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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인물(교훈)

장중경 - 중국 의학의 성인

작성자도현|작성시간11.03.02|조회수169 목록 댓글 0

“괴이하게도 요즘의 선비들은 신묘한 의술에 정진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위로는 임금과 부모의 병을 고치고, 아래로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재난을 구제하고, 중간으로는 스스로의 몸을 보살피고 양생을 하려 들지 않는다. 오로지 부와 권력에 급급하여 권세가들에 빌붙고, 오로지 이름을 내고 이익을 얻기만 열중한다. 쓸모없는 것을 떠받들며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버리고, 겉치레에만 힘쓰고 내면 가꾸기는 소홀히 하니, 피부가 없이 어찌 털이 붙어 있으랴?”

 

후한 말기, 바야흐로 삼국시대의 난세가 시작되려는 즈음에 살았던 장중경은 자신의 [상한론] 서문에서 이렇게 당시의 풍토를 개탄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하여 평생 사람을 고치며 의술을 닦았다. 그리고 책을 써서 의술을 전했다. 그리하여 “의학의 성인(醫聖)”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후한 말의 난세

중국 고대사를 총결산했던 한왕조는 서한(西漢) 15대, 동한(東漢) 15대를 이으며 약 400년 동안 존속해 왔으나, 2세기 말에는 마침내 몰락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삼국지연의]를 통해 익히 알려진 대로 문벌귀족 세력이 강해지면서 토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부정부패와 강족의 반란 등 전쟁의 부담 때문에 세금은 무거워졌다. 이로써 자영농민이 몰락하고 유랑민이 방방곡곡에 넘치자, 황건적의 태평도나 장노의 오두미도 같은 신흥종교가 널리 퍼지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부추겼다. 민란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기후변화도 한몫했다. 당시는 ‘제2차 한랭기’로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2 내지 4도쯤 낮았던 시기에 해당되는데, 기온 저하는 후한 시대 내내 조금씩 심화되면서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조조가 업에 동작대를 짓고 귤나무를 심었는데 꽃은 피지만 열매는 맺지 않았으며, 조비가 창장강에서 수상 군사훈련을 시행하려 했을 때는 아직 늦가을인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버려 부득이 취소했다고 한다.


 

이처럼 차가운 기후로, 농사를 지어도 소출이 적었으며 독감처럼 추울 때 유행하는 전염병이 빈번히 일어났다. 기록에 보면 169년에서 185년까지 역병이 여덟 차례 대유행했으며, 일반인은 물론 귀족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장중경도 [상한론] 서문에서 “건안(建安) 이래로 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우리 일가에서 죽은 사람이 삼 분의 이가 되었다. 그 중 열에 일곱은 상한(傷寒)으로 죽은 사람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런 난세에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성공할 기회가 늘어난다.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는 서민들을 현혹하여 구세주를 자처한 장각이나 우길, 그들을 진압하고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막강한 병력을 손에 쥐고 군벌이 된 동탁, 조조, 유비......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묵묵히 도우면서, 스스로의 이름이나 이익은 앞세우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 장중경도 그런 사람이었다.

 

 

병 고쳐주는 태수님


동시대인인 화타도 신의(神醫)로 이름난 사람인데, 화타는 저서를 남기지 못하였지만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면서 민간 전설을 풍부하게 남겼다. 반면 장중경은 [상한론]을 비롯한 의서의 저자로 동양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자신에 관한 일화는 별로 남기지 못했다. 진나라 이후에 조금씩 남겨진 그에 대한 기록을 종합하면 대략 이렇다.

