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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는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활동이다. 개인의 놀이를 넘어 집단 구성원이 함께 즐기는 놀이가 축제이며, 제천(祭天)행사는 다양한 놀이가 펼쳐진 대표적인 축제였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시대별로 제천행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놀이문화도 변화되었다. | |
유희를 즐기는 인간, 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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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문화역사가 후이징가(Johan Huizinga, 1872~1945)는 인간의 본질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遊戱人), 즉 “놀이를 즐기는 인간”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문화는 놀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놀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활동 형식이라고 보았다. 인간생활의 3가지 기본요소로 의식주(衣食住)를 들지만, 여기에 놀이(遊)를 덧붙여 4가지로 이해하는 이들도 많다.
놀이의 바탕에는 자유와 규칙이 자리잡고 있다. 같이 놀이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약속이 어우러져야 놀이가 완성된다. 놀이 정신이 공동체에서 사회적으로 표출된 것이 축제다. 우리 조상들이 즐긴 가장 큰 축제는 인간이 섬기는 최고의 신인 하늘 신을 섬기는 제천 행사였다. | |
상고시대의 제천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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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과 10월에 지내는 오월제(五月祭)와 시월제(十月祭) 등 우리 겨레의 제천행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 7세기 중엽 당나라 두사선(杜嗣先)이 펴낸 [토원책부(兎園策府)]에 고조선의 풍속으로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이 있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고조선의 제천행사의 이름이 동예의 것과 같은 무천이었음이 밝혀졌다.
삼한의 10월제, 신라의 가배(嘉排) 등은 농경이나 정착생활 과정에서 생기는 추수감사제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은정월(殷正月- 12월)에 열리는 부여의 영고는 추수감사제라고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으며, 삼한의 오월제는 매년 5월에 열리는 유목민족들의 제천행사와 시기적으로 같다. 유목제국을 세운 흉노(匈奴) 사람들은 매년 오월에 농성(蘢城)에서 큰 모임을 갖고 그들의 조상, 하늘과 땅,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우리의 제천행사는 같은 농경민인 중국의 제천의례보다는 유목민의 그것과 관련성이 더 크다.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제천행사를 국중대회(國中大會) 즉 나라 가운데 큰 모임으로 여는데,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풀어주어 화합을 도모한다. 이때에 모두들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참가하였다. 신분의 높과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고구려 동맹 행사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줄곧 임금이 직접 참가하여 행사를 주관했다. | |
다양한 놀이가 펼쳐진 제천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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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가배의 경우도 가배 행사에 앞선 길쌈 경기를 왕녀(王女)가 직접 주관한 만큼, 상하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격을 가졌다. 가배 행사에는 다양한 춤과 노래, 놀이가 펼쳐졌다. [수서(隋書)] 등 중국 기록에 따르면, 가배에는 신하들이 활쏘기 경기를 하고, 왕은 상으로 말과 베(布) 등을 주었다고 했다. 고구려는 동맹 외에도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개최한 후, 돼지나 사슴을 잡아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사냥대회에서 바보 온달(溫達)이 1등을 해서 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이 대회는 인재선발의 기회이기도 했다. 사냥은 제천행사에서 행해지는 놀이 가운데 하나였다. | |
장천1호분 벽화에는 다양한 놀이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 귀족들이 평상시에도 야외에서 다양한 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놀이는 소속감을 강화시켜 사회 통합에 기여하였다. |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답추라고 불린 발해인의 춤 상상도. 축제 기간 동안 집단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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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사람들은 제천행사 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수십 명이 모두 일어서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었다. 발해의 풍습에는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노는데,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하여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고 하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했다. 이렇게 집단으로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는 많은 이들이 화합하며 놀 수 있는 노래였다.
