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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시작 - 누구의 발상일까?

작성자도현|작성시간12.06.06|조회수328 목록 댓글 0

근대올림픽 탄생이 프랑스의 귀족 출신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남작의 독창적인 발상에서만 나온 것일까? 적어도 100년 이상 이런 믿음이 언론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그리고 무엇보다 쿠베르탱 자신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돼왔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리기 전, 아테네에서 비록 국내대회이지만 올림픽이 3차례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영국에서도 역시 국내대회로 올림픽이 한 차례 열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출범된 뒤에도 1904년 세인트루이스올림픽과 1908년 런던올림픽 사이인 1906년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는 점도 항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근대올림픽은 이렇듯 공식적인 출범 이전과 이후에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근대올림픽을 노래한 최초의 시인

시인 파나요티스 수초스 <출처: Wikipedia>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문화였다. 로마제국의 통치에 들어간 뒤에도 올림픽은 여전히 강세를 보였지만 마침내 이교도의 문화로 배척돼 4세기경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19세기말 부활됐다. 1500년이나 지난 이 고대의 스포츠를 과연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부활시키려 했을까?

 

그리스에서 최초로 근대 올림픽의 꿈을 선언한 시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나요티스 수초스(Panagiotis Soutsos, 1806~1868)다. 1832년은 그리스가 오랜 외압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 발돋움한 해이다. 그러니 많은 그리스의 지식인 계층은 이전엔 모두 국외로 추방됐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수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리와 파도바, 루마니아를 전전하던 그는 오토 1세가 그리스의 근대적 독립국가의 수도로 삼은 나폴리로 돌아왔다. 그리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르네상스도, 계몽주의시대도 거치지 못했고, 나아가 사회기반시설이나 제도, 정부의 조직까지 모든 것들이 엉성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더선>이라는 신문사를 창간한 수초스 역시 다른 모든 그리스의 지식인들처럼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재현해 그리스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1833년 그는 자신의 시에서 플라톤의 영혼을 빌어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재현을 노래했다. 그리곤 1835년 이런 시상에 바탕을 둔 아이디어를 담은 고대올림픽의 부활을 국가에 제안했다. 1842년엔 오토 1세에게 청원하는 출판물을 냈고, 1845년엔 아테네의 수천 명의 대중들에게 이런 내용을 설파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1856년까지, 23년이나 줄기차게 지속됐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올림픽 : 자파스올림픽

에방겔리스 자파스(Evangelis Zappas, 1800~1865)는 그리스 독립전쟁 참전용사이며, 박애주의자, 사업가였다. 생애 대부분을 루마니아에서 보낸 그는 동부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한사람으로 성공했는데, 수초스가 주장해온 고대올림픽의 부활에 대한 생각을 접하고는 1856년 그리스 정부에 강력하게 이 내용을 탄원했다. 마침내 그리스는 1858년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올림픽을 1년 뒤인 1859년에 개최하기로 공식 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국가 부흥의 과제를 실현해야 했기에 농업올림픽과 산업올림픽을 함께 열기로 했다.

 

근대올림픽 출범을 위한 자파스의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제1회 아테네올림픽이 열리기로 한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타전됐지만 세인에 많은 관심을 끌진 못했다. 하지만 영국 웬록(Wenlock)지방에 있는 W.P. 부룩스(Brookes) 박사에겐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이런 모든 소식들을 꼼꼼히 챙긴 그의 상세한 기록들은 근대올림픽이 어떻게 출현하게 됐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자료들이다. 웬록에서 연례적으로 소박한 수준의 운동경기를 개최했던 브룩스 박사는 아테네에서 최초의 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인 1859년 7월에 열린 웬록 올림픽대회를 후원했다. 그는 또 아테네올림픽위원회에 대회 우승자에게 줄 10파운드의 은화를 상금으로 보냈는데, 당시 위원회는 자파스의 상금 외에 영국의 웬록올림픽위원회의 추가 상금도 있다고 발표했다.