 

남양에서 태어난 장중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10여 세쯤 춘추시대의 전설적인 의사인 편작이 제환후의 병을 단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알아내고는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술에 뜻을 두었다. 같은 마을의 장백조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웠는데, 장중경은 실력도 뛰어났고 열의도 지극했기에 장백조는 자신이 평생 배운 의학지식을 그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한편, 장중경은 후한 영제 재위기에 효렴(孝廉)으로 뽑혀 관리가 되고, 헌제 때는 장사의 태수에 임명되었다. 효렴이란 효행과 품행이 뛰어난 사람을 지방의 추천을 통해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인데, 후한 말기에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이 대체로 사라져서 좋은 집안의 자제가 관리가 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볼 때 장중경의 집안이 어느 정도 유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중경의 고향인 남양(난양)에 있는 의성사(醫聖詞). <출처 : (CC) Baiqitun at wikipedia.org>

  

 

하지만, 장중경은 태수가 되어서 귀족놀음이나 하며 편안히 살지 않았다. 당시 장사는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 역병에다 황건적의 난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다. 게다가 190년 이후로는 장중경의 전임 장사 태수였던 손견과 그 후계자들이 형주목 유표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후 조조와 유비까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싸워 바람 잘 날이 없는 고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중경은 세력 다툼에 한몫하기보다 백성을 위한 행정업무를 우선했으며, 시간을 내어 직접 백성들의 병을 진료하고 치료했다. 매달 1일과 15일에는 공무를 전폐하고 하루 종일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래서 그날이면 태수의 관저 앞이 백성들로 메워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환자를 대하며 얻은 의학지식과 옛 문헌에 나타난 지식을 비교하고 종합하며 자신의 의학을 완성해 갔다.

 

그는 ‘건안칠자(建安七子)’, 즉 헌제 시대에 이름을 날린 일곱 명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왕찬과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하루는 그가 왕찬을 만나 보니 안색에 병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왕찬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오석탕을 빨리 들게. 그렇지 않으면 마흔 살쯤 되어 눈썹이 떨어지게 될 걸세. 그때가 되면 약도 듣지 않고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 서둘러야 하네.” 하지만, 왕찬은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 장중경의 말을 듣지 않았고, 끝내 40이 되자 눈썹이 떨어지더니 187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어떻게 일생을 마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전설에 따르면 장사 태수를 그만두고 의술에 전념하기로 하고 귀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추위로 병들고 귀에 동상을 입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귀 모양의 만두인 교이(娇耳)를 빚고 특별한 약재를 넣어 먹이니 모두들 완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동지가 되면 교자 물만두를 먹는 것이 풍속이 되어 나중에는 전 중국으로 퍼졌으며, 제갈량이 통만두의 시조이듯 장중경은 물만두의 시조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평생의 의술 성과를 집약해서 [상한잡병론](상한졸병론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책을 써냈다. 이를 읽은 화타가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책”이라고 감탄했을 만큼 당대에 이미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원본은 전란 통에 유실되었고, 장중경의 제자인 왕숙화가 진(晉)왕조의 태의를 지내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정리해 펴냈다. 하지만, 이 역시 유실되고 말았으며, 지금 우리가 보는 장중경의 저서는 북송 때 고보형, 손기, 임억 등이 정리해 펴낸 내용이다.

 

 

모호한 개인사


이처럼 장중경 개인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불분명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의 생애를 놓고 여러 논쟁이 있었으며 심지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있어왔다.

 

도대체 생몰연대부터 불분명하다. 여러 관련 기록 사이를 재고 맞춰 얻은 “150년경 태어나 220년경 죽었다”는 설이 많이 통용되고 있으나 다른 주장도 많다. 그의 이름도 불확실하다. [상한론] 서문 말미에는 “한나라 장사 태수인 남양 사람 장기 지음(漢長沙守南陽張機著)”이라는 문장이 있어서 그의 본명은 장기(張機)이고 중경은 자(字)라는 설이 생겼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서 후한의 장사 태수 중 장기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장중경으로 보기에 가장 그럴듯한 사람은 손견이 죽은 후 198년부터 200년까지 장사 태수를 지낸 장선(張羨)인데, 그는 남양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어 장선 이야말로 장중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선은 건안 5년인 200년에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건안 이래로 십 년이 채 되지 않아”라는 [상한론] 서문과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장중경은 장사 태수가 아니라 한낱 의사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밖에도 그의 [상한론] 역시 원본이 소실된 지 한참 만에 편집된 책이므로 어디까지가 실제 장중경이 쓴 부분인지 알 수가 없고, 제자 왕숙화가 태반을 썼다거나 이후 세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그래서 장중경이라는 사람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설까지 있지만, 그의 추정 생존연대의 거의 직후에 진나라 태의 왕숙화, 진나라 학자 황보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장중경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그렇게까지는 보기 어렵다. 다만, 그가 정말 장사 태수였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회적 모순과 환경적 재앙이 겹치던 난세, 백성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관리와 선비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며 절망했던 민중들 사이에서 “묵묵히 사람 살리기에 전념하는 의사 태수”의 상이 그려지고, 그것이 실존인물 장중경에게 겹쳐지며 전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상한론의 중요성


