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 1캐럿은 0.2그램이다. 5캐럿이라야 겨우 1그램에 불과하다. 흔히 '신비의 돌', '영원불멸의 돌'이라 부르지만 진짜 '돌' 만한 다이아는 보통사람은 보기조차 쉽지 않다. 1969년 영국배우 리처드 버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할 때 69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세상이 화들짝 놀라 술렁였다. 그러나 그래 봤자 무게는 14그램, 개울가의 작은 조약돌 크기였다. | |
보석 중의 으뜸 '다이아몬드'의 저주?
사랑·권력 뿜어내는 '최강의 보석' 다이아몬드 1997. 9. 11 [경향신문] 27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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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다이아몬드는 콩알 정도만 돼도 "크다!"는 말을 듣는다. 무적(無敵)을 뜻하는 그리스어 'adamas'에서 그 이름이 나왔는데 말처럼 보석 중 으뜸이요, 세상 무엇보다 비싼 물건이다. 영원불변의 사랑을 다짐하는 데에는 다이아만한 예물이 없다.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 하고 더 큰 것, 더 빛나는 것, 더 예쁜 것을 찾는 것도 당연하다. 허영심을 한껏 채워주고 가격도 엄청나니 소리깨나 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큰 걸 손에 넣으려 안달을 한다.
1982년 6월 11일 밤 11시 반. 서울 강남경찰서를 출입하다 서울시경 캡으로 옮긴 석간신문 A기자는 집에서 불쾌한 전화를 받았다. 강남서 형사2반장 M경사였다. "야, A기자! 맨 날 특종거리 달라고 그랬지? 오늘 내가 한건 줄 테니까, 나오라고…여기 청담동 룸살롱이야!!" 그는 이미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송수화기에서 술 냄새가 확 풍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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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형사들은 나이 차가 좀 나도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살인, 방화, 강도 등 강력사건 현장을 함께 뛰며 나름으로 동료애를 쌓았기 때문. 그렇다 해도 엉망으로 술 마시고 전화를 걸어 "야, 자" 하며 완전히 말을 놓을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A기자는 서울시내 경찰서 출입기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시경 캡. 아무리 친해도 막무가내 반말을 해댈 수는 없는 위치였다.
뜨악해진 A기자. 그러나 M반장은 투정을 계속했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 맑은 정신으로 보자" 라며 달랬으나 "순찰차라도 보낼 테니 당장 달려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혹시라도 술김에 망신당할 수도 있는 일. A기자는 어떻게든 피할 궁리를 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그런데 전화기 저편에서 갑자기 M반장이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이 새끼들이 우리 형사들 전부 다 모가지를 쳤어! 모조리 싹 잘랐다고… 씨O, 물방울 다이안가 뭔가 저주를 받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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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 부부에게 발생한 다이아몬드 강도 사건
1시간 후, 6월12일 새벽 0시 반. 청담동 룸살롱에 도착한 A기자는 깜짝 놀랐다. 강남서 형사 2반 소속 6명 전원이 모여 있었다. 한 형사는 양주를 병째 벌컥벌컥 들이켰고 테이블엔 빈 양주와 맥주병이 가득했다. 룸살롱이지만 호스티스는 없었다. 눈매가 매서운 형사들만 퍼질러 앉아 마치 죽기로 작정한 듯 술을 비워내고 있었다. 당직근무가 아니라도 잠복근무 등으로 항상 바쁜 형사들이 이렇게 단체로 대취하도록 마시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형사들은 일체 말없이 술만 권했다. 맥주잔 가득 양주를 부어 권하고, 그걸 들이키고 나면 바로 다음 형사가 또 술을 부었다. M반장도 전화에서와는 달리 말은 않고 술만 따랐다. 마치 무슨 의식을 치르듯 술잔만 오고 갔다. 이어지는 술 세례에 A기자가 거의 정신을 잃었을 때쯤, 갑자기 한 형사가 통곡을 터트렸다. 팀의 고참 경장이었다.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다가 그는 느닷없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자르냐?"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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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린 액수는 1억 2천만원 어치 1982. 6. 12 [동아일보] 11면 | |
강남경찰서 형사2반은 그 전해인 81년 5월19일 관내 청담동에서 일어난 다액강도사건의 수사를 맡았다. 피해자는 국회의원과 안기부차장을 지낸 이철희 씨와 부인 장영자 씨. 범인은 3인조였다. 얼굴에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울긋불긋한 테이프를 붙여 인디언처럼 위장한 채 피해자 집 담을 넘었다. 먼저 경비원을 흉기로 위협하고 이어 잠자던 부부를 깨워 결박한 뒤 다이아반지와 롤렉스 시계, 현금 등 1억2천만 원어치 금품을 털어 달아났다.
장 여인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처가 쪽 인척이었다. 거기다 남편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안기부차장 출신. 당연히 강남경찰서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강도발생 사실이 언론에 새나가지 않게 꼭꼭 함구령을 내리고 최정예 형사 2반으로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원래 강력사건을 전담하는 형사2반은 서울시내에서도 내로라하는 민완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이 다른 사건은 거의 맡지 않은 채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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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다이아를 꼭 찾아달라는 피해자의 요구에..
