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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강도 등 범죄사건 취재기자를 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 믿음마저 흔들릴 때가 있다. 시치미를 뚝 따고 눈썹 하나 깜짝 않으며 거짓말을 늘어놓는 피의자는 그래도 약과다. 인간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저질러놓고 이죽거리며 으쓱대기까지 하는 범인을 보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마저 든다. 저지른 대로 똑같이 되갚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 |
도자기 사러 나갔다가 연락 끊긴 골동품상 부부
물건 사러 나간 후 골동품상 부부 실종 1979. 6. 22 [동아일보] 7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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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엔 잔혹 무비한 사건이 많았다. 50~60년대 가난한 시절에는 그저 먹고살자고 저질렀을 법한 범죄가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되며 지능화 계획화했다. 더욱 잔인해졌다. 사람을 토막 내 우편으로 부치는가 하면 사체를 자기 집 마당에 묻어놓고 아무 일 없는 듯 사는 인면수심 범죄도 발생했다. 1979년 가을, 온 나라를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골동품상 부부 및 운전사 살해 및 암장사건이 그런 잔혹, 엽기의 대표적 사건이었다.
1979년 6월20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유명 골동품상인 K사 정모 사장(38)과 부인(34), 자가용운전사(28) 등 3명이 중개상에게서 도자기를 사겠다며 나간 뒤 실종됐다. 먼저 정 사장이 “질이 좋은 이조백자가 있다”는 한 사람의 전화를 받고 가게를 나갔다. 그는 곧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돈 5백만 원을 가져오도록 했는데 이후 부부 모두가 소식이 끊겼다. 부인이 타고나간 차만 이튿날 마포구 망원동 근처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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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신고 받은 경찰, 조기해결 자신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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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은 사건의 조기 해결을 자신했다. 종로경찰서 형사 팀은 “이런 사건은 식은 죽 먹기다. 골동품 거래를 둘러싸고 벌인 납치가 분명하니 암거래하는 몇 놈만 족치면 금세 범인을 잡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공언대로 경찰은 골동품과 문화재 관련 전과자, 중개상 등 이른바 ‘부엉이 굴’을 샅샅이 뒤지고 먼지 한 점까지 털어봤다. 그러나 세 사람의 행방은 1백일이 지나도록 그야말로 깜깜 무소식이었다.
“어린이도 아닌 20~30대 청장년이, 그것도 한꺼번에 세 명이나 실종돼 소식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 언론은 매일 경찰의 수사미진을 질타했다. 처음엔 사건을 우습게보고 종로서의 작은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렸던 경찰은 “앗 뜨거워라” 싶었는지 수사본부장을 부랴부랴 서울시경 부국장으로 격상했다. 서울시내 전 경찰서의 수사과장, 형사계장, 강력반장회의를 잇달아 열어 “공조체제를 구축해 빨리 범인을 잡아라.”고 독촉했다. 나중에 엉터리로 판명된 용의자의 몽타주도 수십만 장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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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상 실종3주…추리만 만발 ‘갈팡질팡’ 1979. 7. 10 [경향신문] 7면 | |
갈수록 깊어지는 미궁의 늪 1979. 7. 18 [동아일보] 7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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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 사장의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상금을 걸면 범인에 관한 결정적 제보를 하겠다.”고 누군가 전화를 걸어오자 정 사장의 형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천만 원을 내걸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정 사장 부부의 네 딸은 TV에 나와 울먹이면서 “제발 우리 아빠 엄마를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실종된 지 석 달이 지나갈 때는 종로경찰서 출입기자들이 딸들의 일기장까지 공개하며 여론을 환기시켰다.