 

자파스는 고대올림픽이 열렸던 파나시나이코스 경기장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도록 막대한 발굴비용을 제공했지만, 1859년의 올림픽은 아테네 북쪽 지역에서 개최됐다. 1회 대회는 상금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숙련된 선수들이 부족한데다, 종목도 매우 적어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리스 독립전쟁 참전용사이며 박애주의자였던 사업가 자파스
<출처: Wikipedia>

 

 

브룩스 박사와 영국 올림픽운동

1860년대 브룩스 박사는 올림픽운동을 영국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수행했고, 1859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자신이 보낸 웬록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페트로 벨리사리오우를 웬록올림픽의 최초의 명예회원으로 위촉하며 그리스와 국제교류를 진행시켰다. 이 명예회원 리스트의 맨 마지막 줄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등재됐는데, 이로부터 30년 뒤의 일이다. 어쨌든 웬록올림픽위원회와 그리스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로 하는 자매결연을 맺어 1860년대 올림픽 국제운동의 효시를 보여주었다.

 

이런 국제운동의 여파에 힘입어 마침내 1866년 영국 런던에서 국내올림픽대회가 성공적으로 열리게 됐다. 하지만 당시 귀족 중심으로 꾸려진 아마추어운동클럽(Amateur Athletic Club)은 노동자나 기계공, 공예가들이 돈을 받고 뛰는, 브룩스가 추진하는 올림픽을 반대하며 대부분 참가하지 않았다.   

 

오토 1세에 이어 1862년 왕위에 오른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게 1세는 1865년 세상을 떠나며 올림픽을 위해 막대한 재산을 기증한 자파스의 후원을 바탕으로 1870년 제2회 아테네올림픽을 개최했다. 3만 명이 경기를 관람했고, 1회 대회에 비해 많은 종목이 채택됐으며, 그리스 전국 곳곳에서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크레타 섬에서 온 노동자 출신이 레슬링에서 우승했고, 아테네의 한 도축업자가 200m 달리기에서 1위를 하는 등 당시 참가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대학교수들이 차기 대회에서는 노동자계층은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5년 뒤에 열린 1875년 올림픽은 경기내용과 참가규모에서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자피온의 모습 <출처: Xenos2008 at en.wikipedia.org>

 

 

그리스올림픽위원회는 1888년 초 자피온(Zappeion) 올림픽 빌딩(2004년 아테네올림픽 미디어센터)을 준공한 뒤 가을에 1888년 올림픽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아무런 대회 조직도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스포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된 올림픽위원회는 고대올림픽 부활의 꿈을 살려내지 못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 올림픽 부활의 노력이 무산될 당시, 영국의 브룩스 박사는 아테네에서 국제올림픽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는 런던에 있던 그리스 대사 존 게나디우스 설득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쿠베르탱 남작의 등장

이러는 사이 새롭게 올림픽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다. 그는 어릴 적 조국 프랑스가 프러시아군에 맥없이 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 전 세계 각지를 돌며 강인한 조국의 건설을 위한 체육에 크나큰 관심을 보이다, 마침내 스포츠교육의 내용이 잘 담긴 웬록의 프로젝트를 발견하게 된다. 이게 결국 브룩스 박사와의 만남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쿠베르탱은 자신의 연설에 브룩스 박사의 글들을 인용하기 시작했고, 브룩스 박사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결국 1890년 웬록을 방문했다. 브룩스 박사는 근대올림픽 부활을 기리는 기념식수를 쿠베르탱에게 권했고, 자신의 올림픽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으며, 1859년 자파스올림픽의 우승자 리스트까지 보여주었다. 1866년 런던에서 열린 국가올림픽대회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한 것은 물론이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출처: Wikipedia>


