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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중경은 태수가 되어서 귀족놀음이나 하며 편안히 살지 않았다. 당시 장사는 거의 해마다 일어나는 역병에다 황건적의 난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다. 게다가 190년 이후로는 장중경의 전임 장사 태수였던 손견과 그 후계자들이 형주목 유표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후 조조와 유비까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싸워 바람 잘 날이 없는 고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중경은 세력 다툼에 한몫하기보다 백성을 위한 행정업무를 우선했으며, 시간을 내어 직접 백성들의 병을 진료하고 치료했다. 매달 1일과 15일에는 공무를 전폐하고 하루 종일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래서 그날이면 태수의 관저 앞이 백성들로 메워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환자를 대하며 얻은 의학지식과 옛 문헌에 나타난 지식을 비교하고 종합하며 자신의 의학을 완성해 갔다.
그는 ‘건안칠자(建安七子)’, 즉 헌제 시대에 이름을 날린 일곱 명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왕찬과 사이가 각별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하루는 그가 왕찬을 만나 보니 안색에 병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왕찬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오석탕을 빨리 들게. 그렇지 않으면 마흔 살쯤 되어 눈썹이 떨어지게 될 걸세. 그때가 되면 약도 듣지 않고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 서둘러야 하네.” 하지만, 왕찬은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 장중경의 말을 듣지 않았고, 끝내 40이 되자 눈썹이 떨어지더니 187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어떻게 일생을 마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전설에 따르면 장사 태수를 그만두고 의술에 전념하기로 하고 귀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추위로 병들고 귀에 동상을 입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귀 모양의 만두인 교이(娇耳)를 빚고 특별한 약재를 넣어 먹이니 모두들 완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동지가 되면 교자 물만두를 먹는 것이 풍속이 되어 나중에는 전 중국으로 퍼졌으며, 제갈량이 통만두의 시조이듯 장중경은 물만두의 시조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는 평생의 의술 성과를 집약해서 [상한잡병론](상한졸병론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책을 써냈다. 이를 읽은 화타가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책”이라고 감탄했을 만큼 당대에 이미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원본은 전란 통에 유실되었고, 장중경의 제자인 왕숙화가 진(晉)왕조의 태의를 지내면서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정리해 펴냈다. 하지만, 이 역시 유실되고 말았으며, 지금 우리가 보는 장중경의 저서는 북송 때 고보형, 손기, 임억 등이 정리해 펴낸 내용이다.
모호한 개인사
 이처럼 장중경 개인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불분명한 부분도 많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의 생애를 놓고 여러 논쟁이 있었으며 심지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있어왔다.
도대체 생몰연대부터 불분명하다. 여러 관련 기록 사이를 재고 맞춰 얻은 “150년경 태어나 220년경 죽었다”는 설이 많이 통용되고 있으나 다른 주장도 많다. 그의 이름도 불확실하다. [상한론] 서문 말미에는 “한나라 장사 태수인 남양 사람 장기 지음(漢長沙守南陽張機著)”이라는 문장이 있어서 그의 본명은 장기(張機)이고 중경은 자(字)라는 설이 생겼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서 후한의 장사 태수 중 장기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장중경으로 보기에 가장 그럴듯한 사람은 손견이 죽은 후 198년부터 200년까지 장사 태수를 지낸 장선(張羨)인데, 그는 남양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어 장선 이야말로 장중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선은 건안 5년인 200년에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건안 이래로 십 년이 채 되지 않아”라는 [상한론] 서문과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장중경은 장사 태수가 아니라 한낱 의사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밖에도 그의 [상한론] 역시 원본이 소실된 지 한참 만에 편집된 책이므로 어디까지가 실제 장중경이 쓴 부분인지 알 수가 없고, 제자 왕숙화가 태반을 썼다거나 이후 세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그래서 장중경이라는 사람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설까지 있지만, 그의 추정 생존연대의 거의 직후에 진나라 태의 왕숙화, 진나라 학자 황보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장중경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그렇게까지는 보기 어렵다. 다만, 그가 정말 장사 태수였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회적 모순과 환경적 재앙이 겹치던 난세, 백성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관리와 선비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며 절망했던 민중들 사이에서 “묵묵히 사람 살리기에 전념하는 의사 태수”의 상이 그려지고, 그것이 실존인물 장중경에게 겹쳐지며 전설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상한론의 중요성
 그러면 [상한론]은 무엇 때문에 당대부터 지금까지 동양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을까?
먼저 기존의 ‘북의(北醫)’에 대해 ‘남의(南醫)’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의의가 있다. 북의란 중국문명의 본고장인 황하 유역 일대에서 수립된 의술로, 침과 뜸을 위주로 했다. 반면 진, 한대에 들어와 개발된 양자강 유역에서는 북부에 비해 기후도 다르고, 자연환경도 달랐다. 그리하여 약초를 위주로 처방하는 본초학이 발전했는데 이것을 민간요법을 넘어서 의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 남의이며, 중국 남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한론]이 바로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남조와 송나라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 주진형에 이르면 남의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