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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군의 위치를 날조한 후한서

작성자이광헌|작성시간21.07.25|조회수1,066 목록 댓글 0

중국에서 편찬된 여러 사서들이 한사군(漢四郡)에 관하여 기록했는데 이를 요약하여 편찬된 년도순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기(史記) 조선열전 : 기원전 90년

조선왕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燕)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 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 한(漢) 혜제(惠帝) 원년(BC 195년)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천여 명을 이끌고 장성을 나와 동쪽으로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중국의 전란을 피해 도망온 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고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했다. 위만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손자 우거왕(右渠王)에 이르러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BC 109년) 조선을 침공하였다. 육군 5만이 요동을 나와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浿水)로 향하고 수군 7천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나갔다. 한(漢)나라는 다음해(BC 108년)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사기(史記)에는 전쟁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사군(四郡)의 이름과 위치가 나오지 않고 패수(浿水)가 어디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② 염철론(鹽鐵論) : 기원전 50년

한무제(漢武帝)를 이은 소제(昭帝) 6년 (BC 81년) 염철주(鹽鐵酒)의 국가전매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대토론회의 내용을 30년 후 환관(桓寬)이 염철론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o 염철론(鹽鐵論) 벌공편(伐功篇) 

大夫曰 齊桓公越燕伐山戎 破孤竹 殘令支. 趙武寧王踰句注 過代谷 略滅林胡樓煩. 燕襲走東胡 辟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대부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은 연나라를 넘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을 격파하고 영지를 멸했으며 조나라 무령왕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와 상곡을 지나 임호와 누번을 경략해 멸하였고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천리 밖으로 물리치고 요동을 넘어 조선을 침공했다.

 

구주산(句注山)은 지금의 안문산(雁門山)인데 서경산(西陘山)이라고도 하며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 서북에 있다. 만리장성의 요새  안문관(雁門關)이 있다. 

 

o 염철론(鹽鐵論)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俱強,並為寇虐, 朝鮮踰徼,劫燕之東地 ​, 東越越東海,略浙江之南 , 南越內侵,滑服令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방의 오랑캐가 강해져 모두 노략질과 포학을 저질렀다.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나라의 동부 지역을 빼앗았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부를 약탈했고,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과거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았는데 진시황이 연을 멸하고 이 곳을 요동외요라 불렀다. 염철론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이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수복하고 그 너머까지 점령했다고 한다. 

 

한서(漢書)  : 90년경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BC 108년)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真番郡)을 설치했다.

소제(昭帝) 5年 (BC 82년) 6월 진번군을 폐지했다.

소제(昭帝) 12年 (BC 75년) 봄 정월 여러 군국(郡國)에서 무리를 모아 요동성과 현도성을 쌓았다.

현도군에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이 있고 낙랑군에 조선현 등 25 현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 290년경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에서 천 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 사방 이천 리다.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과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며 도읍은 환도성(丸都城)이고 사방 이천 리다. 고구려인을 맥인(貊人)이라고 부른다. 

 

옥저(沃沮)는 고구려의 동쪽에 있고 큰 바닷가에 있다. 북옥저와 남옥저로 나누어진다. 위만(衛滿)에게 복속하였다.

 

한(漢)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에 봉했고 조선과 연(燕)이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BC 109년) 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만들었다.

 

한무제(漢武帝)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만들었다.

후에 이맥(夷貊)의 침략 때문에 현도군은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 갔고 옥저는 낙랑군에 속하게 했다.

옮겨간 현도군은 요동군에서 북쪽으로 이백 리 떨어져 있다. (玄莬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

 

 후한서(後漢書) : 440년경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군의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弱水)가 있다. 땅은 사방 이천 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 句驪一名貊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하며 땅은 사방 이천 리다.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게 했다. 고구려를 일명 맥(貊)이라고 한다. 현도군을 다시 고구려로 옮겼다. 

 

東沃沮 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其地東西夹,南北長,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罢都尉官,後皆以封其渠帥,為沃沮侯。其土迫小,介於大國之間,遂臣屬句驪。 又有北沃沮,一名置沟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皆與南同。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닷가이고 북쪽은 읍루, 부여와 접하고 남쪽은 예맥과 접한다. 그 땅은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길어 가히 천리나 된다. 땅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을 뒤로 하고 바다로 향한다. 한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玄菟郡)으로 만들었는데 훗날 이맥(夷貊)의 침략 때문에 현도군을 옥저 땅에서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현으로 만들어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후한 광무제에 이르러 도위관을 파하였고 후에 거수(渠帥)를 모두 옥저후로 봉했다.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 한다. 남옥저에서 팔백 리 떨어져 있고 그 풍속은 남옥저와 같다.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BC 108년) 조선을 멸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사군을 설치했다.

후한(後漢)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했다.

 

 수경주(水經注) : 515년경

옛날에 고구려는 오랑캐의 나라였다.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BC 109년)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고구려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다. 지금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이고 한(漢)나라 낙랑군의 조선현이다. 패수(浿水)는 평양성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

 

 양서(梁書) : 636년

고구려는 한(漢)의 현도군이다. 요동군에서 동쪽으로 천 리를 가며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한무제 원봉 4년(BC 107년)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설치했으며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북사(北史) : 659년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4년(BC 107년)에 조선(朝鮮)을 멸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으며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사기정의(史記正義) : 736년 장수절(張守節)

括地志云 高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며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땅이라 한다. 

 

 구당서(舊唐書)  945년 / 구오대사(舊五代史)  974년 / 신당서(新唐書) 1060년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 땅이다.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 1344년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왕위가 40여대까지 전해졌다. 연(燕)나라가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한말(漢末)에 공손(公孫) 가문이 차지했고 훗날 고구려가 차지했다.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년 ~ 452년) 당시 고구려의 도읍 평양은 요양(遼陽)이다.

 

 송사(宋史) : 1345년

高麗,本曰高句驪。禹別九州,屬冀州之地,周為箕子之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蓋扶餘之別種,以平壤城為國邑

고구려는 주(周)나라가 세운 기자(箕子)의 나라이고 한(漢)의 현도군이다. 요동에 있고 부여의 별종이며 평양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원사(元史) : 1369년

高麗本箕子所封之地,又扶餘別種嘗居之。其地東至新羅,南至百濟,皆跨大海,西北度遼水接營州,而靺鞨在其北。其國都曰平壤城,即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이다.

 

 명사(明史) ; 1735년

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을 설치했다. 한말(漢末)에 부여 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고려라 불렀는데 고구려라고도 부른다. 평양에 자리 잡았으니 바로 낙랑군이다.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저술한 후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도군(玄菟郡)에 관한 서술이 달라졌다. 사기(史記)는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했으나 사군의 이름과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한서(漢書)는 사군의 이름을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真番郡)이라 명기하고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다고 했으나 그 위치에 대하여 구체적 언급이 없다. 고구려가 처음 등장하지만 고구려에 관한 서술은 전혀 없고, 조선에 관해서는 사기 조선열전을 옮겨 적었다. 한서(漢書)는 사군이 설치된지 이백 년 후 저술되었는데 사군과 관련된 기록은 BC 82년에 진번군을 폐지했다는 것과 BC 75년에 현도성을 쌓았다는 것 두 가지 뿐이다.    

 

한서(漢書)가 나온지 이백 년 후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는 고구려가 남으로 조선과 접한다고 했다. 이는 고구려와 조선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뜻이다. 한서에 이르기를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다고 했으니 조선현은 왕험성일 것이다. 왕험성이 자리한 낙랑군은 옥저의 서쪽이라 했는데 옥저(沃沮)는 지금의 함경도 동해안이니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다. 옥저(沃沮)는 북옥저와 남옥저로 나누어지는데 한무제가 남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했고 훗날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옮겨간 현도군은 남쪽으로 요동군, 북쪽으로 부여, 동쪽으로 고구려와 접한다고 했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대체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을 옮겨 적었는데 몇 대목은 새로 추가했다. 현도군에 관한 후한서의 기록은 모순 투성이여서 종잡을 수가 없다. 한무제가 원봉 3년(BC 108년)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사군을 설치했는데 동옥저전에서는 옥저 땅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했고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한무제 사후(死後) 현도군을 옥저 땅에서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으며 옮겨간 현도군의 위치는 요동군의 북쪽이고 부여의 남쪽이며 고구려의 서쪽이라고 했다. 그런데 예전(濊傳)에서는 한무제 사후(死後) 현도군을 옥저 땅에서 고구려로 옮겼다고 했다. 한무제가 원봉 3년(BC 108년)에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하고서 한무제 사후에 현도군을 옥저 땅에서 고구려로 옮겼다고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이다. 이처럼 후한서의 내용은 모순 투성이여서 사료적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편찬된 중국의 사서들은 후한서에 근거하여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하였다.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요사(遼史)는 조선과 사군의 위치가 요동이며 요양(遼陽)이 왕험성(王險城)이라고 했다. 청(淸)나라에서 편찬한 명사(明史)는 또 다른 내용을 기술했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할 당시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았고 전한(前漢 BC 202 ~ AD 8) 말(末) 사군 땅에서 고구려가 일어섰다고 기술하였다. 이로써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및 사군의 영역에 압록강 유역을 포함시켰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역사인식을 따르지 않았다.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함경도가 본래 고구려였다고 하면서 옥저(沃沮)의 경계를 황초령(黃草嶺), 부전령(赴戰嶺),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하여 개마고원과 압록강 유역을 고구려의 영토라 했다. 함경도 동해안은 옛 옥저이고 한무제가 남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이맥(夷貊)의 침입 때문에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따른 것이다.

 

한(漢)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浿水)는 압록강이고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浿水)이며 왕험성(王險城)은 평양이고 고조선과 낙랑군의 위치는 평안도라고 했다. 임둔군은 강원도 동해안이라 하고 진번군은 압록강 바깥으로 보아 언급하지 않았다. 강원도의 영서(嶺西)지방은 예(濊),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는 마한(馬韓), 경상도는 진한(辰韓), 전라도는 변한(弁韓)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한사군과 변한의 영역을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패수(浿水)는 대동강, 대수(帶水)는 임진강, 열수(列水)는 한강이라 했다. 사기에 이르기를 요동의 동쪽에 진번과 조선이 있어 연(燕)나라와 접했다고 했는데 정약용은 이를 근거로 압록강과 동가강 유역에 진번군을 설정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고구려는 압록강과 동가강 유역에서 일어섰고 삼국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남쪽으로 조선과 접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한무제가 고구려를 멸하고 진번군을 설치했다는 것인가?  정약용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후한서(後漢書)에서 시작되었고 평양이 조선의 왕험성이고 낙랑군이라는 주장은 수경주(水經注)에서 시작되었다. 전한말(前漢末)에 현도군에서 고구려가 일어섰다는 주장은 명사(明史)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사군의 영역을 아래 그림과 같이 설정했다. 낙랑군에 대해서는 전래의 인식에 따랐으나 한(漢)과 조선의 경계인 패수(浿水)를 청천강이라 했다. 고구려가 일어선 압록강 유역에 현도군을 설정한 것은 후한서 이래 중국의 전통적 인식을 따른 것이다. 진번군과 임둔군의 위치는 근거가 박약하다. 

 

 

   현대 중국과 일본의 학설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조선시대의 역사인식을 버리고 일본과 중국의 학설을 따르면서 단지 진번군과 임둔군의 영역을 한강 이북으로 축소했다. 

 

 

요사(遼史)의 내용은 중국의 역사서와 전혀 다른데 오늘날 역사학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명사(明史)가 기술한 고구려의 건국 시기는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이 BC 37년에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와서 고구려를 세웠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무제가 사군을 설치할 당시 고구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압록강 유역은 어느 나라의 영토였는가?

 

사기(史記)에 의하면 무제가 조선 땅에 사군을 설치했다. 현도군도 조선 땅에 설치되었으니 압록강 유역이 현도군이라는 주장은 이곳이 조선의 영토라는 뜻이다. 사기(史記)에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는 패수(浿水)라고 했으니 주류학계가 설정한 요동군과 현도군의 경계가 패수라야 한다. 그러나 요동군과 현도군 사이에는 경계로 삼을 하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의 그림에 표시된 현도군은 조선의 영토가 될 수 없다.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현도군에서 고구려가 일어섰다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의 궤변이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한무제가 고구려를 정복한 전쟁과 고구려가 현도군을 몰아낸 독립전쟁의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필자는 현도군의 위치를 고구려 바깥이라고 기술한 삼국지가 옳다고 본다. 이 논고에서 중국의 사서들을 차례대로 검토하여 현도군의 위치가 조작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한서(漢書)는 서기 80년대에 반고(班固 32~92)가 저술한 전한(前漢, BC 202~AD 8)의 역사서인데 사군(四郡)에 관한 기록이 매우 소략(疏略)하여 아래의 몇 줄뿐이다. 

 

◇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

元封 三年 夏,朝鮮斬其王右渠降,以其地為樂浪、臨屯、玄菟、真番郡。

무제(武帝) 33年 (BC 108년) : 원봉 3년 여름, 조선이 그 임금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 땅으로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을 만들았다.

 

◇한서(漢書) 소제본기(昭帝本紀)

始元五年 六月 罷儋耳眞番郡

소제 5年 (BC 82년) : 시원 5년 6월 담이군과 진번군을 폐지했다.

