때문에 전설의 은퇴식을 그리도 조촐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개념을 어따 말아쳐먹었는가 말인가.
은퇴식이 끝나고 팬클럽 뒤풀이에서 난 염선수, 아니 염코치님을 뵈었다. 아! 너무 기쁘면서도.......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여하튼 거기에 계시는 팬클럽 회원들 중 내가 제일 어렸고 내가 제일 멀리서 왔다. 그분들은 나를 많이 배려해주셨다. 감사합니다.
염코치님.
항상 응원합니다.
[염종석 어록]
"사직에서 고향 분들의 응원을 업고 마운드에 오르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저는 사직이 좋습니다.
롯데를 떠나면 야구 그만 해야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직구장에 먼저 나와서 훈련하는 것과 밤늦게 남아서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마운드에서요?
힘이 닿는 데까지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 자신을 던져야겠지요 "
"다시는 공을 제가 못 던져도 좋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지금 나가게 해주십시오" -->99년 플레이오프때.
"팬들께서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제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죽을 각오로 부활하겠습니다. 제가 마운드에서 다시 공을 뿌리겠습니다. "
"물론 10승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10승을 한동안 못했다고 해서, 꼭 10승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부산 팬 분들께서 즐거워하시고, 찾아주시면 됩니다. 그동안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죄송했습니다 "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가 필요하다고 불러주시면 등판할 것입니다. 1992년 당시 그때 그렇게 던진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저는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처럼 다시 던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때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음 블로그에 올렸었던 글을 수정해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첫 작성년도는 2009년초로 기억합니다.
*퍼가실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