근대올림픽 부활 움직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은 쿠베르탱은 1894년 파리에서 제1회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를 열고, 최초의 근대올림픽 아테네 개최를 확정했다. 쿠베르탱은 또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그리스 문인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Demetrios Vikelas)를 초대 IOC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비켈라스의 헌신적 노력과 당시 콘스탄티네(Constantine) 왕세자의 열성적인 지원, 부호 기오르고스 아베로프(Giorgos Averoff)의 경기장 신축 비용 후원 등에 힘입어 1896년 아테네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하지만 브룩스 박사는 대회가 열리기 석달 전 수초스와 자파스가 있는 저 세상으로 합류하면서 근대올림픽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장면을 볼 수는 없게 됐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근대올림픽은 수초스 시인의 최초의 제안, 자파스 부호의 재정적 지원, 문인 비켈라스의 가세, 그리고 무엇보다 콘스탄티네 왕세자의 지칠 줄 모르는 성원 등이 숨겨져 있다. 나아가 그리스의 바깥 세상에서는 영국의 브룩스 박사가 처음으로 국제스포츠대회에 대한 이상을 그리고 있었고, 직접적으로는 그리스, 쿠베르탱과 구체적인 교류를 통해 국제올림픽운동을 전개했다.

 

 

고대 올림픽의 탄생

앞서 살핀 대로 근대올림픽은 바로 고대올림픽의 부활을 뜻한다. 그런데 왜 ‘올림픽’일까? 이는 올림픽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에 이것 말고도 다른 운동축제들이 있었으며, 이 중 올림픽이 채택돼 근대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최초의 올림픽이 열린 기원전(B.C.) 776년 당시엔 4년마다 열렸던 올림피아의 올림피아경기, 델피의 피티아(Phthia)경기, 2년마다 열렸던 아르골리스의 네미아(Nemia)경기, 코린트의 이스트미아(Isthmia)경기가 그리스의 4대 제전경기였다. 아테네 도시국가의 권력가(정치인)이자 시인인 솔론(Solon)이 올림픽 승리자에게 500드라크마(drachmas : 고대 그리스 화폐단위)를 주고, 이스트미아의 승리자에겐 100드라크마를 준 기록은 당시 올림픽이 더 중요했고 번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4년마다 열렸던 피티아경기가 더 번창했고, 그게 근대 서양으로 이어졌다면 우린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아니라 서울피티언대회를 개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림픽은 제전이 열렸던 곳의 이름이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Peloponesus) 반도 서쪽 이오니아해에 인접한 엘리스(Elis) 남쪽에는 알페우스강 유역의 평원이 펼쳐진 고대 그리스의 성지 올림피아(Olympia)가 있다. 1875년 독일 고고학자 에른스트 쿠르티우스(Ernst Curtius)가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24살이던 1838년에 이곳을 처음 방문한 뒤, 37년 뒤인 1875년에 제우스(Zeus) 신전(BC 2500년)과 제우스의 아내 헤라(Hera) 신전 등을 발굴했다. 쿠르티우스의 고고학 작업이 결국 근대올림픽 태동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나체의 제전경기

올림피아 제전경기 최초의 우승자로 기록된 코레아부스(Coreabus)는 엘리스의 요리사로 관중 앞에서 나체로 1스타데(Stade : 185m)를 뛰었다. 이 제전에 참가하려고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엘리스 짐나지움 테스트에 합격하면 엘리스에서 10개월간 나체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고대 그리스의 모든 조각상들이 나체였던 점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단거리 달리기로 시작된 올림피아는 2스타데의 디아우로스(diaulos), 5㎞가량의 장거리인 도리코스(dolichos)가 추가됐고, 5종 경기(제자리 멀리뛰기-창던지기-달리기-원반까지 마쳐 마지막 남은 2명의 레슬링 경기로 우승자를 가림), 전차경기와 경마경기, 권투와 레슬링을 혼합한 지금의 격투기와 비슷한 판크라티온(Pancration) 등이 대표적이다. BC 632년이 되면 소년들이 달리기와 레슬링으로 처음 등장하며, BC 616년 소년 권투에 이어 BC 200년이 되면 소년들의 판크라티온 경기가 벌어졌다.