큰 딸은 일기장에서 “밖에 비가 오는 데, 엄마아빠 어디서 비를 맞고 계셔요?” “우리 엄마아빠를 데려간 아저씨, 제발 마음 좀 돌려주세요.” “막내가 자꾸 엄마를 찾으며 우는 바람에 딸 4명이 모두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적어 국민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딸의 동급생들은 보도가 나간 뒤 ‘네 자매 부모 찾아주기’ 가두 캠페인에 나섰고 주한 미국대사 부인도 골동품 가게를 찾아와 아이들을 위로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 누구나 자고나면 그 사건이 어찌 되었는지를 묻는 ‘국민의 사건’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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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관심이 높다보니 치안본부장이나 검찰총장 등 연관 부서의 장들은 어디에 가서건 범인 조속 검거 약속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신문과 TV에 매일 수사속보가 나오고 높은 사람들이 엄청난 관심을 보이자 형사들 또한 긴장했다. 경찰내부에서는 이 사건만 해결하면 특진 등 보상이 엄청날 것이란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다보니 다른 수사팀, 다른 형사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투는 일도 생겼다. 수사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감추거나 이미 조사한 용의자를 다른 데서 다시 소환하는 등 난맥상도 불거졌다. | |
수사 장기화로 애꿎은 골동품업계만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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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장기화하다 보니 죽어나는 건 골동품 중개상이었다. 6월 실종 이후 9월 초까지 3달간 중개상 3천4백여 명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 문 닫는 고미술상이 속출했고 인사동 일대 골동품 거래는 올 스톱됐다. 사건해결 후 확인해보니 중개상 등 1백15명이 용의자로 조사받다 별건으로 입건됐고 그중 76명은 구속됐다. 한 중개상은 조사도중 투신자살을 기도하는 등 고문의혹도 불거졌다. 골동품업계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휘청거렸다.
수사가 장기화하자 경찰도, 언론도 힘이 빠졌다. 납치범은 못 잡고 애꿎은 골동품업계만 때려잡은 게 미안한지 한 경찰간부는 “낙엽이 지면 사체가 나오고 그러면 수사에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밝혔다. “실종자들은 사망한 게 틀림없는데도 일체의 증거물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깜깜이 수사’를 하고 있으니 해를 넘기거나 영구미결로 남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 수사본부에서는 유력한 용의자 한명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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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불신…골동품 상가 '시련' 1979. 7. 9 [동아일보] 5면 | |
동거녀의 부모의 제보로 100일만에 범인 검거
실종 100일만에 시체로 돌아온 골동품상 부부 1979. 9. 28 [경향신문] 7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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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의 동거남이 뭔가 수상하고 미심쩍다”는 제보가 들어와 조사해보니 용의자는 사기와 공갈 전과 5범이었다. 특수기관원 행세를 하고 다닌 적이 있고 그 전해 교도소에서 출소했으며 수입도 없으면서 돈은 잘 쓰고 다녔다. 게다가 그는 지난 6월 정 사장 부부 실종 다음날 마포구 성산동 집 마당에 정원수를 심는 조경공사를 했는데 이것도 미심쩍었다. 물론 정황상 그렇달 뿐 결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실종 100일째인 9월27일. 언론은 일제히 경찰의 수사미진과 무능을 질타했다. 수사본부 관계자의 문책은 물론 넌지시 시경국장의 퇴진까지 주문하는 언론도 있었다. 다급해진 수사팀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서울시경에서는 “용의선상에 오른 모든 사람을 다시 샅샅이 캐보고 별건으로라도 입건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제보를 받은 뒤 멀찌감치 미행하면서 단서를 잡으려했던 그 30대 남자도 꼬투리를 걸어 그날 연행했다. 물론 동거녀도 따로 잡아와 별실에 앉혀놓고 조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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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자에게 성산동 집 조경공사를 한 이유를 묻자 그는 “내 집을 내가 고치는데 뭐가 잘못이냐?”며 세게 반발하고 나왔다. “아무 죄도 없는데 단순히 전과자라고 다시 잡아들이는 건 인권침해가 아니냐.”고 따져 경찰은 처음부터 난감해했다. 그러나 옆방에선 달랐다. 동거녀는 처음 연행될 때부터 뭔가 말할 듯 입술을 달작거리다 갑자기 흐느끼기를 반복했다. 사건 팀은 육감적으로 “범죄에 가담은 했지만 공범이 두렵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단계”로 판단했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동거녀에게 “혹시 골동품상을 납치해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고 들어갔다. 