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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산이 떨다 - 끊이지 않는 엽기범죄

작성자도현|작성시간12.05.24|조회수1,043 목록 댓글 0

정정이 불안하면 사회가 뒤숭숭하고 강력범죄도 덩달아 판을 치는 법이다. 1979년이 꼭 그랬다. 대통령의 피격 사망 같은 연말에 닥칠 흉흉한 사건을 예고라도 하듯 정초부터 사건사고가 봇물을 이뤘다. 1월2일 멀쩡히 서있던 시외버스가 바다로 굴러 9명이 숨지더니 준공한지 얼마 안 된 호남선 터널이 느닷없이 붕괴되는 사고도 일어났다. '이팔국 사건' 후 몇 년은 뜸했던 살인 및 사체 훼손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난 것도 심상치 않았다.

 

 

 

79년 부산서 여인 토막살해 사건 발생

 

엽기살인…여인 토막시체 
1979. 2. 16 [동아일보] 7면


2월15일 부산 송도해수욕장 길목에 있는 콩나물공장 하수구에서 40대 여인 시체가 발견됐다. 얼굴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만든 데다 지문도 채취하지 못하게 신체 여러 곳을 훼손한 상태였다. 사체를 담은 일제 PVC부대에선 역한 화공약품 냄새가 났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경찰은 범인이 의료업계 종사자거나 화공약품 회사원, 아니면 푸줏간 관련자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현장부근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여자관계가 복잡한 의사'나 '그간 행적이 수상한 정육점주인' 등의 리스트를 작성해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전혀 진전이 없었다. 범인 윤곽은 커녕 피살자 신원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DNA 검사가 없던 당시엔 주민등록부에 찍힌 지문이 신원을 확인해줄 유일한 열쇠였다. 그런데 사체의 그것이 훼손됐으니 신원을 밝혀낼 길이 없었다. 경찰은 그저 검문검색이나 강화하고 의심나는 사람을 불러다 찔러보며 추궁하는 방법에만 의존했다. 그러다보니 연행된 사람들은 “경찰에 고문을 당했다”고 하소연하는 일까지 생겼다. 소리만 요란하게 수사를 벌인 탓에 잔챙이 사건은 몇 건 해결했지만 부산민심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살인·유괴 등 계속되는 강력범죄에 '싸늘해진 민심'

 

그런 판에 4월 초엔 부산 재벌급 사업가의 10살 외동딸이 납치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 어린이는 전해인 78년 가을 33일 간이나 납치됐다 극적으로 생환해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았는데 또다시 유괴범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부산시민들은 아연했다. “토막 살인범을 잡겠다고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삼엄한 경비망을 폈는데도 어린이 유괴사건이 터졌으니 경찰의 치안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비난이 급등했다. 작년 납치사건 때 이미 전국적으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소녀가 아침 등굣길에 감쪽같이 유괴될 때까지 경찰이 몰랐던 건 “본업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지적도 나왔다.

 

“본업에 충실하지 않다”는 건 수사, 보안 형사들이 제 일보다 데모진압 등 다른 업무에 차출되는 일이 잦은 걸 비꼬는 말이었다. 장기집권 유신독재체제를 긴급조치에 의존해 유지하던 박정희 정권은 대학과 재야, 야당의 반발이 갈수록 거세지자 수사형사까지도 데모진압에 투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강력사건이 나고 제때 해결이 안 되면 언론은 “가뜩이나 부족한 수사 인력을 애먼 데 투입하는 바람에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긴급조치 때문에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학생과 재야의 데모 같은 정국 불안상황을 강력사건에 빗대서라도 알리려는 것이었다.


부산 효주양 또 유괴 
1979. 4. 14 [동아일보] 7면

 

 

 

대통령 유괴사건 해결 전면에 나섰지만..

 

급우들 등교 “만세” 환호성 
1979. 4. 19 [경향신문] 7면


상황이 이처럼 묘하게 진전되자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유괴사건 발생 5일 째,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범인이 지금이라도 지난 일을 뉘우치고 어린이를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으로 하여금 죄과를 가능한 한 관대히 다루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보도기관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지나친 추측보도를 삼가 달라”고 당부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개별범죄에 대한 대통령 특별담화에 놀랐는지 범인들은 담화가 발표된 그날 밤 유괴한 어린이를 부산에서 한참 떨어진 경주 톨게이트 근처에 내려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건이 끝난 건 아니었다. 어린이는 살아 돌아와 다행이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어린이의 증언을 토대로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하고 부산시내는 물론 경상도 일대를 이 잡듯 뒤졌지만 도무지 진척을 보지 못했다.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인 사건이니 어떻게든 범인을 잡겠다고 경찰이 안간힘을 쓰는 것은 분명했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치달을 뿐이었다. “심지어 지나던 강아지까지 붙잡아 조지는 등 검문만 강화하는 바람에 시민들만 불편을 겪고 있다”는 불평이 잦아들지 않았다.