 

※담이군은 지금 중국의 최남단 해남도(海南島)다. 진번군의 위치는 학설이 분분하다.

 

元鳳 六年 春 正月 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소제 12年(BC 75년) : 원봉(元鳳) 6년 봄 정월 여러 군국(郡國)에서 무리를 모아 요동성과 현도성을 쌓았다.

 

※ 소제 7년에 연호를 시원(始元)에서 원봉(元鳳)으로 고쳤다. 군(郡)은 중앙 조정에서 관리를 임명하고 교체하는 지방행정 기구이고, 국(國)은 세습되는 제후이다. 지금은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동(遼東)이라 하고 요하의 서쪽을 요서(遼西)라 부르지만 한(漢)이 조선을 멸한 후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구분하는 경계는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였다. 한서지리지 원전은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遼東郡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

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玄菟郡

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樂浪郡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

朝鮮,邯(남감),浿水,含資,黏蟬(점제),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제해),渾彌(혼미),吞列,東(동이),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 한서지리지는 전한(前漢)의 마지막 황제 평제(平帝 BC1~AD5) 때의 행정구역으로 알려져 있다. 무제가 사군을 설치한 때로부터 100년 후로서 진번군과 임둔군은 폐지된지 오래고 현도군은 요동군의 북쪽에 있었다. 한서에는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설명이 아무 것도 없다. 

 

동이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290년경 서진(西晉)에서 진수(陳壽, 233 ~ 297)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다음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의 일부다.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부여(夫餘)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 , 其民土著 於東夷之域最平敞。 夫餘本屬玄菟  ...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에서 천 리를 간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사방 2천 리이고 가구는 8만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며, 동이의 영역 중에 가장 평탄하고 탁 트였다.. ....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다.... 정시(正始 240~249)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하며 현도군 태수 왕기(王頎)를 부여에 보냈는데, (부여왕)위거가 대가를 성 밖으로 보내 영접하고 군량을 공급했다. 나라에 고성(故城)이 있는데 이름이 예성(濊城)이다. 본래 예맥의 땅이고 그 중에 부여가 왕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고구려(高句麗)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戶八萬  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爲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 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 ....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之,爲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於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佈告天下,更名高句麗爲下句麗。.... 至殤安之間, 句麗王<宮>數寇遼東, 更屬玄菟 . 遼東太守<蔡風>·玄菟 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 興師伐之. <宮>詐降請和, 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菟 >, 焚燒<候城>, 入<遼隧>, 殺吏民. 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 軍敗沒.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三國志魏書東夷傳]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환도성에 도읍하며 사방 이천리이고 3만 호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벌판과 늪이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서 비록 힘써 경작해도 식량이 부족하다. 한(漢)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재주꾼(악공)을 하사했으며 (고구려는)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옷과 모자)을 받았다. 고구려현 현령이 그 명부를 기록했다. (高句麗令主其名籍) 후에 점차 교만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현도군이)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짓고 조복(朝服)과 옷과 모자를 그 곳에 두었고 (고구려인이) 새해 첫날에 와서 가져 갔다. 지금도 호(胡)는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 부르는데 구루(溝漊)는 구려에서 성(城)을 이르는 말이다. .... 

왕망(王莽 재위 8 ~ 23년) 초에 고구려 병사를 일으켜 호(胡)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가려고 하지 않아 강박하여 보냈더니 모두 국경 밖으로 달아나서 노략질을 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을 보내 공격했으나 살해당했다. 주, 군, 현에서 구려후 도(騊)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기를 "맥인이 법을 범했으나 그 죄는 '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엄우가 구려후 '도'를 꾀어 만나기로 약속하고, '도'가 (약속 장소에) 이르자 그의 목을 베어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천하에 포고했다. ....상제(殤帝, 105~106)와 안제(安帝, 106~125) 년간에 이르러, 구려왕 궁(태조왕)이 수차례 요동을 노략질하매 현도군에 속하도록 바꾸었다. 요동군 태수 채풍과 현도군 태수 요광은 '궁'이 두 고을을 해친다면서 군사를 일으켜 토벌에 나섰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현도군을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현(遼隧縣)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자, '채풍'이 경솔하게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태조왕)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순제(順帝 재위 125~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167) 년간에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여 신안현과 거향현을 약탈했다. 또 서안평현을 공격하고 그 길에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붙잡아갔다. [삼국지위서동이전]

 

※ 고구려의 도읍 환도성(丸都城)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중류에 있는 집안(輯安)이다. 고구려가 남쪽에서 조선과 접했다는 것은 고구려와 조선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뜻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고구려가 언제 건국했는지 몰랐기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료적 근거는 없다. 한무제의 조선 정복을 기술한 사기에는 고구려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한무제는 BC 109년에 조선을 침공해서 1년 후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 등 4군을 설치했는데 삼국지에 따르면 조선이 망한 후에도 고구려는 독립국으로 존속하였다. 삼국지에 기록된 현도군의 위치는 요동군의 북쪽이고 부여의 남쪽이며 고구려의 서쪽이다. 낙랑군도 고구려 서쪽이라 했다. 

 

고구려령주기명적(高句麗令主其名籍)의 해석이 분분한데 필자는 "고구려현 현령(縣令)이 그 명부를 기록했다"로 해석한다. 대방현(帶方縣) 현령(縣令)을 대방령(帶方)이라 했듯이 고구려현 현령을 고구려령(高句麗令)이라 한 것이며, 주(主)는 注 또는 註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대목에서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고 고구려가 현도군에 속한다고 했기에 현도군이 고구려를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현도군은 고구려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상대로 외교와 전쟁을 수행했다. 중국 사서는 항상 이런 식이다. 현도군에서 천 리 밖에 있는 부여가 현도군에 속한다고 했고 심지어 대방군에서 만 리 밖에 있는 왜국이 대방군에 속한다고 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동옥저(東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時, 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建武  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 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 <北沃沮>畏之, 夏月 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 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王 > 別遣追討宮, 盡其東界.[三國志魏書東夷傳]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닷가에 거주한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 천 리는 된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 남쪽으로 예맥과 접한다. 가구는 5천이다. 대군왕은 없고, 읍락마다 장수(長帥)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대동소이하다. 한(漢)나라 초에 연(燕)에서 도망해온 위만이 조선왕으로 있을 때 옥저가 복속했다. 한(漢) 무제 원봉 2년(BC 109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만들었는데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만들었다. 후에 이맥(夷貊)이 침략하기에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 지금 이른바 현도군의 옛 고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땅이 넓고 멀어서 '동부도위'를 따로 설치하고 '불내성'을 치소로 하여 단단대령 동쪽 7현을 다스렸다. 이 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漢)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년)에 변방의 군(郡)을 없애고 도위를 폐지했다. 그 후 현의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고 불내, 화려, 옥저 제현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동옥저는 나라가 작아 큰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구려에 복속 되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격파했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삼천이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 하고  남옥저에서 팔백여 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고 읍루와 접한다. 읍루는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즐겨해서  북옥저가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깊은 동굴 속에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 거주한다. 궁을 추격하여 토벌하라고 왕기(王頎)를 따로 보내 (북옥저의) 동쪽 경계에 이르렀다.

 

※ 개마대산은 백두산이고 단단대령은 백두대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함경도 안변까지 옥저 땅이며 옥저의 남쪽 경계는 철령이라고 했다. 삼국지에 동옥저는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되고 북쪽으로 부여, 읍루와 경계를 접한다고 했으니 두만강 유역까지 북옥저에 포함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BC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한 후 왕위를 빼앗아 왕험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위만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영토가 수천 리에 달했다. 삼국지는 이 때 옥저도 위만에게 정복당한 것으로 보았다. 

 

삼국지에서 고구려의 위치는 환도성을 도읍으로 한 압록강 유역이고 남쪽으로 조선과 접한다. 이는 조선의 위치가 압록강 남쪽이라는 뜻이다. 옥저는 고구려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큰 바다이다. 삼국지는 한무제가 BC 108년에 조선을 멸하고 남옥저 땅에 현도군을 설치했으나 이맥(夷貊)의 침략 때문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고구려전에 고구려인을 맥인(貊人)이라 했고 옥저의 위치로 보아도 현도군을 침범한 이맥(夷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는 조선이 망한 후에도 고구려가 존속했다는 뜻이다. 역사학계는 현도군이 옥저에서 요동으로 이전한 시기를 BC 75년으로 추측하는데 그 근거는 한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 한서(漢書) 소제본기(昭帝本紀)

元鳳 六年 春 正月 募郡國徒遼東玄菟城

소제 12年(BC 75년) : 원봉(元鳳) 6년 봄 정월 여러 군국(郡國)에서 무리를 모아 요동성과 현도성을 쌓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예(濊)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며 동으로 큰 바다에 달한다.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단단대산령' 서쪽은 낙랑군에 속한다. 단단대산령 동쪽에 7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다스린다. 모두 예(濊)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애고,  거수들을 후(侯)에 봉하니, 지금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이다.
한나라 말에 구려에 속하였다. 정시 6년 (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단단대산령 동쪽 예(濊)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에 나섰고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247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니, 다시 '불내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백성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에 낙랑군에 와서 조알했다. 낙랑, 대방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 단단대령은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에서 철령 이남을 오늘날 태백산맥이라고 칭한다. 태백산맥 서쪽은 조선 영토였다가 낙랑군으로 되었다. 예(濊)는 태백산맥 동쪽이다. 한나라는 태백산맥 동쪽 땅에 7현을 설치하고 옥저에도 여러 현을 설치했다. 낙랑군 동부도위가 영동 7현과 옥저를 다스리다가 서기 30년에 폐지했다. 삼국지에 기록된 조선과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및 태백산맥 서쪽 강원도이며 태백산맥 동쪽 강원도 동해안과 함경도 동해안은 일시 낙랑군에 포함되었다. 삼국지는 조선의 영역을 서술하고서도 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의 위치는 언급하지 않았고 낙랑군의 치소가 어디인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한(韓)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凡五十餘國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한(韓)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며 남쪽은 왜와 접한다.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 오십여 나라이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여 사시 조알하였다. 환제와 영제말에 한예가 강성해져서 군현들이 능히 제압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196~220)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 땅을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었다.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거두고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점점 나왔다. 이후로 '왜'와 '한'은 '대방군'에 속하였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 自服印綬衣 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237~239) 중에 명제가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은밀히 바다 건너 보내 대방군과 낙랑군을 평정했다.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 읍군(邑君)의 벼슬을 하사하고, 그 다음 서열에게는 읍장(邑長)을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할 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착용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착용한 자가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본래 '한국'을 다스렸다고 하면서  '진한'의 8개국을 분할하여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이 잘못해서 신지와 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병사를 일으켜 토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다. 마침내 두 군은 한을 멸했다. 

 

 

삼국지 동이전의 형세(BC 1세기)

 

서진(西晉 265~317)에서 사마표(司馬彪)가 후한(後漢)의 역사 속한서(續漢書)를 저술했다. 사마표의 생몰 연도는 불분명한데 서진(西晉) 혜제(惠帝 재위 290~307) 말년에 60여 세로 사망했다고 하니 240년대 초에 출생했을 것이다. 속한서는 290년 무렵 삼국지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는데 대부분 멸실되고 지(志)만 전해 와서 이를 속한지((續漢志)라고 하며 훗날 후한서에 편철되었다. 지리지(地理志)에 해당하는 것이 군국지(郡國志)로서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년) 때의 행정구역인데 현도군 대목은 다음과 같다.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 현도군(玄菟郡)  

武帝置。雒陽東北四千里。六城,户一千五百九十四,口四万三千一百六十三。

현도군 : 무제가 설치했다. 낙양 동북 사천 리다. 여섯 성, 1,594 호, 인구는 43,163 명이다.

 

高句麗縣  遼山遼水出  고구려현, 요산에서 요수가 나온다.

西盖馬縣  서개마현

上殷台縣  상은태현 

高顯縣  故属遼東郡  고현현,  예전에는 요동군에 속했다.

候城縣  故属遼東郡  후성현,  예전에는 요동군에 속했다.

遼陽縣  故属遼東郡  요양현,  예전에는 요동군에 속했다.

 

남북조시대 남조(南朝)의 송(宋 420~479) 왕조에서 440년대에 범엽(范曄 398~445)이 후한서를 저술했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대부분 삼국지위서동이전을 옮겨 적었다.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국(夫餘國)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至安帝 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抄樂浪,殺傷吏民。

桓帝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斬首千餘級

 

부여국은 현도군의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땅은 사방 이천 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서기 111년)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군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환제(桓帝) 영강(永康) 원년(서기 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노략질했다. 현도군 태수 공손역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부여국의 남쪽에는 고구려와 현도군이 있다고 했다. 낙랑군이 고구려나 현도군의 남쪽에 있다면 부여가 낙랑군을 공격할 수 없다. 후한서 부여전은 낙랑군과 현도군이 요하 서쪽에 있음을 말해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 句驪一名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하며 땅은 사방 이천 리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구려는 맥(貊)이라고도 한다.