그러면 [상한론]은 무엇 때문에 당대부터 지금까지 동양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을까?

 

먼저 기존의 ‘북의(北醫)’에 대해 ‘남의(南醫)’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의의가 있다. 북의란 중국문명의 본고장인 황하 유역 일대에서 수립된 의술로, 침과 뜸을 위주로 했다. 반면 진, 한대에 들어와 개발된 양자강 유역에서는 북부에 비해 기후도 다르고, 자연환경도 달랐다. 그리하여 약초를 위주로 처방하는 본초학이 발전했는데 이것을 민간요법을 넘어서 의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 남의이며, 중국 남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한론]이 바로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남조와 송나라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 주진형에 이르면 남의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에 이른다.

 

또한, [상한론]이야말로 “병을 이해하는 책”을 넘어 “병을 치료하는 책”으로써, 실용적인 의서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의 의술은 [황제내경]을 중심으로 했는데, 장중경 자신도 [황제내경]을 참고로 책을 썼다고는 했지만 [황제내경]의 경우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신체의 여러 부위와 해당하는 질병의 병리를 해설하는 것을 중심으로 했고, 실제로 그런 병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 증상별로 어떻게 병세를 판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반면 [상한론]은 병의 증상을 태양(太陽), 양명(陽明), 소양(少陽), 태음(太陰), 소음(少陰), 궐음(厥陰)의 6경(經)으로 구분하고, 이에 맞추어 각기 다르게 치료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때 6경이란 병세가 신체에 얼마나 침투했는지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열병이라 해도 미열이 나는 경우와 오한이 나고 근육통이 나는 경우가 다르다. 게다가 남/녀, 노/소, 허약체질 여부 등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열병이라면 무조건 해열제를’ 하는 식의 단편적인 처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증상을 보고 병을 맞추는 진단법도 8강(綱), 치료법도 8법(法)으로 나누었다.

 

이는 장중경 스스로 환자의 증상별로 세심히 진단을 하지 않으면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격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생사를 구별하는 안목을 갖추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했듯, 책만 줄줄 읽고 도식적인 판단을 하기보다 직접 발로 뛰며 몸으로 겪어야 병을 이해하고 환자를 도울 수 있다는 절실한 체험에서 비롯된 원칙이었다. 그리하여 동양의학의 원조는 [황제내경]이지만 의학이 널리 활용될 수 있게 한 것은 [상한론]이라고 한다. 장중경은 다양한 치료법 중에 일종의 좌약을 삽입하는 요법과 인공호흡과 비슷한 방법까지 들고 있는데, 이것도 책에서 깨달은 내용이 아니라 환자들을 숱하게 접해 보고, 다양한 민간요법 등을 참고한 결과 얻은 치료법들이다.


가장 오래 된 중국의 의학서 [황제내경]
<출처 : wikipedia.org>

 

 

‘육경’에서 ‘사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상한론]이 처음 언급된 것은 신라 진평왕 27년인 605년이며 일본에도 당나라에서 건너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장중경의 의학이 중세 동아시아를 풍미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볼 수 있는 [상한론]은 송대 이후의 것이며, 그 해석도 주해서에 따라 6경 중심으로 보기도 하고, 본초 중심으로 보기도 하여 혼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상한론]을 가장 열심히 연구하고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은 사람은 동무 이제마를 꼽는다. 그는 [동의수세보원]에서 의학의 맥이 장중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으며, 장중경의 6경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라기보다 체질별로 특수하게 나타난다는 발상에서부터 사람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나누어 보는 ‘사상의학’을 수립하였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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