 

 

 

또 지문 도려낸 20대 여성 살해 사건 발생

 

그런 6월 19일 오후. 부산 동래에서 또 엽기적으로 살해, 유기한 20대 여자 시체가 발견됐다. 이번에도 역시 지문을 뜨지 못하게 훼손한 흔적이 뚜렷했다. 이제는 시민뿐 아니라 경찰도 두려움에 떨었다. 2월 송도사건에 4월 어린이 유괴사건으로 빈틈없는 경계망을 치고 검색도 강화했는데 엽기살인이 또 터졌으니 부산경찰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라 허둥댔다. 상황이 이쯤 되자 치안본부가 직접 나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반이 현장에 내려와 사체를 검안했다. 그리고 “비록 많이 훼손은 됐지만 속살에서 지문을 복원할 수도 있다”고 결론 내렸다. 과학수사연구소는 거의 퍼즐을 맞추듯 하며, 당시로선 최첨단기법을 동원한 끝에 지문을 찾아냈다.

 

치안본부 지문분류 팀 직원들은 이 지문을 가지고 밤을 새워가며 전국 2천만 명의 주민등록대장과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2천만 개 지문 중에서 단 하나를 골라내는 작업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경찰은 끝내 피살자의 신원을 밝혀냈다. 23세 여공이었다.


부산 토막 살인사건 수사 언저리 
1979. 6. 27 [동아일보] 7면

 

지문이 풀어준 실마리…과학 수사의 개가 
1979. 6. 25 [경향신문] 7면


그녀는 26세 기능공과 2년 동안 동거해왔으며 남자의 포악한 성격 때문에 몇 차례 집을 나와 도망 다닌 사실도 확인했다. 그녀의 사체를 묶은 포장지 끈도 동거남의 집에서 발견했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잠적한 상태였다. 시체 발견 닷새 째, 경찰은 동거남 이모씨를 용의자로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6일 밤, 그는 동대구역에서 불심검문을 받고 도망치다 격투 끝에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동거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 싫어 죽인 것”이라고 진술했다. 또 “사체와 옷가지를 부산시내 여러 군데에 나눠 버렸다”고 자백해 경찰은 그가 지목한 변소와 쓰레기장을 샅샅이 뒤져 증거물을 찾아내는 작업도 벌였다. 이의 입에서 범행 전모가 흘러나올 때마다 부산 시민들은 몸을 떨며 전율했다. 특히 사체 일부를 모 초등학교의 변소에다 던져버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포에 질린 부모들이 아이들을 결석시키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연일 터지는 '강력 사건'에 '민생치안 소홀'한 경찰 비난도..

 

이럴 즈음 서울에서도 거금을 지닌 골동품상 부부가 실종되고 여 암달러상이 피습됐는가 하면 아파트 강도가 초등생 어린이를 살해하고 달아나는 강력사건이 연일 터지고 있었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휩쓰는 강력사건에 시민불안은 가중됐지만 학생데모 같은 시국상황에 넋을 뺏긴 경찰은 그 사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언론은 연일 질책을 쏟아냈다. 대통령 긴급조치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9호가 내려진 75년부터 79년까지 강력사건 가운데 살인 79건 강도 371건 등 무려 450건이 미제상태라고 꼬집었다. 독재체제 유지에만 힘을 쏟느라 민생치안에 소홀하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9월 초 자신의 지역구 부산에 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사상 최악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며 “경찰이 본업이 아닌 정권안보, 정치사찰에만 주력해 국내 치안질서가 마비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YH무역 여공들이 농성 중이던 신민당사에 경찰이 난입해 강제 진압한 이후 신민당과 김 총재의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더욱 강경해졌고 그 연장선상에서 부산 발언이 나온 것이었다.


부산 정씨부부 피살시로 
1979. 10. 31 [동아일보] 7면

 

야당 당수가 경찰에게 “본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할 정도면 해괴한 사건은 그쯤에서 그칠 법도 했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았다. 그것도 또 부산에서 사건이 났다. 10월 4일. 부산 북구 괘법동 중앙부동산 주인 정병주 씨(28) 부부가 괴청년들에게 유인돼 나간 뒤 장기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 청년들은 처음 정씨에게 “낚시를 안내해 달라”며 데려갔고 곧 부인에게 찾아와 “남편이 교통사고를 냈다. 돈을 준비해 함께 가자”고 꾀어 간 뒤 모두 소식이 끊긴 것. 부부는 결국 26일 만에 시체로 발견됐는데 경찰은 이때도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고 수사를 해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였다. 정초부터 일어난 대부분 잔혹범죄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시국사태에 경찰이 투입되는 빈도도 훨씬 잦아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흉흉한 사건들로 가득했던 79년, 대통령 서거사건까지..

 

정씨 부부가 괴청년들에게 납치된 바로 그날 10월 4일, 국회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의 제명안을 통과시켰다. 어떻게든 유신체제를 지켜보겠다는 박대통령과 공화당이 둔 악수 중의 악수였다. 제명 사태 이후 부산에선 민주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 부산대 동아대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으나 곧 시민들이 전면 동조하고 나섰고 바람은 마산과 경남 일원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른바 ‘부마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정부는 10월18일 부산에 계엄령을 내렸고 26일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내렸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 항쟁에 대해 “까짓 것, 탱크로 확 쓸어버리면 된다.”고 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며 사람들은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26 밤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고 서거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정과 온통 뒤숭숭한 사회, 거기 독버섯처럼 생겨난 잔혹 엽기범죄, 그리고 공포와 분노…부산시민에게 있어 1979년은, 그야말로 온몸을 떨며 맞이했고 또 그렇게 보낸 한해가 되었다. 민주화의 횃불은 거저 타오른 게 아니었다.

 

 

 

민병욱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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