 

이 대목은 한(漢)나라의 조선 침공 당시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후한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기는 조선의 멸망을 상세하게 기록했지만 고구려의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았고 한서도 마찬가지다. 사기는 조선열전에서 무제의 조선 평정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封參為澅清侯,陰為荻苴侯,唊為平州侯,長為幾侯。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為庶人。... 兩軍俱辱將率莫侯矣  [史記 朝鮮列傳]

 

원봉 3년(BC 108년) 여름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래도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우거왕의 대신 성기가 다시 반항하여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상(相)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두었다. 참을 홰청후(澅淸侯)에, 한음을 적저후(荻苴侯)에, 왕겹을 평주후(平州侯)에, 장항(長降)을 기후(幾侯)에 봉(封)하였다. 노최(路最)는 아비가 죽었고, 매우 공(功)이 크므로 온양후(溫陽侯)가 되었다.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여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로 기시(棄市: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고 시신을 길거리에 버려두는 형벌)에 처해졌다. 누선장군은 군대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기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은 죄로 죽여야 마땅했지만 돈으로 속죄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양군(兩軍) 모두 굴욕을 당하였고 제후로 봉해진 장수가 아무도 없었다. [사기 조선열전]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전쟁은 왕험성의 항복으로  종료되었다. 고구려와의 전쟁은 없었다. 삼국지는 조선 멸망 후에도 고구려가 존속했음을 상세히 기술했다. 후한서는 한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했으나 고구려 정복에 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식의 기록은 불신하는 것이 역사학의 기본 원칙이다. 후한서 고구려전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 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安帝永初五年, 宮遣使貢獻, 求屬玄菟.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傳]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25년(서기 49년) 봄, 구려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했는데 요동군 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새(塞)에 머물렀다. 그 후 구려왕 궁(宮,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굳세어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했다.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105년) 봄, 다시 요동군에 들어와 6개 현을 약탈했다.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를 참했다. .....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118년),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군을 약탈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나와 고구려를 공격해 예맥의 거수(渠帥)를 사로잡거나 죽이고 병마(兵馬)와 재물을 노획했다. 이에 궁이 사자(嗣子 - 후계자) 수성(遂成- 차대왕, 태조왕의 동생)을 보내 2천 여명을 지휘해 요광 등에 맞서게 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수성은 험지를 차지해 대군(大軍)을 차단하고 은밀히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해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살상했다. 이때 광양군, 어양군, 우북평군, 탁군의 속국에서 3천여 기병을 뽑아 함께 구원하게 했는데 맥인(貊人)은 이미 떠난 뒤였다.
여름, (고구려가) 다시 요동의 선비(鮮卑)족 8천여 명과 함께 요대(遼隊 : 요동군 요대현)를 공격해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채풍 등이 추격했으나 신창(新昌 : 요동군 신창현)에서 전사했다, 공조 경모,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는 몸으로 채풍을 지키다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 마침내 궁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이끌고 현도군을 포위했다. 부여왕이 2만여 명과 아들 위구태를 보내 주군(州郡)과 힘을 합쳐 이를 격파하고 5백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순재 양가 원년 현도군에 둔전 육부를 설치했다. 질제(재위 145 ~ 146)와 환제 사이에 요동군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아 갔다. [후한서 동이열전고구려전]

 

※ 후한서는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고구려가 현도군과 요동군을 빈번히 공격한 것은 어찌 된 연유인가? 고구려가 현도군을 몰아내고 독립한 것인가? 그렇다면 고구려의 독립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 하고 최소한 누가 언제 현도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재건했는지 기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화려성은 낙랑군에 속한다. 낙랑군이 현도군에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동옥저전과 예전(濊傳)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 서쪽이라고 했는데 단단대산령은 백두대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서쪽으로 한(漢)나라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빈번하게 약탈했다. 그러는 동안 남쪽에서 낙랑군과 전쟁한 기록은 없다. 

 

어떤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기록에 의하여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학의 사료 검증 방식이다. 그런데 낙랑군의 위치가 대동강 유역이라고 한 삼국지 옥저전과 예전(濊傳)의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고구려전 및 부여전의 기록에 의하여 부정된다. 현도군의 위치에 대한 기록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후한서의 기록이 허구라는 것은 후한서의 다음 대목에서 드러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동옥저(東沃沮)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其地東西夹,南北長,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言語、食飲、居處,衣服,有似句驪。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罷都尉官,後皆以封其渠帥,為沃沮侯。其土迫小,介於大國之間,遂臣屬句驪。

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皆與南同。界南接挹婁。挹婁人憙乘船寇抄,北沃沮畏之,每夏輒臧於巖穴,至冬船道不通,乃下居邑落。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임하고 북쪽으로 읍루(挹婁)와·부여(夫餘),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한다. 그 땅은 동서가 좁고 남북은 길어 가히 천리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한다. 언어·음식·거처·의복은 고구려와 닮았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玄菟郡)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 때문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현(縣)으로 고쳐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 광무제(光武帝)에 이르러 도위관(都尉官)을 혁파하고, 거수를 모두 옥저후로 봉하였다. (옥저는) 그 땅이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결국 고구려에 신하로 복속하였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라 하며 남옥저에서 팔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남옥저와 같다. 읍루의 남쪽과 접하는데 읍루인들은 배 타고 노략질을 즐겨한다. 북옥저가 두려워 해서 여름에는 동굴 속에 숨고 겨울에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거주한다.

 

한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한 곳은 남옥저인데 남옥저의 위치로 보아 현도군에 침입한 이맥(夷貊)은 옥저의 서쪽에서 접경한 고구려뿐이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고구려를 일명 맥(貊)이라고 했다. 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고구려가 현도군을 침략했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濊)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教以礼義田蠶,又制八条之教。其人终不相益,無門户之閉。婦人貞信。飲食以籩豆。其後四十餘世,至朝鮮侯准自稱王。漢初大亂,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而燕人衛滿擊破准,而自王朝鮮,傳國至孫右渠。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内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罢。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玄菟、真番四郡。至昭帝始元五年臨屯、真番,以并樂浪、玄菟。玄菟復徙居句驪。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後以境土廣遠,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自内屬已後,風俗稍薄,法禁亦浸多,至有六十餘条。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領東地,悉封其渠帥為縣侯,皆歲時朝賀。

 

예(濊)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 진한에 접하며 동쪽으로 대해에 닿고 서쪽으로 낙랑에 이른다. 예, 옥저, 구려는 본시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옛날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 한초(漢初)에 연인(人) 위만(衛滿)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왕이 되었고 나라를 전하여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사군을 설치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년)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했다. 다시 현도군을 고구려로 옮겼다. 단단대령 동쪽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였는데 후에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 동쪽 7개 현을 다시 나누어 낙랑군 동부도위를 설치했다. ...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년)에 도위관을 없애 영동지역을 포기하고 거수들을 모두 현후로 봉하니 모두 세시에 조하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예(濊)는 태백산맥 동쪽이고 태백산맥 서쪽은 낙랑군이다. 옥저의 서쪽이 낙랑군이라 했으니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및 태백산맥 서쪽 강원도를 포함한다. 후한서는 예, 옥저, 고구려가 모두 옛날 기자조선의 땅이라고 했다.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조선의 도읍인 왕험성이 어디인지, 낙랑군의 치소가 어디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진번군과 임둔군의 위치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무제(漢武帝)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후에 이맥(夷貊)의 침략으로 인해 고구려 서북쪽으로 현도군을 옮겼다는 내용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동일하다.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고구려를 맥(貊)이라 했고 옥저의 위치로 보아도 옥저 땅에 설치된 현도군을 침략한 이맥(夷貊)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한무제의 재위 기간은 BC 141년부터 BC 87년까지다. BC 108년에 사군을 설치하고 무제 사후(死後) BC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했다. 그 후 이맥(夷貊) 즉 고구려의 침략 때문에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한(漢)나라가 BC 75년에 요동성과 현도성을 쌓았으니 현도군을 옮긴 시기는 BC 75년으로 본다.

 

부여전과 고구려전에서 현도군은 남쪽으로 요동군, 북쪽으로 부여, 동쪽으로 고구려와 접했다. 삼국지는 부여와 고구려가 현도군에 속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부여와 고구려에 대한 회유와 전쟁을 현도군이 관할했다는 뜻이다.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부여와 고구려는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에도 후에도 독립국으로 존속했다. 

 

현도군에 대한 후한서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전 :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 고구려를 일명 맥(貊)이라고 한다.

동옥저전 :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玄菟郡)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夷貊) 즉 고구려의 침략 때문에 옥저 땅의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

예전(濊傳) : 한무제 사후(死後)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고 다시 현도군을 고구려로 옮겼다. 

부여전, 고구려전 : 현도군의 위치는 요동군의 북쪽이고 부여의 남쪽이며 고구려의 서쪽이다. 고구려는 현도군과 요동군을 빈번하게 공격했다. 

 

위의 네 가지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현도군의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다. 고구려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면 이미 망한 고구려가 어찌 옥저에 설치된 현도군을 침략할 수 있겠는가? 한(漢)무제의 고구려 정복 전쟁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도 없는데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는 한 줄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가?  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허구임이 명백하다. 

   

◇ 후한서 동이열전 삼한(三韓)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济是其一國焉。大者萬餘户,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 ... 馬韓之西,海島上有州胡國

 

한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마한, 둘은 진한, 셋은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이다. 북으로 낙랑, 남으로 왜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국이다. 북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역시 12국이다. 남으로 역시 왜와 접한다.  모두 78국이며 백제가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구이다.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 땅을 합하여 사방 4천여 리이고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제한되었다. 모두 옛 진국이고 마한이 가장 크다, ... 마한의 서쪽 바다 섬에 주호국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의 형세 (BC 1세기)

 

 

중국에서 436년에 북위(北魏, 386~534)가 북연(北燕 407~436)을 멸하고 요하 서쪽 지역을 차지하면서 중국과 고구려는 요하를 경계로 대치하게 되었다. 

 

 

 

북위(北魏, 386 ~ 534) 시대의 관료였던 역도원(酈道元, 470 전후 ~ 527)이 수경(水經)에 방대한 주석을 달아 515년경 수경주(水經注)를 완성했다. 수경주(水經注)는 북위 영토뿐만 아니라 남조(南朝)의 영토인 장강(長江) 이남과 고구려의 영토인 요하(遼河) 이동의 하천까지 기술하였다. 수경(水經)은 중국의 하천을 기술한 지리서로서 저자와 저술 시기가 불분명하며 원본은 멸실되었고 수경주의 인용문을 통하여 그 내용이 전해 온다. 수경과 수경주는 후대에 숱한 오류가 지적되었는데 현도군 관련 대목은 다음과 같다.

 

水經 : 

大遼水東過安市縣 西南入于海.
대요수는 안시현 동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玄菟髙句麗縣 有遼山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入于大遼水也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遼山)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온다.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水經注

玄菟郡 髙句麗縣, 故髙句麗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 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郡國志曰 縣故屬遼東 後入玄菟  小遼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 與大梁水㑹.

 

현도군 고구려현 : 옛날에 고구려는 오랑캐의 나라였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BC 109년)에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이곳(고구려)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다. 왕망이 말한 하구려다. 군국지(郡國志)에 이르기를 고구려현(縣)은 옛날에 요동군(遼東)에 속했는데 후에 현도군(玄菟)에 편입되었다고 하였다. 소요수가 요산(遼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현(遼陽縣)을 지나 대양수(大梁水)와 만난다.

 

※ 한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대목은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인용했는데 필자가 앞에서 말했듯이 후한서의 이 대목은 허무맹랑한 낭설이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는 대목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처음 나오고 후한서가 옮겨 적은 것을 역도원이 재인용했다. 

 

水經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注]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허신(許慎)이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현과 루방현을 나와 남쪽으로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는데 조선은 옛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는 백성에게 의(義)와 밭갈기와 옷감짜기를 믿음과 두터움으로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알게 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땅이 사방 수천리였다. 그 손자 우거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는데, 우거를 패수(浿水)에서 쳐부수고 마침내 우거를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옛 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 漢이 흥하자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새(塞)를 복원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을 고찰하면 지금과 옛 일에 차이와 오류가 있는데 모두 수경(水經)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역도원은 왕험성이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라고 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이었다.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의 북쪽에 있는 성(城)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지만 앞뒤 맥락으로 보아 평양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신은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패수가 평양성을 지나간다는 뜻으로 해석되므로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을 가리킨다. 패수가 조선현을 지나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서쪽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역도원은 한(漢)나라가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고 한 사기(史記)를 인용했는데 이는 사기에 기록된 패수를 대동강으로 인식한 것이다.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라도 있지만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가 평양을 지나가며 평양이 왕험성이라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기에 의하면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니 패수에 붙어있는 평양성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대동강이 한(漢)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라면 왕험성은 임진강이나 한강을 끼고 있어야 하고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패수는 압록강이라야 한다. 역도원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 부르니까 대동강을 한(漢)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로 생각하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十三州志曰 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십삼주지에 이르기를 대요수는 국경 밖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小遼水又西南, 逕襄平縣, 為淡淵. 晉永嘉三年涸.

소요수(小遼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을 지나고 담연(淡淵)이 된다. 진(晉) 영가(永嘉) 3년에 (담연의) 물이 말랐다.