축제는 사회 통합 기능이 있다. 제천행사를 통해 우리가 모시는 신이 우리 집단을 보호해준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고, 상하가 함께 어울리면서 공동체와 개인의 자기 확인과 일체감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상고시대는 전쟁이 잦은 시대였던 만큼, 집단 내부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제천행사는 집단의 단결력을 강화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랜 노동이나,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치게 한다. 축제는 금지의 해제를 통한 해방감을 줌으로써, 새로운 충전의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축제는 난장판, 일탈의 시간이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현실을 잠시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 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마련했다. 노동을 하고, 전쟁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만끽할 축제가 꼭 필요했다. | |

각저총의 씨름장면(왼쪽)과 안악3호분의 수박도(오른쪽). 씨름과 수박희는 겨루기 경기로, 서로 간의 지켜야 할 규칙이 존재하는 놀이이다.
각종 축제에는 겨루기 놀이가 자주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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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등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즐긴 놀이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제천행사에서도 즐겼을 만한 놀이로는 씨름, 수박희와 같은 겨루기, 가면극, 활쏘기 경기, 재주 부리기 등 각종 기예를 들 수 있다. 9세기 말에 살았던 신라의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은 그의 시(詩) [향악잡영(鄕樂雜詠)]에서 금환(金丸- 공 놀이)ㆍ월전(月顚- 가면극)ㆍ대면(大面- 가면춤)ㆍ속독(束毒- 춤추는 가면극)ㆍ산예(狻猊- 사자춤) 등 다섯 가지 기예에 대해 읊고 있는데, 이런 춤들도 신라의 제천행사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 |
제천행사를 계승한 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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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의 제천행사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팔관회(八關會)로 계승되었다. 팔관회란 팔관재계(八關齋戒)라는 불교 계율에서 나온 말로, 스님이 아닌 일반 신도들이 하루 동안 출가한 수도자처럼 불교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는 의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팔관회는 551년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한 승려 혜량(惠亮)이 승통(僧統- 승려의 우두머리)이 되어, 그의 주관 하에 최초로 백좌강회와 팔관의 법을 행한 것이 우리 역사상 처음이다. 혜량을 받아들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572년 10월에 죽은 병사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를 7일간 베풀었다. 또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재위: 901~918)는 899년 11월에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신라의 가배와 달리 10월 또는 11월에 열리는 팔관회는 고구려 출신 혜량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내용도 고구려 동맹과 닮았다. [송사(宋史)] 〈고려〉조에는 “고려에서는 10월 동맹을 팔관재(八關齋)로 개최한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인의 눈에는 고려의 팔관회가 고구려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로 보인 셈이다.
팔관회에서는 천령(天靈)ㆍ오악(五岳)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 등 여러 신(諸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팔관회 행사는 왕과 신하들 간에 예를 나누는 군신의례(君臣儀禮), 가무백희(歌舞百戱)로 전개되는 무대공연, 그리고 개경에 있는 호국사찰인 법왕사(法王寺)로의 임금의 행차 등 3부분으로 크게 구분된다. 행사는 14일의 소회(小會)와 15일의 대회(大會)로 2일간 열린다. 매년 10월에 서경에서 열리는 팔관회는 11월에 열리는 개경과 비슷한 행사가 열리며, 다만 임금 대신에 재상을 파견해 동명신(東明神- 고구려 건국의 시조 신)에 대한 제사와 산천제(山川祭)를 올렸다.