다이아몬드의 경제학 1983. 9. 17 [동아일보] 9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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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는 초기에 현장부터 샅샅이 뒤지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당시 형사들은 현장인 피해자 집엔 발도 붙이지 못했다. 장 여인이 "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집이 아니다"며 형사계장만 불러 피해 상황을 간단히 '통보'했기 때문이다. 장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돈 같은 건 안 찾아도 된다. 다만 한국에 하나 밖에 없는 물방울다이아반지만은 꼭 찾아와라"고 '명령'조로 요구했다. 국내에 단 하나 밖에 있건 없건, 수사팀은 그때까지 이름조차 들은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3캐럿 물방울다이아를 찾아 대령시키라는 엄명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피해품의 모양조차 모르니 수사에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12월초, 또 똑같은 수법의 3인조 강도가 청담동에서 발생했다. 이번엔 회사사장 집이었다. 형사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경찰서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인디언 3인조'를 못 잡으면 형사질 고만 둘 각오를 하라. 무엇보다 물방울 다이아부터 찾아내라"고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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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짝 기합을 받아 설까, 형사들은 이즈음 어느 도박판에서 압수한 수표 한 장이 강도피해자의 집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냈다. 탐문결과 그 수표를 쓴 것이 전과 8범 김모(42)라는 것도 확인했다. 수사는 갑자기 급물살을 탔다. 형사들은 김의 연고지를 뒤지는 한편, 교도소로 김을 면회 간 사람 1백50명의 리스트를 확보했다. 수사망을 압축해 들어가며 "김의 친구 오모(31)가 최근 애인에게 커다란 다이아반지를 주었고 그 애인 집에는 다른 패물도 많다더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2월 초,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들은 새벽에 애인 집에 들른 오를 붙잡았다. 그리고 바로 애인 집을 압수수색해 문제의 물방울다이아도 찾아냈다. 오 역시 처음 본 이 큰 다이아가 모조품 수정인줄 알고 애인에게 던지다시피 줘버린 것이었다.
3캐럿 물방울다이아는 정확히 말하면 '페어 세이프(pear shape)다이아몬드'다. 서양 배 모양으로 깎은 것으로 장 여인이 물방울 모양이라고 말해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보석상들이야 알았겠지만 서민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 형사들도 가격을 산정하는데 애를 먹었다. 여러 군데 보석상의 자문을 받아 1캐럿 당 1천만 원씩 시가 3천만 원으로 계산했다. M반장은 다이아를 찾은 뒤 의기양양해 장 여인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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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해결 후 받은 사례금 봉투와 '권고사직'
M반장에 따르면 장 여인은 다이아를 보자 마치 집 나간 아이를 되찾은 듯 감개무량해했다. 그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이걸 찾다니 우리 형사들 정말 대단하다"며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힘껏 도와주겠다"고 했다. 물론 M반장은 그 말을 도난품을 찾은 피해자가 의례 하는 공치사쯤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특별히 문제 될만한 일이 없었다.
사단은 20일 후에 발생했다. 2월말 장 여인은 형사2반 전원과 강남경찰서 경무과장(경정), 청담동파출소장(경사) 등 '다이아 회수 유공경찰관' 8명을 집으로 '불렀다'. 이들을 일렬로 도열시키고 비서로 하여금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해 한발 앞으로 나오게 한 뒤 50만원이 든 사례금 봉투를 '하사'했다. 경찰관들은 '높은 사람'의 부인이 주는 격려금이니만큼 고개를 숙이거나 거수경례를 부치고 감읍하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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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잡아주고 사례비 받아 경관 8명 권고사직 1982. 6. 12 [동아일보] 11면 | |
형사들의 설명이 끝날 때쯤 시간은 이미 새벽 5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형사들은 감찰조사 결과 돈 받은 것이 확인돼 전원 '권고사직'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거의 실신상태로 취한 그들은 "높은 사람이 주는 하사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느냐"며 울부짖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또 한편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었다. 스스로 실토하기 전에는 드러날 이유가 없는 이 사건은 이 장 부부가 수천억대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되며 꼬리가 드러났다. 검찰이 부부의 권력형 비리 전모를 캐던 중 비서가 흘린 것이었다. | |
'부정과 비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다이아몬드
조세형은 잡혔지만…보석류 소유주 어떻게 되나
1983. 4. 21 [동아일보] 3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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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듣느라 그날 기자는 도저히 기사를 작성할 수 없었다. 해롱대며 선배들에게 사건 전모를 전하다 잠이 들기도 했고 전후를 틀리게 얘기해 핀잔을 받기도 했다. 술 취한 A의 얘기를 듣고 대신 기사를 작성해준 선배는 데스크에 원고를 넘기며 "이건 완전히 물방울다이아의 저주에 걸린 거구먼" 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날 한국 신문에 처음 물방울 다이아라는 것이 소개된 뒤 이후 그것이 주는 뉘앙스는 부정과 비리, 냄새나는 거래나 은밀한 축재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장 부부가 샀을 리도 없고 설령 샀더라도 밀수품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이아몬드는 금수품이었다) 또 이른바 대도 괴도들이 훔친 물건에 물방울다이아가 들어있다는 게 밝혀져도 "내가 그 주인"이라고 나선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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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