 

小遼水又逕遼隊縣, 入大遼水. 司馬宣王之平遼東也, 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소요수(小遼水)는 요대현(遼隊縣)을 지나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요동을 평정하고 이 강에서 공손연(公孫淵)의 목을 베었다. 

 

大梁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 入小遼水, 故地理志曰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其水西南流, 故謂之為梁水也.

대양수는 북쪽 국경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遼陽)에 이르러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옛 지리지에 이르기를 대양수(大梁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遼陽)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 강(其水, 대양수)은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옛날에는 양수(梁水)라 하였다.

 

수경과 수경주에서 대요수는 요하를 가리킨다.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를 소요수 상류라고 했는데 소요수는 지금의 혼하(渾河)다. 수경주는 소요수가 양평현을 지나 요양에서 대양수와 만나고 요대에서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키며 공손연 정벌은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수경주는 사마의가 소요수에서 공손연을 죽였다고 했는데 648년에 당(唐)에서 편찬한 진서(晉書) 선제본기는 238년 8월 사마의가 양수(水)에서 공손연을 죽이고 양평을 점령했다고 했다. 

 

사마표의 군국지는 전한(前漢) 때 요동군에 속했던 고현현, 후성현, 요양현이 후한(後漢) 때 현도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수경주에서 군국지를 인용하여 고구려현이 요동군에서 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한 것은 역도원이 잘못 기술한 것이다. 후한서는 한무제가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고 기술했는데 역도원이 이를 수경주에 옮겨 적었다. 군국지는 "현도군 고구려현의 요산에서 요수가 나온다. (高句麗  遼山遼水出)"라고 기술했는데 수경주는 요양현이 요수의 남쪽 끝에 있다고 했으니 현도군에 편입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요양현의 위치가 틀린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고구려가 언제 건국했는지 몰랐기에 위만조선과 고구려가 동시대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 역시 그렇게 생각해서 한무제가 조선을 정복할 때 고구려까지 정복하고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현도군 대목에서 충돌하는데 그 밖에 두 책 모두 애매모호하거나 앞뒤가 모순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고구려 건국 과정을 처음으로 기록한 사서는 북위(北魏, 386~534)의 정사 위서(魏書)다. 위서(魏書)는 북제(北齊, 550~577)에서 559년에 위수(魏收)가 편찬했는데 고구려열전에서 주몽의 탄생 신화와 고구려 건국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음과 같다. 

 

魏書 高句麗列傳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初,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河伯女)로, 부여(夫餘) 왕에 의해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비치자 몸을 이끌고 피하였는데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만 하였다. 부여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알을 버려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와 말들이 피하였다. 나중에 들에 알을 버리자 새들이 깃털로 그 알을 감싸 주었다. 부여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다. 드디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는데, 부여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며 그를 없애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양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개의 화살만 주었다.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으나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몰래 알아차렸다. 그녀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에게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어디로든 적당한 곳으로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주몽은 이에 오인(烏引)⋅오위(烏違)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치다가 추격하는 병사가 거의 쫓아 오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을까?” 하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麻衣)을 입고, 한 사람은 승려의 옷(納衣)을 입고, 한 사람은 마름 옷(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은 그들과 더불어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로 인하여 성(姓)으로 삼았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주몽이 도망한 뒤 아들을 낳으니, 처음에는 이름을 여해(閭諧)라 하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 되었음을 알고, 그의 어머니와 도망하여 왔다. 그의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부르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뒤를 이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왕이 되었다.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배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위서(魏書)에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단서조차 없고 한무제가 고구려를 정복했다는 내용도 없다. 위서(魏書)는 북위(北魏)의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이 요하의 서쪽 지역에 있다고 기술했다.  

 

636년에 편찬한 양(梁 502~557)나라의 정사 양서(梁書)는 동이열전에서 고구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高句麗者 ... 其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之東,去遼東千里。漢魏世,南與朝鮮、穢貃,東與沃沮,北與夫餘接。漢武帝元封四年,滅朝鮮,置玄菟郡,以高句驪爲縣以屬之。

 

고구려는 한(漢)의 현도군이다. 요동의 동쪽에 있고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 리를 간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한무제 원봉 4년(BC 107년)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양서(梁書)는후한서를 옮겨 적었는데 중간에 한위세(漢魏世)가 들어간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한(漢)나라를 이은 위(魏)나라는 220년부터 265년까지 존속한 조위(曺魏)를 말하는데 조선이 멸망한지 삼백여 년 후이다. 또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 등 4군을 설치한 시기는 원봉 3년(BC 108년)인데 이것을 원봉 4년(BC 107년)이라고 했다. 이는 집필자의 착오임이 분명함에도 오늘날 여러 역사학자가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은 BC 108년에 설치되었고 현도군은 BC 107년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안사고(顔師古, 581~645)는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언어학자이며 역사가로서 수서(隋書) 편찬에 필진으로 참여했다. 구당서(舊唐書) 안사고열전에 의하면 정관(貞觀) 11년(637년)에 당태종(唐太宗)이 안사고에게 한서(漢書) 주석서의 집필을 명했다. 한서주(漢書注)는 641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안사고는 한서주(漢書注)에서 고구려가 일어선 압록강 일대가 한()나라 현도군의 서개마현이라고 했다. 한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학설은 후한서에서 시작되어 수경주(水經注)와 양서(梁書)가 이어 받았으나 서개마현의 위치로 압록강 일대를 지목한 사람은 안사고가 처음이다. 또한 안사고는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던 평양성 일대가 한()나라 낙랑군의 옛땅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수경주(水經注)를 이어 받았다. 

 

 

한서지리지 안사고 주석본 ; 대문자는 원전, 소문자는 주석

 

반고가 저술한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원전에는 군(郡)의 호구(戶口) 숫자와 관할 현(縣)의 명칭만 기재되어 있다.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된지 26년만에 폐지되어 한서지리지에 기록되지 않았다. 군현의 명칭에 작은 글자로 부기(附記)한 설명은 모두 안사고 본인의 해석이거나 타인의 해석을 인용한 것이다. 필자는 이런 주석들이 과연 역사적 진실인지 검증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이런 작업이 없었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안사고의 한서지리지 주석

◇遼東郡 : 秦置 屬幽州

요동군 : 진(秦)나라가 설치했고 유주에 속한다.

 

襄平 : 有牧師官

양평현 : 목사관이 있다.

 

望平 :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망평현 : 대요수가 국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250 리다.

※대요수는 지금의 요하(遼河)다.

 

遼陽 :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요양현 : 대양수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현에 이르러 요수로 들어간다.

 

※대양수는 지금의 태자하(太子河)다.  안사고가 말한 요양현의 위치는 태자하의 끝으로서 지금의 요양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다. 속한서 군국지에 요동군 요양현을 현도군에 편입했다고 했는데 요양현이 태자하의 끝이면 현도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도군에 편입하기가 불가능하다. 군국지와 한서주 중에 하나는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居就 : 室偽山,室偽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

거취현 : 실위산에서 실위수가 나와 북으로 양평현에 이르러 대양수로 들어간다.

 

※실위수는 지금의 탕하(湯河)다. 안사고가 양평현이라고 한 곳은 지금의 요양이다. 

 

西安平 : 莽曰北安平

서안평현 : 왕망이 북안평현으로 고쳤다.

 

番汗 : 沛水出塞外,西南入海 , 應劭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

번한현 : 패수(沛水)가 국경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응소가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국경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응소가 패수(沛水)를 한수(汗水)라 했다는 것이다. BC 290년경 연(燕)나라 장수 진개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을 국경으로 삼았다. 필자는 지금의 요하와 대릉하 중간에 있는 요양하(饒陽河)가 패수(沛水)이고 번한(番汗)은 요양하 하류이며 만번한(滿番汗)과 같은 곳이라고 보는데 이런 견해는 필자가 처음이다.

 

이병도는 청천강을 패수(浿水)라 하고 청천강 하류를 만번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사기에 의하면 만번한은 패수(浿水)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청천강 하류를 만번한으로 본다면 청천강은 패수(沛水)로 보아야 하고 압록강을 패수(浿水)로 보아야 한다. 

 

險瀆 : 안사고는 험독현에 기다란 주석을 달았다.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므로 별도로 후술한다. 

 

◇玄菟郡 : 武帝元封四年開. 髙句驪, 莽曰下句驪. 属幽州. 縣三, 髙句驪, 上殷台 莽曰下殷, 西蓋馬

현도군 :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BC 107년)에 개설했다. 고구려(髙句驪)다. 왕망이 하구려(下句驪)라 했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현이 셋인데 고구려현, 상은태현, 왕망이 하은태현이라 했다, 서개마현이다.

 

※한서 무제본기는 원봉(元封) 3년(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했다. 사기, 삼국지, 후한서, 수경주 모두 원봉(元封) 3년(BC 108년)이라 했고 양서(梁書)는 현도군을 원봉(元) 4년(BC 107년)에 설치했다고 기록했는데 안사고는 양서(梁書)를 옮겨 적었다. 또 후한서, 수경주(水經注), 양서(梁書)는 한무제가 고구려를 현도군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했는데 안사고도 이를 따랐다. 

 

高句驪 :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고구려현 : 요산에서 요수가 나와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가 있는데 서북으로 흘러 국경 밖으로 간다.

 

※요수는 지금의 혼하(渾河), 대요수는 지금의 요하다. 혼하의 발원지에서 요하의 지류 청하(淸河)와 송화강의 지류 휘발하(輝發河)가 나온다. 청하는 서북으로 흘러 요하로 들어가고 휘발하는 동북으로 흘러 국경 밖으로 나가서 어느 것이 남소수인지 알 수가 없다. 필자는 남소수가 서북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동북의 오기이고 남소수는 지금의 휘발하(輝發河)라고 본다. 

 

上殷台 : 王莽曰 下殷台

상은태현 : 왕망이 하은태현으로 고쳤다.

 

西蓋馬 : 馬訾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서개마현 :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을 지나 2천1백리를 간다.

 

군국지에서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의 하천에 대한 기술은 오직 고구려현의 요수(遼水)뿐인데 수경주에 의하면 요수는 지금의 혼하(渾河)다. 수경주가 기술한 고구려현의 위치는 혼하(渾河)의 상류이니 압록강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반고의 한서지리지 원전과 사마표의 군국지는 현도군에 고구려현 외에 상은태현과 서개마현도 있다고 했지만 그 위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안사고의 주석은 마자수와 염난수가 어느 강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당(唐)나라 재상 두우(杜佑)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通典)에서 마자수(馬訾水)는 압록강(鴨綠江)이고 염난수(鹽難水)는 동가강(佟佳江)임을 명확하게 기술했다.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入海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通典]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이다. 수원(水源)은 동북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강물의 색깔이 오리 머리색을 닯았기에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요동에서 5백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만나 두 강이 합하여 서남으로 흘러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고구려에서 이 강이 제일 크다. 물결이 이는데 푸르고 맑으며, 나루터마다 큰 배가 서 있다. 그 나라에서 이를 천연의 참호로 여긴다. 강의 너비가 3백보이고, 평양성 서북 450리에 있다. [통전]

 

 

    서개마현 - 안사고 설

 

 

    현대의 명칭

 

 

     한서주의 지명 (이광헌 해석)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新唐書)는 고구려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高麗 , 水有大遼、少遼 , 大遼出靺鞨西南山,南曆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曆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新唐書 高麗列傳]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말갈 남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나간다. 소요수는 요산의 서쪽에서 나와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국경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소요수와) 합친다. 마자수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오리 머리와 같은 색이라 압록수라 부르며 국내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치고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에 있기에 큰 배로 사람을 건네니 (압록수를) 참호로 삼는다. [신당서 고려열전]  

 

※ 신당서는 대요수가 안시성을 지나간다 하고, 마자수가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마자수의 하구를 잘못 기술한 것이다. 마자수의 하구를 안사고는 서안평, 통전은 안평성이라고 했다. 삼국지 오서손권전(吳書孫權傳)에 의하면 234년 오(吳)나라 사절단이 배를 타고 고구려의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했다. 따라서 압록강 하구에 있는 것은 서안평이 아니라 안평이다.  

 

삼국사기 제13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瑠璃明王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三國史記 瑠璃明王本紀]

유리명왕 33년(서기 14년) 가을 8월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이끌고 서쪽 양맥을 쳐서 그 나라를 멸하고 진군하여 한나라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유리명왕본기] 

 

유리명왕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 양맥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서쪽에 한(漢)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이 있었다. 고구려현은 현도군의 동부지방이다. 왕망(재위 8~23)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현도군의 동쪽 바깥에 독립국으로 존재했고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압록강 중류의 환도성이었다.

 

고구려는 염난수(동가강) 유역에서 일어나 마자수(압록강) 유역으로 뻗어 나갔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으나 이는 위만조선 시대로부터 구백 년 전의 상황이다. 

 

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後漢書 東夷列傳]

예(濊), 옥저, 구려는 본시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대의 여러 사서에 이르기를 주(周)나라 무왕이 상(商)나라를 멸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상나라가 멸망한 때를 BC 1046년으로 본다.  

 

일각에서는 위만조선이 압록강과 동가강 유역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한(漢)나라와 조선이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서 성립하지 않는다. 안사고가 주장하는 현도군과 요동군 사이에는 경계로 삼을 수 있는 하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사고 사후 당(唐)에서 659년에 완성한 북사(北史)는 한() 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였다. 