불교와 전통신앙이 결합된 팔관회에는 왕이 함께 했다. 왕은 위봉루(威鳳樓) 또는 신봉루(神鳳樓)에 올라가 윤등(輪燈- 바퀴 모양의 등)에 불을 밝힌 가운데 다양한 놀이와 춤, 노래 공연이 펼쳐진 팔관회를 많은 민중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 |
즐기는 축제와 보는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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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팔관회는 고대 제천행사와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고대 제천행사가 공동체의 신명풀이의 장이었던 것과 달리, 팔관회는 군신의례 절차가 축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무대와 객석이 엄격히 분리된 볼거리 위주의 축제였다. 특히 개경에서 벌어지는 팔관회는 정부가 주도하는 지배층 중심의 축제였다. 이 때문에 981년 성종(成宗, 재위: 981~997)은 팔관회의 잡기(雜技)들이 불경하고 너무 번잡하고 요란스럽다는 이유로 가무백희를 폐지하고 법왕사에 행차만 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팔관회가 지속되기를 원하자, 1010년에 부활되어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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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산리고분에 그려진 재주 부리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무덤 주인공의 모습. 서커스에 가까운 이런 기예(技藝)는 각종 축제에서 흥을 돋구기 위해 행해졌다. 팔관회 또한 이러한 기예를 비롯해 전통과 외래,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이 어우러진 흥겨운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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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에는 화랑무(花郞舞- 4명의 소년이 화랑의 옷을 입고 춤추는 것), 용봉상마거선(龍鳳象馬車船)의 가장 행렬(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가장 행렬), 개국공신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인형(偶像)을 만들어 한 연극, 전문 기예집단이 노래하고 춤추다가 6명씩 갈라 장대에 매단 주머니에 공을 집어넣는 시합을 벌이며 노는 포구락(抛毬樂), 아홉명이 9개의 기구로 묘기를 부리는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 그 밖에 어룡지희(魚龍之戱), 헌선도(獻仙桃) 등 각종 음악과 춤, 서커스에 가까운 기예(技藝)가 펼쳐졌다.
팔관회는 지배층에 의해 주도된 축제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노래와 춤 등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축제는 종교적 기능, 전통수호의 기능, 문화 예술적 기능, 사회통합의 기능, 역사인식 기능 등과 함께 경제적 기능도 갖고 있다. 팔관회를 보기 위해 송, 요, 금, 일본,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 등 다양한 외국의 상인들이 몰려왔다. 일상에서 벗어난 소란스럽고 어지럽기조차 한 공간에서 외국의 진귀한 물건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축제로 인해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팔관회 공연 이후에도 한동안 도성에는 사람들이 모여 놀이판을 펼치기도 했다. | |
축제에서 제의(祭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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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사 가운데 중요한 변화의 시점으로 372년 불교 도입을 거론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로 유교(儒敎)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을 들 수 있다. 유교는 중국의 재래신앙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유교식 제의는 우리조상들이 지낸 제천행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신라는 648년 당나라의 복장을 받아들인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화(中國化)의 길을 걸었는데, 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시기에 오묘(五廟- 제후의 종묘 제도)제도를 정비하고,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때에 중국의 제사체계에 의거한 사전(祀典- 각종 제사 지내는 규범)체계를 정비하게 되었다.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로 구분된 제사 체계에 따라 제후국으로 위상을 정리한 신라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여겼던 나라답게, 983년 성종이 원구(圜丘-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에서 제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제천의례를 지낸 것이 기록된 것만 12번이 된다. 또한 팔관회에서도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문제는 조선이었다. 1392년 7월 17일 건국된 조선은 곧장 사전(祀典) 제도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먼저 8월 5일 도당(都堂)에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기를 청했다. 8월 11일에는 예조(禮曺)에서 상서를 올려 제사 제도를 완전히 유교식으로 개편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절인 원구(圜丘)를 폐지하게 되었고, 백고좌법석(百高座法席) 등 불교와 도교식 제례(祭禮)를 모두 폐지시켰다.
비록 세조가 1457년을 시작으로 1464년까지 8번 원구단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했지만, 이후 제천행사를 하지 못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에야 원구단에서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상하가 함께 즐기는 제천행사는 조선시대에 사라지고, 유교의 제사 의례만이 남았다. 엄격한 질서와 통제, 엄숙함이 가득한 종묘(宗廟) 제례 등에서 행해진 춤과 노래는 유학자들의 취향에는 맞는 것이지만 대중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춤과 노래는 아니었다. | |
축제와 반(反)축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圓丘壇) 황궁우(皇穹宇). 대한제국시기에 만들어진 원구단은 현재 각종 신들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와 석고(돌북)만이 남아있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자리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
원구단 황궁우 내부의 모습. 최고신인 황천상제, 운사, 우사, 풍백, 우사 등 다양한 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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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권은 명(明)-청(淸) 천자(天子)의 책봉(冊封)에서 그 권위의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왕과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외부의 위협이 닥칠 때 목숨을 함께 할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 축제를 통한 사회통합기능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지배층의 인식 탓이었다.