이내 부인했지만 그녀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렇게 심문하기를 3시간. 마침내 여자는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첫마디는 “나는 죄가 없다. 나는 모른다. 모두 동거하는 남자와 그 동생이 한 일이다.”였다. 기대하던 답변이 나왔지만 경찰은 긴가민가했다. 남자는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여자가 털어놓은 범행 경위도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돈을 뜯어내려고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납치해 그날 차례로 목 졸라 죽인 뒤 집 마당에 묻은 지 100일이 됐다”는 자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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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 한복판에 암장된 '잔혹 100일' 1979. 9. 28 [동아일보] 7면 | |
사업자금을 구하기 위해 저지른 '잔인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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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 박o웅= 38세, 대학 연극학과 2년 중퇴 △동생 박X= 32세, 전 고등학교 미술교사 △주범의 동거녀 김o식=29세, 전 호스티스. 자백을 받은 날 밤 12시 넘어 경찰은 그들을 데리고 성산동 박의 집으로가 정원을 파내려갔다. 사람들 눈을 피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28일 새벽 1시경. 삽 끝에 물컹한 물체가 닿았다. 금당 정 사장과 부인, 운전사 이 씨의 사체가 차례로 나왔다. 거기까지만 확인한 뒤 경찰은 현장을 보존하고 철수했다. 한밤에 일을 하다 증거가 훼손되거나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범행 동기는 단순했다. 주범 박이 진공청소기 총판 사업자금을 마련하겠다며 계획하고 저지른 범죄였다. 박은 골동품가게 건물을 보고 현금이 많을 것으로 판단해 평소 일면식도 없는 정 사장을 전화로 유인했다. 집까지 데려와 부인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전화를 걸게 한 뒤 살해했다. 곧 도착한 부인도 남편의 사체가 있는 방에서 목을 졸랐다. 불과 반나절에 세 명을 혼자 살해했고 사체는 벽장에 숨긴 뒤 주범 일가 3명 모두 그 집에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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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이튿날 밤 시멘트 포장된 마당을 깨고 사체를 묻었다. 또 그걸 위장하기 위해 잔디와 조경수를 심었다. 주택가 한복판에서 이틀에 걸쳐 이런 살해 암매장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이웃주민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79년 9월28일 낮 경찰이 범인 3명을 대동하고 현장에서 시체를 발굴할 때 주민들은 코를 싸맸고 그때서야 “조경이 어울리지 않았다”거나 “어떻게 사람을 셋씩이나 마당에 묻어놓고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느냐”며 흥분했다. | |
숨은 얘기까지도 화제가 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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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뒤에 숨은 얘기도 많았다. 주범 박은 군에서 사체처리 반에 근무했고 제대 후 도축장에서도 일했다. 동거녀 김이 친정에 가 “아무래도 박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사건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그녀가 친정에 간 것은 박이 김과 동거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여 돈을 뜯어내려 했던 때문이었다. 그는 잘생긴 외모로 여자를 등치는 데도 특별한 수완이 있었다. 체포된 후 세상을 비웃으며 빈정거렸던 박은 사형당하기 전 안구를 기증했고 사후에는 그의 참회 편지도 출간됐다.
동생과 동거녀도 죄를 뉘우쳤다. 동생 박은 수감 중 재소자 미술전람회에 출품해 금상을 받았다. 죄수 작품은 액 막이를 한다는 속설 때문인지 고가에 팔렸다. 수사본부의 많은 형사들이 특진을 했고 경찰은 단일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수사백서를 펴냈다. 연인원 2만 명이 사건에 투입됐고 조사를 받은 사람은 4천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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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경국장은 용의자로 몰렸던 골동품상과 중개상, 골동품 수집자 등 2천 명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범인들은 결국 뉘우치고 경찰은 사건을 해결한 잔치를 벌였지만 숨진 3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4자매의 피울음은 그대로 남았다. 두고두고 얘기가 많았을 법한 이 사건은 그러나 이후 한 달 만에 터진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충격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 |
- 글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