 

漢武帝 元封四年, 滅朝鮮, 置玄菟郡, 以高句麗爲縣以屬之. [北史 高麗列傳]

한무제 원봉(元封) 4년(BC 107) 조선(朝鮮)을 멸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했다.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북사 고려열전]

 

양서(梁書)는 한무제가 원봉(元封) 4년(BC 107)에 조선(朝鮮)을 멸했다고 잘못 기술했는데 이를 안사고와 북사가 그대로 옮겨 적었다. 삼국지는 한무제가 현도군을 처음 설치한 곳은 옥저이고 그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했고, 후한서는 한무제가 옥저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했다. 수경주, 양서, 한서주, 북사는 후한서를 옮겨 적었다. 필자가 이미 앞에서 기술했듯이 한무제가 고구려에 현도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아래는 한서지리지 낙랑군에 대한 안사고의 주석이다.

◇樂浪郡 : 武帝元三年開 應劭曰 樂浪郡故朝鮮國也

낙랑군 :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에 개설했다. 응소가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라 했다.

 

朝鮮 : 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조선현 :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다고 했다.

 

응소(應劭 204년 死)는 후한(後漢, 25~220)의 역사학자로서 190년경 한서 주석서를 저술했으나 원본은 망실되고 몇 대목이 다른 서책에 인용되어 전해온다. 응소는 조선과 왕험성 및 낙랑군의 위치를 요하 서쪽 지역이라 했다. 

 

浿水 : 浿水西至增地入海,

패수현 :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안사고 생존시에 중국에서도 대동강을 패수(浿水)라고 불렀다. 당(唐)에서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 고려열전(高麗列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高麗 治平壤城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

고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그 성은 동서 6리이며 남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

  

안사고가 집필에 참여하여 636년에 편찬한 수서(隋書) 고려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고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안사고는 요동군과 현도군의 하천을 알기 쉽게 기술하고서도 낙랑군의 하천은 애매모호하게 기술했다. 패수가 낙랑군에 있다고 하면서도 패수가 평양성을 지나간다는 공지의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 안사고가 한서주를 저술하면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닿아있다고 부기했다면 패수가 어느 강인지 명확했을 것이다. 

 

안사고는 한(漢)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평양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패수가 평양성을 지나간다고 명기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한서주(漢書注)에 기록된 패수는 분명히 대동강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청천강을 패수라 하고 대동강을 열수라 하는데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含資 :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현 : 대수가 서쪽으로 대방현(帶方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류 사학계는 황해도 서흥군을 함자현으로, 봉산군을 대방현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서흥강을 대수(帶水)로 보아야 한다. 고대에는 재령평야가 바다였으니 서흥강은 바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서흥강은 낙랑군의 삼대 하천으로 지목하기에는 지나치게 작아서 대다수가 임진강이나 한강을 대수라 한다. 그렇다면 봉산군을 대방현으로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呑列 :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列亦作洌

탄렬현 : 분려산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현(黏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820 리를 흐른다. 列은 洌로 쓰기도 한다.

 

※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200년 후 남조(南朝)의 양(梁 502~557)나라에서 유소(劉昭 514~565)가 주석을 달았다. 안사고의 한서주에 백년 가까이 앞선다. 사마표의 원문과 유소의 주석은 훗날 북송(北宋)에서 후한서와 합본되어 정사로 인정되었다. 군국지(郡國志)의 낙랑군 열구현에 유소(劉昭)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列口縣 : 郭璞注山海經曰 列水名 列水在遼東

열구현 : 곽박(郭璞)이 산해경(山海經)에 주를 달아 이르기를 열(列)은 강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遼東)에 있다고 했다.

 

사기에 의하면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면서 육군과 수군이 열구(列口)에서 만나 왕험성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열구는 열수(列水)의 하구(河口)를 말한다. 그런데 한나라 육군이 패수 서쪽에서 참패하여 수군만 열구에 상륙해서 단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다가 참패했다. 이 기록으로 왕험성이 열수에서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다면 열수는 대동강이라야 한다. 이래서 한국의 주류학계는 대동강을 열수로 보고 대동강 하구를 열구라 한다. 

 

昭明 : 南部都尉治

소명현 : 남부도위가 다스린다.

 

不而 : 東部都尉治

불이현 : 동부도위가 다스린다.

 

한서주에 앞서 편찬된 삼국지와 후한서는 지금의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및 태백산맥 서쪽 강원도를 낙랑군이라 했다. 안사고는 후한서의 학설에 따라 고구려를 현도군이라 하고 낙랑군에 대해서도 후한서를 따랐다. 한서주는 낙랑군에 패수, 대수, 열수가 있고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큰 하천 세 개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청천강, 대동강, 한강이다. 그런데 안사고 생시에 청천강은 살수(),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다. 

 

안사고가 패수, 대수, 열수 중에 열수만 길이를 기재한 까닭은 세 하천 중에 열수가 가장 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열수는 한강이고 그 발원지 분려산은 금강산이며 한강 하구인 파주(坡州)가 점제현이다. 임진강은 남쪽으로 흐르지만 서해로 들어간다. 조선왕조에서 정약용은 대동강을 패수, 임진강을 대수, 한강을 열수라 했다.

 

후한서, 수경주, 양서, 한서주는 한무제가 조선을 멸할 때 고구려도 멸하고 고구려 땅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한 무제가 조선을 침공할 당시 조선의 북쪽에 고구려가 존재했다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었겠는가? 한나라가 조선에 이어 고구려를 정복했다면 사마천은 그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다.

 

속한서 군국지(郡國志)에 의하면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년) 때 요동군의 무려현, 험독현, 방현과 요서군의 창료현, 빈도현, 도하현을 합쳐서 요동속국(遼東屬國)을 신설했다. 군국지 요동속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마표(司馬彪)의 저술에 유소(劉昭 514~565)가 주석을 달았다.

 

遼東屬國, 故邯鄉, 西部都尉, 安帝時 以為屬國, 都尉别領六城, 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故天遼, 屬遼西.

賔徒, 故屬遼西.

徒河, 故屬遼西.

無慮, 有醫無慮山.

險瀆,


요동속국(遼東屬國)은 옛 감향(邯鄉)이며 서부도위(西部都尉)였다. 안제(安帝) 때 요동속국을 만들어 도위(都尉)가 별도로 여섯 성을 다스렸다. 낙양(雒陽)에서 동북쪽으로 3,260리 떨어져 있다.

 

창료현(昌遼), 옛 천료현(天遼縣)이다. 전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何法盛 晉書 有青城山 하법성(何法盛)의 진서(晉書)에 청성산(青城山)이 있다고 했다.
② 빈도현(賔徒),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③ 도하현(徒河), 전에는 요서군에 속했다.
④ 무려현(無慮),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⑤ 험독현(險瀆), 史記曰 王險 衛滿所都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왕험(王險)으로 위만(衞滿)이 도읍한 곳이다. 
⑥ 방현(房) 

 

의무려산과 대릉하가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였고 무려현은 의무려산에 인접해 있다.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했으며 위만의 도읍 왕험성이라는 대목은 유소(劉昭)의 주석이다.

 

당(唐)나라의 사마정(司馬貞, 679~732)이 편찬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

應劭注地理志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也

응소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았다.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도읍이다

 

응소는 전한(前漢) 말(末)의 인물이니 유소는 응소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이 왜곡날조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다. 다음과 같다.

 

險瀆縣 :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험독현 : "응소가 말했다. 험독현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험한 강물에 의지하기에 험독이라 한다.

위만의 도읍인 왕험성은 요동군 험독현인데 강을 끼고 있다는 뜻이다.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臣瓉)이 말했다.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곳이 원래 험독현이다.

 

師古曰 瓚説是也

안사고(安師古)가 말했다. 신찬(臣瓉)의 말이 옳다.

 

학계에서 차자시(此自是)의 해석을 두고 논란이 있으나 이는 본질과 상관 없는 문제다. 응소, 신찬, 안사고 모두 험독현을 위만의 도읍 왕험성이라고 했다. 다만 응소는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 했고 신찬은 낙랑군에 속한다고 했다. 한서지리지 원전에 험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사고는 신찬이 옳다고 했다. 

 

신찬(臣瓉)은 서진(西晉, 265~317년) 시대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경력과 생몰연대 심지어 성씨마저 미상이다 신(臣)은 그의 성씨가 아니라 단지 신하라는 뜻이다. 서진(西晉 265~316) 시대에도 사기(史記)에 기록된 패수가 어디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신찬이 어느 지역을 낙랑군으로 지목했고 어느 강을 패수로 지목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신찬이 낙랑군으로 지목한 곳은 요하 서쪽일 수도 있으며 신찬이 말한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안사고 시대에는 누구나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다. 안사고는 한서주(漢書注)에서 낙랑군에 패수가 있다고 기술하면서 신찬이 말한 낙랑군 패수는 대동강이고 왕험성은 평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사고가 그렇게 명기하지 않았지만 한서주(漢書注)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중대한 모순이 있다.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왕험성이 있고 이곳이 바로 험독이라 했는데 응소에 따르면 험독은 험한 강을 끼고 있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험독은 왕험성이고 패수에 접해 있다. 그런데 사기와 위략(魏略)에 따르면 패수는 한(漢) 나라와 조선의 국경이고 만번한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며 만번한에서 한참 더 가야 왕험성이 나온다.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만번한은 예성강이라야 하고 왕험성은 한양 근처 한강변이라야 한다. 그런데 한강변은 마한의 영역이거나 아니면 조선과 마한의 경계이니 왕험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대동강은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아니다.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만번한은 청천강이고 패수는 압록강이라야 한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지만 대동강은 사기에 기록된 패수가 아닌 것이다. 안사고 설을 수용한 조선왕조에서도 그렇게 인식했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술하기를 평양은 왕험성이고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는 압록강이며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라고 했다.

 

왕험성이 패수에 접해 있다고 한 신찬의 주장이 사기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을 안사고가 몰랐을 리 없다.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다면 압록강을 패수라고 해야 사기의 기록에 부합하는데 당시에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기 때문에 안사고는 이를 한서주에 명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평양 일대를 낙랑군의 옛땅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것이 안사고의 의도였다. 안사고는 자신의 구상을 뒷받침할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존재도 불투명한 신찬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찬이 했다는 말도 출처 미상이니 안사고가 지어냈을지도 모른다. 

 

요동속국에 의하여 험독현은 요동군에 속한다고 한 응소가 옳았음이 확인된다. 한서지리지와 속한서 군국지에 혐독현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사고는 험독현이 낙랑군에 속하며 낙랑군은 입록강 동쪽이라고 주장했다. 안사고는 험독현이 왕험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안사고의 주장은 낭설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설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험독현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주장과 상반되는 견해가 남북조시대 유송왕조(劉宋, 420 ~ 479))에서 배인(裵駰)이 저술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 사기집해(史記集解)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서광(徐廣)이 말했다.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서광(徐廣, 352 ~ 425)은 동진(東晉, 317 ~ 420) 왕조의 역사가이다. 서광(徐廣)은 창려군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무근이다. 창려유험독현야(昌黎有險瀆縣也)는 창려(昌黎) 다음에 군(郡)이 생략된 것이며 "창려군(郡)에 험독현(縣)이 있다"라는 뜻이다. 후한(後漢)을 이은 삼국시대 조위(曺魏, 220 ~ 265) 왕조는 244년에 요동속국에서 창료현(昌遼縣)과 빈도현(賓徒縣)을 분리해서 창려군(昌黎郡)을 신설하고 창료현(昌遼縣)을 창려현(昌黎縣)으로 개명했다. 창려군에 험독현이 있다고 한 서광의 주장과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험독현이 있다고 한 안사고의 주장은 둘 다 오류이다.  

 

 

 

한서에는 낙랑군과 관련된 사건 기록이 아무 것도 없고 후한서(後漢書)에 낙랑군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樂浪太守 建武 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至遼東,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後漢書 循吏列傳]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낙랑태수를 자칭했다. 건무 6년(서기 30)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치라 했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王閎)이 군결 조사와 양읍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했다. [후한서 순리열전]

 

 光武帝 建武 六年 六月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後漢書 光武帝本紀]

 

광무제 건무 6년(서기 30)  6월 초, 낙랑 사람 왕조가 낙랑군을 점거하고 불복했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을 보내 공격했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했다. [후한서 광무제본기] 

 

※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樂浪郡古朝鮮國也 在遼東]라는 대목은 후한서 원전이 아니고 당나라 측천무후의 둘째아들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이다. 서기 30년 당시 요동의 옛 조선 땅에 낙랑군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후한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시대까지는 일반적으로 왕험성과 낙랑군의 위치를 요하 서쪽으로 보았다.  

 

光武帝 建武 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光武帝本紀) 

광무제 건무 20년(서기 44년) 가을, 동이 한국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귀순했다. (후한서 광무제본기)

 

光武帝 建武 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渔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 [後漢書 東夷列傳]

 

광무제 건무 3년(서기 47년) 겨울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군에 와서 귀순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했는데 요동군 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국경에 머물렀다.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서안평, 낙랑군, 대방현이 요하 유역에 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순제(順帝 재위 125~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167) 년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현과 거향현을 약탈했다. 또 서안평현을 공격하고. 그 길에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붙잡아갔다. [삼국지위서동이전]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三國志魏書東夷傳] 

 

◇태조왕 94년(146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漢) 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고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붇잡아 왔다. [삼국사기 태조왕본기]

太祖王 九十四年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妻子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과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평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낙랑군에 대한 언급이 없다.