성리학 이념을 토대로 건국된 조선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중앙집권을 실현하기 위해 사전(祀典)의 정비와 제의(祭儀)의 표준화 작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태종(太宗)의 사전(祀典) 개편, 세종의 오례(五禮) 제정, 성종의 국조오례(國朝五禮) 편찬 등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삼국시대 제천행사와 성황제(城隍祭) 등 마을축제를 음사(淫祠), 즉 정당하지 못한 신에 대한 제사라고 규정을 했다.
그리고 일탈과 욕망의 해소라는 축제의 기능을 음란한 것으로 여겨 엄격한 금기 준수와 욕망의 억압이 수반되는 반-축제(anti-fete)가 국가 차원에서 강제되고, 성리학으로 무장한 선비(士) 집단에 의해 실천된 공동체 의례가 표준화 작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지방 수령의 주도하에 삭망제(朔望祭), 봄가을에 치러지는 유교식 성황제 등은 대표적인 반-축제였다. 마을축제에서 모시는 신에 대한 제사를 유교식 더 정확하게는 당시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중국식에 맞게 뜯어 고친 것이다. 신상(神像)을 폐지하고 목제 위패(位牌)를 놓고 제사를 지냈고, 성황신(城隍神- 민간에서 숭배하는 마을의 수호신)만 놔두고 성황신의 가족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성황신을 지칭한 여러 이름을 폐지하고 군현(郡縣)의 이름을 붙여 일컫는 등 관(官)이 주도하는 유교식 제의로 바꾸었다. | |
민중이 주도한 마을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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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유교적인 마을축제는 향리(鄕吏)와 민중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강한 전승력을 갖고 있었다. 고을축제는 무격들의 굿을 중심으로 하는 무당굿형과 대동놀이를 중심으로 한 대동놀이형, 탈놀이형 등 여러 형태로 살아남았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안동 지역의 마을 축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해마다 5월 5일이면 무당과 재인들이 신라공주오금잠신을 받들고는 수십 명이 한 떼가 되고 관리가 따라가며 안동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관리들이 아무도 금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런 사례들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신상을 싣고 깃발을 든 사람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광대들이 모여 여러 놀이를 하는 거리굿이 백성들의 호응 속에서 축제로 펼쳐졌다. 단오굿에는 그네와 씨름 등 세시놀이가 결합하기도 했다. 대동놀이 형태로 남은 마을축제는 줄다리기, 돌싸움 등 편싸움의 형태로 마을 사람 대다수가 참여하는 형태로 펼쳐졌다. | |
놀이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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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마을 축제들은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다. 상층부가 함께 즐기지 못하는 축제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다. 일본과 달리 우리의 지역축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일탈을 죄악시 여긴 유교의 영향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무에 능했던 우리 겨레의 음악과 춤 그리고 기예, 연극 등이 상층부가 함께 즐기는 고급 예술문화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 |
참고문헌: 금장태, [제천의례의 역사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25집, 1990; 한양명, [조선시대 고을축제의 성격과 전승집단], [실천민속학연구] 6집, 2004; 구미래, [팔관회의 국가 축제적 성격], [역사민속학] 16집, 2003;이상일, [축제의 기능과 향토문화제 비판], [한국문화인류학] 11집 1호, 1979; 왕대일, [여가와 놀이의 새로운 발견], [기독교사상] 49-11, 2005; 르네 지라르 저, 김진석, 박무호 공역,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