 

판크라티온 경기 모습 <출처: Marie-Lan Nguyen en.wikipedia.org>

 

 

5종 경기가 도입된 뒤 6.8㎏짜리 돌 원반이나 금속 원반을 멀리 던지는 경기는 가장 인기가 높았고, 기록이 좋으면 훌륭한 선수로 평가 받았다. 권투경기는 처음 손에 가죽 끈을 감았다가 둥근 쇠고리를 끈으로 주먹에 달고 했으며, 쇠주먹(Knuckle)을 끼기도 했다. 14㎞를 달리는 전차경기의 기수만 옷을 입었고, 승리의 영광은 전차 또는 말의 소유자에게 돌아갔다. 노예가 참여한 유일한 경마경기는 안장이나 등자 없이 맨발로 탔고, 노예의 주인에게 올리브관이 돌아가고, 선수에겐 무명 머리띠를 매어주었다.

 

 

우승자의 영광, 고대 올림픽의 종말

우승자는 영웅으로 추대돼 세 번 우승하면 올림피아 성림에 조각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세금 면제와 선물, 명예가 뒤따랐다. 우승자가 도시국가로 돌아올 때 성벽 일부를 허물어 통과시키는 의식은 우승자를 보유한 도시가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용맹성의 과시였다. 우승자에게 나뭇잎으로 만든 관이 돌아갔는데, 올림피아는 올리브관, 이스트미아가 솔잎관, 피티아가 월계관, 네미아는 파슬리관이었다.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지는 현대 올림픽의 월계관은 피티아경기에서 온 것이다.

 

대표적인 영웅으로는 BC 6세기 레슬링에서 6번 우승한 크로톤 출신의 밀로(Milo)는 송아지를 매고 연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BC 408년 판크라티온 우승자 데살리 출신의 폴리다마스(Polydamas)는 맨주먹으로 사자를 때려눕히고, 한 손으로 전차를 세울 만큼 힘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타소스 출신의 데아게네스(Theagenes)는 권투, 달리기, 판크라치온 등에 출전해 1400번 우승관을 받았다고 한다.

 

여자는 선수로 참가할 수도 없었고, 경기도 구경할 수 없었다. BC 360년 로데스의 칼리파테이라(Kallipateira)는 남장을 해 자신의 아들이 출전한 권투경기를 몰래보다 아들이 우승하자 감격해 달려 나갔다가 여자신분이 들통 나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디아고라스(Diagoras)가 BC 464년 권투챔피언으로 널리 칭송받던 터여서 다행이 목숨을 건졌다. 오로지 올림피아 입장이 허용된 유일한 여자는 풍요와 농업, 결혼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의 여제사장뿐이었다.

 

BC 2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뒤에도 올림픽은 계속 열렸다. 그러나 고대올림픽의 종말은 기독교의 등장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393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ous) 1세는 기독교로 개종한 뒤 올림픽을 무종교로 간주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폐지를 명했다. BC 776년부터 AD 393년까지 제293 올림피아드를 끝으로 1069년의 역사가 마감됐다. 데오도시우스 2세는 불가사의한 그리스의 유적인 제우스와 헤라 신전을 해체해 올림픽의 흔적을 말살했다. 고대 올림픽은 고고학자 크루티우스의 1875년 발굴까지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방광일 엮음, [아테네에서 아테네까지], (홍경, 2005); 허복, 오동섭, [올림픽 정치사], (보경문화사, 1985); 허복, [올림픽 경기사], (동양문화사, 1982); David Young, [From Olympia 776 BC to Athens], 2004; Christopher R. Hill, [Olympic Politics, Athens to Atlanta 1896~1996],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6)

 

 

 

권오상 / 한겨례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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