 

[周書 異域列傳]

高麗者 治平壤城 其城東西六里 南臨浿水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그 성은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隋書 東夷列傳]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수서동이열전]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계는 현재의 평양성을 장안성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고구려의 장안성은 아래의 그림에서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둘러싸고 남으로 대동강에 면해 있는 자리이다. 552년에 양원왕(陽原王)이 대동강변에 장안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586년에 평원왕(平原王)이 도읍을 이전했다. 수서(隋書)에 기록된 장안성은 산을 따라 구불구불한 형상이고 남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 했으므로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의 평지에 있는 현재의 평양성이 아니다. 현재의 평양성은 고려 태조가 922년에 착공하여 6년만에 완성했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도읍으로 삼은 평양성은 어디인가? 이 문제는 차후에 논하고자 한다.

 

 

 

612년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안사고가 집필하여 636년에 편찬한 수서(隋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癸未,第一軍發,終四十日, 引師乃盡,旌旗亙千里。近古出師之盛,未之有也 ....... 七月壬寅,宇文述等敗績于薩水,右屯衛將軍辛世雄死之。九軍並陷,將帥奔還亡者二千餘騎 [隋書帝紀第四煬帝下]

 

총병력은 113만 3800명인데 이백만이라고 불렀다. 물자를 운송하는 자는 배(倍)였다. (612년) 1월 3일에 제1군이 출발하여 40일만에 전군의 출정이 끝났다. (24군까지 있었다.) 깃발이 천리를 이었고 고금에 이처럼 성대한 출정은 없었다. .... 7월 22일 우문술 등이 살수(薩水)에서 패하였다.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고 9개 군이 모두 함몰했다. 장수들이 달아났고 도망쳐서 돌아온 자가 2천여 기(騎)였다. [수서제기 제4양제하]

 

삼국사기에는 전쟁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隋)나라 24개 군에서 9개 군(부여군, 낙랑군, 요동군, 옥저군, 현도군, 양평군, 갈석군, 수성군, 증지군) 삼십만 오천이 압록수 서안에 집결했다. 압록수를 건너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 평양성을 30리 앞두고 회군하다가 살수에서 전멸하고 2700명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에는 살수에서 압록수까지 450 리(里)라고 했는데 안주(安州)에서 의주(義州)까지 직선거리가 약 120 km다. 살수는 청천강이다.

 

안사고는 612년에 32세였고 56세에 수서(隋書)를 완성했으니 살수가 어딘지 알았을 터인데 수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착오로 빠트렸다면 살수가 어디인지 한서주(漢書注)에 기록했어야 하는데 두 차례나 빠트린 것은 고의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치를 기록할 때는 세월이 흘러도 이동하지 않는 산천(山川)을 기준으로 삼는 법인데 안사고의 주석은 낙랑군의 산천에 대한 서술이 모호하여 위치를 확정짓기가 매우 어렵다. 

 

패수가 대동강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대수와 열수는 더 아리송하다. 필자가 지적한 것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 안사고가 건성으로 그랬을 리는 만무하고 필시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모호하게 서술하는 것이 안사고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지리지의 간결한 원문과 안사고의 모호한 주석만으로 요동군과 현도군과 낙랑군의 영역을 확정할 수는 없다. 이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통하여 군현의 존재가 입증되어야 하는데 사군을 설치한 후로부터 한서를 편찬할 때까지 흘러간 2백 년 동안 이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서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평양은 낙랑군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기록이 수서(隋書)에 실려 있다. 612년 1월 2일, 수양제가 전군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左第一軍可鏤方道,第二軍可長岑道,第三軍可海冥道,[3]第四軍可蓋馬道,第五軍可建安道,第六軍可南蘇道,第七軍可遼東道,第八軍可玄菟道,第九軍可扶餘道,第十軍可朝鮮道,第十一軍可沃沮道,第十二軍可樂浪道。右第一軍可黏蟬道,第二軍可含資道,第三軍可渾彌道,第四軍可臨屯道,第五軍可候城道,第六軍可提奚道,第七軍可踏頓道,第八軍可肅慎道,第九軍可碣石道,第十軍可東暆道,第十一軍可帶方道,第十二軍可襄平道。凡此眾軍,先奉廟略,駱驛引途,總集平壤。

 

좌(左) 12군은 각각 누방, 장잠, 해명,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으로 출동하고, 우(右) 12군은 각각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으로 출동하여 평양성으로 총집결하라.

 

위에 열거한 24개 지명에는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의 속현으로 기록된 곳이 11개 포함되어 있다. 누방, 장잠, 해명, 개마, 조선, 점제, 함자, 혼미, 제해, 동이, 대방이다. 남소는 요하 동쪽에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45년 겨울 10월에 연 나라 장수 모용각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요동군의 속현으로 후성과 양평이 있고, 그밖에 요동, 현도, 낙랑, 임둔이 있다. 24군 중에 18개 군의 경로가 한사군과 그 속현이고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이 모두 요하 서쪽에 있다. 무엇보다도 낙랑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명한 것이 평양은 낙랑군이 아니라는 뜻이다.

 

수서지리지(隋書地里志)에 낙랑군, 대방군, 대방현, 조선현이 등장하는데 모두 요하 서쪽에 있다. 다음과 같다.

 

◇漁陽郡

無終 後齊置,後周又廢徐無縣入焉。大業初置漁陽郡。有長城。有燕山、無終山。有泃河、如河、庚水、灅水、濫水。有海。

어양군 무종현은 후제가 설치했으며 후주가 폐하여 서무현에 편입시켰다.  대업초(605년)에 어양군을 설치했다. 장성이 있고 연산과 무종산, 구하, 여하, 경수, 류수, 람수가 있고 바다가 있다. 

 

北平郡

舊置平州。統縣一,戶二千二百六十九。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宮。有覆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북평군은 옛날에 평주에 설치했다. 현은 하나이고 2269 가구이다.

노룡현은 옛날에 북평군에 설치했다. 신창현과 조선현을 다스렸다. 후제에서 조선현을 없애고 신찬현에 편입시켰다. 또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에 편입시켰다. 개황 6년(586년)에  비여현을 없애고 신창현에 편입시켰다. 개황 18년(598년)에 노룡현으로 개명했다. 대업초(605년)에  북평군을 설치했다. 장성, 관관(關官),  임유궁(지금의 산해관), 갈석산, 련수, 노수, 윤수, 용선수, 거량수와 바다가 있다.

 

遼西郡

舊置營州,開皇初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七百五十一。柳城, 後魏置營州于和龍城,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平剛、柳城、富平等縣。後齊唯留建德、冀陽二郡,永樂、帶方、龍城、大興等縣,其餘並廢。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其餘並廢。尋又廢郡,改縣為龍山,十八年改為柳城 , 大業初,置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요서군은 옛 영주(營州)에 설치했다. 개황초(581년)에 총관부를 설치했고 대업초(605년)에 총관부를 폐지했다. 현은 하나이고 751 가구이다. 유성현이다. 후위가 화룡성에 영주를 설치했다. 건덕군, 기양군, 창려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을 다스린다.

 

관할현 13개 중에 대방현이 있다. 대업초(大業初, 605년)에 설치한 요서군에 대방산이 있다고 했으니 그곳이 대방현일 것이다. 수나라 때 요하의 동쪽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위에 기록된 군현의 위치는 모두 요하의 서쪽이다. 

 

수서는 안사고가 다른 사람들과 공동 집필했는데 낙랑군과 대방현이 요서에 있고 북평군 조선현에 임유관과 갈석산이 있다. 그랬던 안사고는 한서주에서 졸본성과 국내성 일대를 현도군이라 하고, 압록강 남쪽 패수 일대를 낙랑군이라고 했다. 당시 고구려와 중국 모두 평양성이 접해있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불렀다.

 

안사고가 느닷없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안사고가 살았던 시대에 고구려는 중국의 숙적이었다. 수(隋)나라는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하여 망했고 뒤를 이은 당(唐)나라에게 고구려는 눈엣가시였다. 당태종(626~649)은 수양제의 참패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고구려 정복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고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 고구려의 도읍 평양이고, 현도군을 설치한 곳이 고구려의 옛 도읍이라는 주장은 당태종 이하 모든 중국인의 구미에 딱 맞았을 것이다. 필자는 안사고의 주석은 고구려 원정의 명분을 제공하기 위한 당나라판 동북공정이라고 본다. 

 

안사고는 당시의 고구려 영토가 한(漢) 나라 낙랑군과 현도군의 옛땅이라고 주장하고서도 삼국지나 후한서와 마찬가지로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험성 및 낙랑군의 치소가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다. 평양이 왕험성이고 낙랑군의 치소라는 학설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었는지 살펴보자.

 

당(唐)나라에서 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저술한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런 대목이 실려있다.

括地志云 高麗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며 또 예로부터 말하기를 조선땅이라 한다.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인데 원본은 망실되고 일부가 여기저기 인용되어 전해온다. 필자는 고구려 원정을 구상하고 있는 당태종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고 전의(戰意)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괄지지에 담겨 있다고 본다. 644년 6월에 당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명하였고 11월에 제1진이 출정했다. 

 

평양이 낙랑군의 옛땅이라는 학설은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 936~946) 에서 945년에 편찬한 구당서(舊唐書)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다음과 같다. 

 [舊唐書 高麗列傳]

高麗者,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구려의 국도는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땅이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흔히 고려로 표기했다. 구당서 이후 낙랑군 평양설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설로 통하여 고구려가 일어선 압록강 유역은 현도군의 옛땅이고, 고구려의 후기 도읍인 평양은 낙랑군의 옛땅이며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王險城)이라고 인식되었다.

 

북송(北宋, 960~1127)에서 974년에 편찬한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 外國列傳)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高麗,其國都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려의 국도는 평양성으로 한(漢) 낙랑군의 옛땅이다.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新唐書) 또한 같은 내용을 기술했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

고구려 군주는 평양성에 살고 있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漢) 나라의 낙랑군이다.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외성을 지었고 남쪽은 패수에 닿는다. 

 

북제(北齊)에서 554년에 완성한 위서(魏書) 고구려열전은 북위(北魏 386~534)의 세조 태무제(世祖 太武帝 재위 423~452)가 사신 이오(李敖)를 고구려에 보내 평양성으로 장수왕을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장수왕 23년(435년)이라고 했다.

 

[위서(魏書) 고구려열전]

世祖時,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并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於其國,遣員外散騎侍郎李敖 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民戶參倍於前魏時,其地東西二千里,南北一千餘里。

 

세조(北 太武帝, 재위 423 ~ 452) 때 쇠(釗, 고구려 고국원왕)의 증손 련(璉, 고구려 장수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안동에 이르러서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고, 아울러 국휘(國諱)를 청하였다.세조가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 이오(李敖)를 보내 련(璉)에게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정동장군(征東將軍)·영동이중랑장(領東夷中郎將)·요동군공(遼東郡公)·고구려왕(高句麗王)의 벼슬을 내렸다. 이오(李敖)가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러 그 곳에 머물며 그 나라 지방을 살펴보고 말하기를, "요동 남쪽 1천여 리이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舊夫餘)에 이르는데, 민호(民戶)는 전위(前魏 = 曺魏, 220 ~ 265) 때의 3배이고 그 땅은 동서 2천 리, 남북 1천여 리다." 라고 하였다.

 

당(唐)나라에서 659년에 완성한 북사(北史) 고구려열전은 위서(魏書)를 옮겨 적었다. 

원(元)나라에서 1344년에 편찬한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 요하 유역을 옛 조선 땅이라고 했다. 

 

◇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東京道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秦屬遼東外徼. 漢初燕人滿 王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玄菟二郡 沿革不常. 漢末為公孫度所據, 傳子康 孫淵 自稱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晉 陷 髙麗, 後歸 慕容垂, 子寳 以勾麗王安 為 平州牧 居之.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동경도(東京道)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의 요동외요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燕)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항구적이지 않다.

한(漢)나라 말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이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연호를 소원(紹漢)이라 하였다. 위(魏)나라가 멸하였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 재위 423 ~ 452)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바로 이곳 요(遼)나라 동경(東京)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요양(遼陽)을 중심으로 요동 일대가 기자조선의 영토였는데 위만이 왕이 되었고 한무제가 정복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을 설치했고 한말(漢末)에 공손(公孫) 가문이 차지했는데 위(魏)나라가 멸하였고 훗날 고구려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북위 세조 태무제가 사신 이오(李敖)를 고구려 평양으로 보냈는데 요사(遼史)는 당시의 평양이 바로 요양(遼陽)이라고했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요양이 고구려의 도읍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위서와 북사에는 이오가 말하기를 평양은 요동에서 1천여 리 남쪽이라고 했다. 이오가 말한 요동을 요동성으로 볼 수 있는데 고구려의 요동성은 요(遼)나라의 요양이고 지금의 요양이다. 이오가 말한 요동을 요동군으로 본다면 요양은 요동군의 복판에 있다. 어느 경우에도 요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이 아니다. 

