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읽기와 쓰기와 계산에 능해야 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고난도의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文盲)이던 시대에 어릴 적부터 공부가 의무였던 유대인에게는 장사에서 경쟁자가 없었다. 이에 더하여 중세 유럽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관념이 있어서 상업은 비천한 신분인 유대인의 몫이었다.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는 서로가 이교도와의 직접 거래를 금지하였기에 양쪽 세계의 무역은 양쪽 세계에 흩어져 거주하는 유대인이 도맡았다.
예수교가 지배하던 중세 천년 동안 유럽에서 장사와 무역과 금융을 아는 사람은 유대인뿐이었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대인을 추방한 여파로 상업과 금융업이 무너져 무역은 못하고 약탈과 광산채굴에 주력했다. 1492년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플랑드르를 거쳐 네덜란드에 자리 잡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으로 일세의 번영을 이루었다.
1585년에 스페인이 플랑드르를 공격하자 앤트워프에서 영국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인도네시아에 진출하여 향신료무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간 네덜란드에 비해 경제력이 낙후된 탓에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패배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영국동인도회사는 인도로 방향을 돌렸으나 인도산 향신료 장사에 실패하여 파산지경에 몰렸다가 1657년 정부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한 후 인도산 면직물 수입으로 활로를 찾았다. 인도는 세계 최대의 면직물 수출국이었다. 값싸고 아름다운 인도산 면직물은 의복, 커튼, 식탁보, 침대 시트 등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도는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룬 적이 거의 없었다. 고대에 마우리아 왕국의 아소카왕(재위 BC 273 ~ BC 232) 시절에 잠시 통일되었다가 2천년 가까이 지난 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재위 AD 1658 ~ 1707) 시절에 두 번째로 잠시 통일되었다. 5천년이 넘는 역사에서 인도 전역이 통일된 기간은 백년이 못 되었다. 인도라는 명칭은 나라가 아니라 문화권을 의미했다.
무굴은 몽골의 투르크어 발음이다. 서아시아에서는 몽골을 모굴 또는 무굴이라고 불렀다. 무굴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의 소국 페르가나의 왕으로 무슬림이었고 부계는 티무르, 모계는 징기스칸의 혈통이었다. 바부르는 티무르제국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여 무리를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피신한 뒤 북인도에 침입하여 1526년에 델리왕국을 정복했다.
바부르의 손자인 아크바르 황제(재위 1556~1605)가 북인도 전부를 정복하였고 아우랑제브 황제(재위 AD1658 ~ 1707) 시절 남인도를 정복하여 짧은 기간이나마 인도의 통일을 이룩했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1707년에 사망한 후 힌두교도의 봉기로 무굴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소왕국으로 전락했다. 무굴제국은 창건 2백년 만에 사실상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으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
1688년의 명예혁명을 계기로 네덜란드의 유대인과 유대자본이 영국으로 대거 몰려와 영국은 경제 발전의 전기를 맞이했다. 이때부터 영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및 인도에서 전쟁을 거듭하여 결국 승리했다, 이 시기에 두 나라가 싸운 전쟁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672 ~ 1678 :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
1688 ~ 1697 :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
1701 ~ 1714 : 스페인왕위 계승전쟁
1740 ~ 1748 : 오스트리아왕위 계승전쟁
1744 ~ 1763 : 식민지 전쟁
1756 ~ 1763 : 7년 전쟁
1776 ~ 1783 : 미국 독립전쟁
1793 ~ 1815 : 프랑스 혁명전쟁
거듭된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유대인의 자본력과 독창적인 금융 기법으로 전비 조달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잉글랜드은행과 유대인’ 편에서 상세히 서술한 바 있다. 아래의 표에서 영국 정부의 차입금도 상당한 규모이지만 정부는 원금 상환 없이 이자만 지불했다. 이자율은 처음에 년 8%였으나 차츰 내려가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년 3%였다.
영국에서는 1753년에 유대인을 영국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국가는 네덜란드와 영국뿐이었다. 네덜란드의 자본가들은 1780년까지 영국의 자금조달에 협조했고 프랑스에는 비협조적이었다. 프랑스는 차입금의 금리가 영국의 두 배에 달하고 원금을 일시에 상환해야 해서 항상 자금난에 시달렸다. 부족한 전비를 세금으로 조달해서 늘어나는 세금에 국민의 불만이 누적되어 1789년에 대혁명으로 폭발했다.
영국은 1763년에 종결된 식민지전쟁의 승리로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냈다. 곧 이은 미국의 독립으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한 것은 인도의 패권을 차지한 것에 비하면 단지 작은 손실이었다. 인도라는 경제적 기반과 유대인 특유의 창의력이 결합하여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은 면직물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19세기 초에 유럽 제일의 무역 대국으로 우뚝 섰고 19세기 내내 세계의 공장으로 군림하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유대인이 주도한 과정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판도 (260 BC)
아시아의 형세 - 15세기 초
티무르제국의 최대 판도(1405년)
바부르의 인도 침입 (1526년)
무굴제국의 판도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 성
힌두교 성지 -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
유럽의 형세(1740년)
엑스라샤펠 조약(1748)
7년전쟁의 동맹 진영
17세기 유럽인의 북아메리카 진출 지역
18세기 전반 북아메리카 형세
1763년 파리조약
유럽 국가의 인도 무역관
인도의 마라타 왕국(1740년)
프랑스 세력권
1765년 인도의 형세
분홍색 - 영국령 / 녹색 - 이슬람 세력 / 노란색 - 힌두교 세력
벵골주
영국의 인도 지배 확장
면직 모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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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영환 작성시간 16.06.03 광헌형의 노력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문자의 대중화 일반화와 교육, 금융, 창의력의 위력을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글과 인쇄력이 세종대왕의 뜻과 같이 일찌기 대중화할 수 있었다면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넘치네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지금의 우리도 권력, 재력, 공권력을 갖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생각과 배려를 갖고 같은 곳을 향하여 나아간다면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와 민족이 되지 읺을 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멋있는 벗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