 

◇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遼河 出 東北山口, 為 范河, 西南流 為 大口 入於海. 東梁河 自 東山 西流 與 渾河 合, 為 小口, 㑹 遼河 入於海, 又 名 太子河, 亦曰 大梁水. 渾河 在 東梁范河之間. 沙河 出 東南山 西北流徑 蓋州 入于海. 有 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水, 多蓒芋之草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에서 나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다른 이름은 태자하(太子河)이며 대양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수(蓒芋濼水)라고도 하며 한우초가 많다.

 

遼陽縣 本 渤海國 金德縣地, 漢 浿水縣, 髙麗 改為 勾麗縣, 渤海 為 常樂縣, 户一千五百. 仙鄉縣 本 漢 遼隊縣, 渤海 為 永豐縣. 神仙傳 云 仙人 白仲理 能煉 神丹, 㸃 黄金 以救百姓, 户一千五百. 鶴野縣 本 漢 居就縣地, 渤海 為 雞山縣. 昔 丁令威 家此, 去家千年, 化鶴來歸, 集於蕐表柱, 以咮畫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塜纍纍” 户一千二百. 析木縣 本 漢 望平縣地, 渤海 為 花山縣, 户一千. 紫蒙縣 本 漢 鏤方縣地, 後 佛寧國 置 東平府, 領 紫蒙縣. 後徙 遼城, 并入 黄嶺縣. 渤海 復為 紫䝉縣, 户一千. 興遼縣 本 漢 平郭縣地, 渤海 改為 長寧縣. 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 南定 新羅, 北略 諸部, 開置郡邑, 遂定今名, 户一千. 肅慎縣 以渤海户 置. 歸仁縣. 順化縣.

 

① 요양현(遼陽縣) 본래 발해국 금덕현(金德縣)이다. 한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 때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② 선향현(仙鄕縣) 본래 한나라 요대현(遼隊縣)인데, 발해 때는 영풍현(永豐縣)이었다. 신선전(神仙傳)에서 “신선 백중리(白仲理)가 신단(神丹 ; 신선이 만든다는 장생불사의 환약)을 단련하여 황금에 붙여 백성을 구제하였다”라고 하였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③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나라 거취현(居就縣)인데, 발해 때는 계산현(雞山縣)이었다.…… 호구 수는 1,200호이다.

④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인데, 발해 때는 화산현(花山縣)이었다. 호구수는 1,000호이다.

⑤ 자몽현(紫蒙縣) 본래 한나라 누방현(鏤芳縣)인데, 나중에 불녈국(拂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고 자몽현(紫蒙縣)을 관할하였다. 나중에 요성(遼城)으로 옮겨 황령현(黃嶺縣)에 편입하였다. 발해 때는 다시 자몽현이었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⑥ 흥료현(興遼縣)은 본래 한나라 평곽현(平郭縣)인데, 발해가 장녕현(長寧縣)으로 고쳤다.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발해의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족을 공략한 후 군읍(郡邑)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 이름으로 정하였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⑦ 숙신현(肅愼縣) 발해인 호구로 설치하였다.

⑧ 귀인현(歸仁縣)

⑨ 순화현(順化縣)

 

요사지리지는 요양이  한(漢) 패수현이고, 자몽현을 한(漢) 누방현이라 했는데 한서지리지는 패수현과 누방현이 낙랑군에 속한다고 했다. 안사고는 낙랑군이 압록강 동쪽이라 했으나 요사지리지는 낙랑군을 요동이라 했다. 선향현은 한(漢) 요대현, 학야현은 한(漢) 거취현, 석목현은 한(漢) 망평현, 흥료현은 한(漢) 평곽현이며 고조선의 영역에 속한다고 했는데 한서지리지는 요동군에 속한다 했다.

 

원(元)나라에서 1345년에 편찬한 송사(宋史)는 고려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高麗,本曰高句驪。周為箕子之國,漢之玄菟郡也。在遼東,蓋扶餘之別種,以平壤城為國邑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 했다. 주(周)나라가 세운 기자(箕子)의 나라이고 한(漢)나라의 현도군이다. 요동에 있고 부여의 별종이며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청(淸)나라에서 1735년에 완성한 명사(明史)는 조선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朝鮮,箕子所封國也。漢以前曰朝鮮。始為燕人衞滿所據,漢武帝平之,置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漢末,有扶餘人高氏據其地,改國號曰高麗,又曰高句麗,居平壤即樂浪也。

 

조선은 기자(箕子)를 봉한 나라이다. 한(漢) 이전에 조선이라 불렀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곳을 차지하여 시작되었고 한무제가 평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을 설치했다. 한말(漢末)에 부여 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고려라 했는데 고구려라고도 한다. 평양 즉 낙랑군에 자리잡았다. 

 

기자조선이 위민조선으로 이어지고 한무제가 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니 현도군도 조선 땅이고 조선이 망할 당시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사(明史)는 전래의 학설과 달리 압록강 유역을 조선 땅으로 보았다. 

 

삼국사기 제22권은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보장왕(寶藏王) 27년(668년) 2월, 이적(勣)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이적(勣)은 대행성(城)으로 진공하였다. 가을 9월, 이적(勣)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적이 앞서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방면으로 출동하였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만나 진군해서 압록책()에 이르렀다. 아군은 이적() 등을 막아 싸웠으나 패하였고, (적군이)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계필하력(力)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 아래에 도착하고, 이적()의 군대가 뒤따라와서 평양을 한 달 넘게 포위하였다.(삼국사기 제6권에는 나당(羅唐)연합군이 9월 21일에 평양을 포위했다고 적혀있다.) 보장왕이 천남산(産)에게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가서 항복하게 했다. 이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남건(建)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항거하며 수비하였다. 그는 자주 병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천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와 요묘() 등과 함께 남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자, 이적이 병사를 풀어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불을 질렀다. 천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임금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二月 勣等我扶餘城 進攻 秋             餘       敗          

 

고구려가 망할 당시의 도읍은 대동강변에 있는 평양성이었다. 삼국사기 제37권 지리지에는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한대(漢代)의 낙랑군으로 남쪽이 패수에 닿아 있다 했고, 또 수양제의 동방정벌조서에 거함(巨艦)들이 구름같이 날아 패강(浿江)을 가로질러 평양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패수는 분명히 대동강이고 평양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여기서 언급한 당서(唐書)는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로 보이며 삼국사기는 낙랑군 평양설을 수용하고 있다. 이후 1280년대에 편찬된 삼국유사 역시 낙랑군 평양설을 수용했고 조선왕조도 이에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은 평양부(平壤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평양은 왕험성으로 단군(檀君)조선, 기자(箕子)조선, 위만(衛滿)조선의 도읍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또 대동강은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다.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안사고 이전에 편찬된 중국의 사서들은 조선에 관하여 어떻게 기술했는지 살펴보자.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史記  朝鮮列傳]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사기 조선열전]

 

魏略 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東夷傳]

 

위략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 역시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고자 했으나 그 대부 예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이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마침내 조선이 약해졌다. [삼국지위서동이전] 

 

※ 위략(魏略)은 삼국지보다 몇 년 앞서서 어환(魚豢)이 저술한 위(魏, 220 ~ 265) 왕조의 역사책인데 멸실되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을 빼앗은 년도는 사서에 기록이 없으나 필자는 사기를 분석하여 연(燕)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인 BC 290년경으로 추정한다.

 

사기와 위략의 기록은 진번의 위치가 연나라의 동쪽이며 조선의 서쪽임을 말해준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에서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조선의 도읍은 평양이고 진번의 위치는 압록강 바깥이라고 했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학계는 진번의 위치를 고조선의 남쪽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래서는 연나라가 진번을 정복할 수 없으니 주류설은 시작부터 조작임이 드러난다.

 

주류학계는 진개의 침공 전 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으면서 침공 후의 국경인 만번한은  청천강 하류라고 주장한다. 연나라에게 빼앗긴 조선 땅이 어디인지 밝히는 것이 순서 아니겠는가? 삼국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천리는 대략 80~90 km로 지금의 이백리 남짓이다. 이천리는 160~180 km로 사백리 남짓 된다. 만번한의 위치는 학설이 분분한데 필자는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160~180 km 떨어진 대릉하 하류를 만번한으로 본다.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史記 朝鮮列傳]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燕에 속하게 했다. [사기 조선열전]

 

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三國志魏書東夷傳]   

한(漢)나라가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했고 조선과 연(燕)이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지위서동이전]

 

※ 연(燕)나라는 진시황의 침공으로 BC 222년에 멸망했다. 진시황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정복한 진번 및 만번한 서쪽의 조선 땅을 요동외요라고 이름 지었다. 요동외요는 요동 바깥의 순찰지역이라는 뜻이다. BC 210년 진시황이 죽고 BC 206년에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4년 동안 싸웠다. BC 202년 1월,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패하고 자결하매 한(漢)나라 유방이 중원을 제패했다. 漢고조 유방은 BC 202년 8월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했다. 노관은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는데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BC 210년 진시황 사후 BC 203년말까지 계속된 중국의 혼란기에 요동외요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BC 81년에 기록한 염철론(鹽鐵論)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竝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염철론(鹽鐵論) 권 38 비호편(備胡篇)]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이가 모두 강하여 쳐들어와 도둑질하였는데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 

 

요(徼)는 요동외요를 가리킨다. 조선은 연에게 빼앗겼던 서쪽 땅을 되찾았고 진번은 독립했다. 이 시기에 흉노는 진시황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모조리 되찾았고 진시황이 정복했던 남월(南越)은 독립했다. 진시황 사후 진번이 독립했다는 것은 사기 조선열전의 위만 관련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연왕 노관은 조선이 되찾아간 땅을 탈환코자 했으나 만번한은 너무 멀었기에 다만 패수(浿水)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 되찾고 패수(浿水)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따라서 장성을 나와 만번한으로 가는 도중에 패수를 건너게 된다. 

 

BC 201년 가을 흉노가 침입하여 마읍과 태원을 점령하자 유방이 직접 출정했다. 유방은 묵돌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흉노를 추격하다가 평성(지금 대동) 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당했다. BC 200년 정월의 강추위 속에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묵돌이 포위망 한쪽을 풀어준 덕분에 7일만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후 漢은 흉노에게 해마다 막대한 조공을 바쳤고 흉노는 수시로 한(漢)의 변경을 약탈했다. 이런 상황은 武帝가 흉노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BC 133년까지 지속되었다.

 

흉노에게 항복한 뒤 유방은 공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표적이 된 진희가 BC 197년 8월에 趙와 代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이 직접 출정하여 평정했다. 이어서 초왕(楚王) 한신과 양왕(梁王) 팽월을 장안(長安)으로 불러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위협을 느낀 회남왕 경포가 BC 196년 7월에 봉기하자 유방이 출정하여 10월에 반군을 격멸했고 경포는 도주하다 살해되었다. 유방은 이때 화살에 맞아 병석에 누웠는데 얼마 후 연왕 노관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高祖使使召盧綰  綰愈恐 迺遂稱病不行 上益怒 使樊噲擊燕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  侯伺  幸上病愈  自入謝  四月高祖崩  盧綰遂將其衆亡入匈奴  匈奴以為東胡盧王  居歲餘 死胡中

 

(BC 195년 2월) 고조는 燕王 노관을 (장안으로) 불렀다. 노관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주상이 크게 노하여 번쾌에게 燕을 치라 하였다. 연왕 노관은 자신의 궁인, 가속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장성 아래에 머물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주상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려고 했는데 4월에 고조가 죽으니 노관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흉노국으로 도망갔다. 흉노가 그를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삼았다. 그렇게 한 해 남짓 지내다 오랑캐 땅에서 죽었다. [사기 노관열전]

 

노관열전에는 노관이 싸우지 않고 흉노국으로 도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관의 군대와 토벌군 사이에 수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된 번쾌가 출정하기도 전에 참소를 당해 주발(周勃)로 교체되고 번쾌는 장안으로 압송되었는데 도착했을 때 유방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리하여 주발(周勃)이 토벌전을 수행했다.

 

燕王盧綰反  勃以相国代樊噲将  撃下薊  得綰大将抵  丞相偃  守陘  太尉弱  御史大夫施  屠渾都.破綰軍上蘭  复撃破綰軍沮陽  追至長城  定上谷十二縣  右北平十六縣  遼西遼東二十九縣  漁陽二十二縣 [史記 絳侯周勃世家]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주발(周勃)은 상국(相國)으로서 번쾌를 대신하여 군을 이끌고 계현(연경)을 함락시켜 노관의 대장 지(扺), 승상 언(偃), 태수 경(陘), 태위 약(弱), 어사대부 시(施)를 사로잡고 혼도(渾都)를 도륙했다. 노관의 군대를 상란에서 격파하고 저양에서 노관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고는 장성까지 추격했다. 상곡군 12개 현, 우북평군 16개 현, 요서군과 요동군 29개 현, 어양군 22개 현을 평정했다. [사기 강후주발세가]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  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 都王険 [史記  朝鮮列傳]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사기 조선열전]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三國志魏書東夷傳]

 

한(漢)이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한 무리들을 꾀어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준에게 사람을 보내 한병(漢兵)이 열 갈래로 쳐들어오니 들어가서 지키게 해달라고 거짓으로 고하고는 돌아와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위만과 싸웠으나 대적하지 못하였다. 그의 좌우 궁인들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한(韓)의 땅에 자리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삼국지위서동이전]

 

※패수가 어디인지 학설이 분분하여 이천 년이 넘도록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리장성을 나와 동쪽으로 가서 요동외요를 통과하면 패수를 만나는데 패수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사기 흉노열전은 조선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  盡服從北夷  而南與中國爲敵國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以往者  東接穢貉朝鮮 [史記 匈奴列傳]

묵돌代(BC 209~BC 174)에 이르러 흉노의 강역이 가장 커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했다. 왼쪽의 여러 왕과 장수들은 동방에 거주하는데 상곡군(上谷郡)을 마주 보며 동쪽으로는 예맥(濊) 및 조선과 국경을 접했다. [사기 흉노열전]

 

※흉노제국은 상곡군에서 중국과 마주하고 상곡군 동쪽에서 예맥 및 조선과 국경을 접했다. 지금의 북경과 장가구 사이가 진(秦)과 한초(漢初)의 상곡군이다. 조선은 서쪽에서 흉노와 접경하고 서남쪽에서 한(漢)과 접경했다. 조선의 북쪽에 있는 예맥은 부여를 말한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곳은 지금의 요하에서 서쪽으로 만리장성에 이르는 지역이다. 필자는 지금의 육고하(六股河)를 패수(浿水)로 본다. 

 

 

  위만 망명시 형세 (BC 195)/이광헌 설

 

 

◇會孝恵、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即約満為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満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真番、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史記  朝鮮列傳] 

 

효혜제(孝恵帝 재위 BC 195 ~ BC 188)와 고후(高后 , BC 180 死) 때를 맞아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자 요동 태수는 위만과 약조하기를, 위만은 외신(外臣)이 되어 국경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으며 만이의 여러 군장들이 천자를 뵈러 들어오고자 할 때 막지 않기로 했다. 이를 듣고 주상이 허락했다.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고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사기 조선열전]

 

※진번이 위만에게 복속했다는 기록을 주목해야 한다. 진번은 사기 조선열전의 첫 머리에 등장한다.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史記  朝鮮列傳]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연이 정복한 땅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사기 조선열전]

 

※BC 290년경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 이천 리를 빼앗아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아 지배했다. 진시황은 연(燕)을 멸한 후 진개가 정복한 땅을 요동외요(遼東外徼)라 이름 짓고 통치했다. 이렇게 중국의 지배하에 있던 진번이 위만에게 복속한 것은 진시황 사후에 진번이 진나라의 지배에서 독립했음을 뜻한다.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渉何譙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禦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 馳入塞,  遂帰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 即不詰, 拝何為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発兵襲攻殺何. [史記  朝鮮列傳]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漢의 망명자를 유인하여 점점 많아졌고,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지도 않았다.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뵈려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했다. 원봉(元封) 2년(BC 109) 漢은 섭하(涉何)를 시켜 우거를 나무라고 깨우쳐주려 했으나 끝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다 패수에 임한 국경에 이르러 부하를 시켜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천자에게 고했다. 주상은 꾸짖지 않고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했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습격해서 섭하를 죽였다. [사기 조선열전]

 

 

※삼국사기는 낙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溫祚王 四年,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온조왕 8년(기원전 11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이르기를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강역에 다가와 성과 목책을 세우니,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하려는 계획인가? 만약 예전의 우호관계를 변치 않으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라. 그래야 의심이 없어진다. 혹시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면 한번 싸워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의당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내보낸다면 우리 또한 기다릴 것이다.”  이리하여 낙랑과 우호관계가 사라졌다.

 

溫祚王 八年,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온조왕 11년(기원전 8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해서 점령하고 백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가을 7월, 독산책과 구천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溫祚王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봄 2월,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이 61세였다.
溫祚王 十三年 春二月 王母薨 年六十一歲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여름 5월,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필히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순찰하면서 한수(漢水) 남쪽을 살펴보았더니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함이 마땅하다.”


溫祚王 十三年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况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한 것은 낙랑과 말갈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가을 7월, 한산(漢山) 아래에 성채를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溫祚王 十三年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가을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고 알렸다. 마침내 나라의 강역을 획정하였다.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溫祚王 十三年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가을 7월,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 백성을 나누었다.
溫祚王 十四年 春正月 遷都 秋七月 築城漢江西北分漢城民.

 

◇ 온조왕 17년 (기원전 2년) 봄, 낙랑이 침입해서 위례성을 불 태웠다.
溫祚王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온조왕 18년 (기원전 1년)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고자 구곡까지 갔으나 큰눈이 내려 되돌아 왔다.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백제와 여러 차례 충돌했던 낙랑은 이 사건을 끝으로 백제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246년에 대방군과 함께 다시 등장하여 304년까지 기록이 남아 있다. 필자는 237년에 위나라 명제가 고구려 남쪽에 새로운 낙랑군과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본다..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요하 서쪽에 있었고 238년에 사마의가 공손연을 주살하고 그 일대를 평정했다고 본다.

 

낙랑은 신라본기에도 등장한다. 기원전 28년에 신라를 침공했고 서기 5년과 15년에는 신라의 도읍 금성을 포위했으며, 36년에는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멸할 때 낙랑 백성 5천 명이 신라에 투항하니 신라가 이들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의 사신이 신라왕에게 양마(良馬) 20필을 바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 시기 신라의 영역이 강원도 북부라고 말하는데 왜인(倭人)들의 침입도 여러 차례 있어서 신라의 영역을 알 수 없게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등장하는 낙랑은 한무제(漢武帝)가 고조선 땅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이 아니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가 전해오는 낙랑국(樂浪國)이다. 그 영역은 북쪽에서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에서 옥저(沃沮)와 접하고 남쪽에서 백제와 접했다. 삼국사기에 최리(崔理)가 마지막 낙랑왕이라고 했기에 이 나라를 최씨낙랑국이라 부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낙랑과 관련된 기록을 보자.

 

◇서기 32년 대무신왕 15년, 호동이 왕에게 낙랑을 습격하라고 권했다. 낙랑왕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에 무방비로 있다가 우리 병사가 성을 엄습하니 그제서야 북과 나팔이 모두 깨진 것을 알고 딸을 죽이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大武神王 十五年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서기 37년 : 고구려 대무신왕 20년에 낙랑을 습격하여 멸했다.

大武神王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서기 44년 : 대무신왕 27년 가을 9월, 한(漢)나라 광무제가 바다 건너 병력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북이 한나라에 속하였다.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北屬漢

 

※한(漢)나라가 바다 건너 군대를 보낸 것은 육로가 막혔기 때문일 것이다. 살수는 청천강인데 낙랑의 영역을 살수 이북이라 한 것은 남쪽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살수 이남 낙랑 땅에 광무제가 군현을 설치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른 사서의 뒷받침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 제15권에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살수라고 했다. 

 

◇서기 56년 : 태조왕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 남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太祖王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후한서 광무제본기(光武帝本紀)서기 44년 : 광무제 건무 20년 가을, 동이 한국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귀순했다.

光武帝 建武 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 필자는 후한서의 이 기사가 삼국사기의 서기 44년 기사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 해에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에 한군현이 설치된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이 당시 낙랑국과 백제의 경계를 대동강이라 했다. 이상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서기 30년에서 37년 사이에 요동에는 낙랑군이 존재했고 대동강 유역에는 최씨낙랑국이 존재했다.

 

그러나 사학계는 최씨낙랑국을 아예 역사로 취급하지도 않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낙랑국을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으로 간주한다. 고구려가 37년에 낙랑을 멸했다는 기록까지 무시하고 낙랑군이 313년까지 평양에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閔中王 四年,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민중왕(재위 44~48) 4년 (서기 47년)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光武帝 建武 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 詣樂浪内屬。

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渔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 [後漢書 東夷列傳]

 

광무제 건무 3년(서기 47년) 겨울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 낙랑군에 와서 귀순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군, 어양군, 상곡군, 태원군을 침략했는데 요동군 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국경에 머물렀다. [후한서 동이열전] 

 

 

낙랑군 대동강설과 현도군 압록강설이 천년 동안 정설로 통해 왔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낭설이다. 그 증거는 여러 가지 있으나 결정적 사료는 사기 흉노열전이다. 다음과 같다.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撃胡, 悉収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県城  因邊山険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한 후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오랑캐를 공격해서 하남(河南) 땅을 빼앗았다. 황하를 요새로 삼고 44현의 성을 쌓았는데 험한 산과 계곡을 참호로 삼고 수선하여 임조(臨洮)에서 시작해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달했다. [사기 흉노열전]

 

◇當是之時,東胡彊而月氏盛。匈奴單于曰頭曼,頭曼不勝秦,北徙。十餘年而蒙恬死,諸侯畔秦,中國擾亂,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於是匈奴得寬,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당시는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도 번성했다. 그 때에 흉노의 선우(單于)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진(秦)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로부터 십여년 뒤에 몽염이 죽고 과거 육국(六國)의 귀족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중국은 온통 혼란 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점차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單于有太子名冒頓 ... 冒頓既立,是時東胡彊盛 .... 遂東襲擊東胡。東胡初輕冒頓,不爲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既歸,西擊走月氏,南并樓煩、白羊河南王。侵燕代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至朝那、膚施,遂侵燕、代。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두만 선우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묵돌이었다. 묵돌이 선우가 되었을 때(BC 209년)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 묵돌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 묵돌은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을 빼앗았다. 본국으로 돌아온 묵돌은 서쪽의 월지국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남쪽으로 누번왕, 백양하남왕(白羊河南王) 등의 영토를 병탄했다. 燕과 代를 공격해 일찌기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본래 흉노는 하남의 요새를 기점으로 한나라와 경계를 삼았는데, 그곳에 관문을 설치해서 조나(朝那), 부시(膚施)에까지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는 연(燕)과 대(代)에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당시 한(漢)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원 천하는 전쟁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 때문에 묵돌은 손쉽게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군사가 삼십여 만이었다. 

 

 燕은 지금의 하북성 북부, 代는 지금의 산서성 북부이다. 흉노가 진시황에게 빼앗겼다가 진시황 사후에 되찾은 황하 남쪽 땅은 아래 지도의 하남(河南)이다.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爲敵國, 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接月氏、氐、羌;而單于之庭直代、雲中 [史記 匈奴列傳]

 

묵돌代(BC 209~BC 174)에 이르러 흉노의 강역이 가장 커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했다. 왼쪽의 여러 왕과 장수들은 동방에 거주하는데 상곡군(上谷郡)을 마주 보며 동쪽으로는 예맥(濊貊) 및 조선과 국경을 접했다. 오른쪽의 왕과 장수들은 서방에 거주하는데 상군(上郡)을 마주보며 서쪽으로 월지, 저(氐), 강(羌)과 국경을 접했다. 선우의 궁정은 대군과 운중군을 마주 보는 곳이었다. [사기 흉노열전]

 

※흉노제국은 상곡군에서 중국과 마주하고 상곡군 동쪽에서 예맥 및 조선과 국경을 접했다. 지금의 북경과 장가구 사이가 진(秦)과 한초(漢初)의 상곡군이다. 조선은 서쪽에서 흉노와 접경하고 서남쪽에서 한(漢)과 접경했다. 조선의 북쪽에 있는 예맥은 부여를 말한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곳은 지금의 요하에서 서쪽으로 만리장성에 이르는 지역이다.

 

 

BC 200년의 형세 / 이광헌 설

 

 

오늘날에는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하의 서쪽을 요서(遼西)라 부르고 주류학계는 요동의 위치가 고금을 통하여 불변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진시황 시대와 한나라 초기에는 조백하(潮白河) 동쪽을 요동이라 불렀고 한무제가 조선을 정복한 후 대릉하에서 요하의 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요동이라 불렀다. 

 

 

진말한초(秦末漢初) 장성과 요동/이광헌 설

 

 

흉노의 동쪽 경계는 흥안령산맥이고 남쪽 경계는 만리장성이다.

 

흉노와 한(漢) BC 200~BC 130 

 

 

연간 강수량 380mm 선이 유목지대와 경작지대를 가르는 경계선이며 흉노제국의 동쪽과 남쪽 경계다. 

 

사기에 기록된 패수와 왕험성이 어디인지 찾아내야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압록강을 패수라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신채호가 요동의 태자하를 패수라고 주장한 후 요서 지역을 거쳐 중국의 하북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지금까지 나온 학설이 10 개나 되고 필자의 학설까지 11개다.

 

 

패수의 위치 기존학설

 

 

필자는 지금의 육고하(六股河)를 패수로, 대릉하(大凌河) 인근이며 의무려산(醫巫閭山) 동남쪽인 한대(漢代)의 무려현(無慮縣), 명청대(明淸代)의 광녕현(廣寧縣), 지금의 북진(北鎭)을 왕험성으로 본다.

 

 

왕험성의 위치 학설 비교

평양(平壤) : 력도원 

요양(遼陽) : 요사(遼史)

해성(海城) : 신채호

태안(台安) : 중국 사회과학원

창려(昌黎) : 이덕일, 윤내현

북진(北鎭) : 이광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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