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은 경건의 희생적 차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열매는 자기 부인이며, 그것은 다음을 포함한다.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따라 그분께 대하여 살고 그분께 대하여 죽는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중세 수도원주의에서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마귀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2.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주님의 것들을 추구하려는 소원이다. 자기 부인은 교만과 음란과 세속성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사랑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전체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3.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이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우리 자신보다 낫게 여기도록 준비된다. 이것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다툼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뿌리 뽑고, 온유와 도움의 영으로 대체한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그들을 돕는 데 있어서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자원의 한계일 뿐이다.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 완성에 관하여 복음이 약속하는 것들에 의해 자기 부인 안에서 인내하도록 격려받는다. 그러한 약속들은 자기 포기를 반대하는 모든 장애물을 이기도록 우리를 돕고, 역경을 견디도록 우리를 돕는다.
더 나아가 자기 부인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맞는 일을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행복은 그 원리가 회복된 결과이다. 칼빈이 말하듯이, 자기 부인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으나 참된 행복의 한 조각도 소유하지 못할 수 있다.
# 십자가를 짐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께 대한 내적인 일치를 중점으로 한다면, 십자가를 짐은 외적인 그리스도 닮음에 중심을 둔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자들은 여러 종류의 악으로 가득 찬 힘들고 고된 삶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이 타락한 세상에 미친 죄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끊임없는 십자가였기 때문에, 우리의 삶도 또한 고난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속죄 사역의 유익에 참여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사역도 경험한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경건을 시험한다고 말한다. 십자가를 짐을 통하여 우리는 소망으로 일깨워지고, 인내 안에서 훈련받으며, 순종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교만 안에서 징계를 받는다. 십자가를 짐은 우리의 약이자 우리의 징계이다. 그것은 우리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기쁘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심지어 박해와 관련된 고난도 위로와 복으로 변화시키신다.
#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
십자가를 짐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의 복과 비교할 때 현재의 삶을 멸시하는 법을 배운다. 이 삶은 장차 올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연기나 그림자와 같다. 칼빈은 묻는다.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땅은 우리의 유배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결론짓는다. “죽음과 최후의 부활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보한 사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설명할 때 ‘complexio oppositorum’, 곧 대립되는 것들의 결합을 사용하여,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제시하고 그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는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십자가를 짐은 우리를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을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다. 다른 한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이 현재의 삶을 즐긴다. 다만 마땅한 절제와 중용으로 즐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좋은 문학, 좋은 음식,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형태의 세속적 과잉을 거부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닮은 절제로 부름받았다. 그것은 겸손, 신중함, 과시의 회피, 그리고 자기 처지에 대한 만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장차 올 생명의 소망이 현재의 삶에 목적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삶은 언제나 더 나은 하늘의 삶을 향하여 뻗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주시는 선물들을 즐기면서도 지나친 탐닉의 올무를 피하는 올바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 칼빈은 네 가지 지도 원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께서 모든 선하고 완전한 선물의 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라. 이것은 우리의 정욕을 억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그것들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적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면, 지나친 욕망에 얽매이지 않도록 우리의 가난을 인내로 견뎌야 함을 이해하라.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세상의 청지기임을 기억하라.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계해야 할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과 그분의 섬김으로 부르셨음을 알라. 그 부르심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섬김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주의 깊고 자비로운 눈 아래서 우리의 과업들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 순종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은 경건의 본질이다. 경건은 사랑과 자유와 훈련을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아래 복종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사랑은 경건이 율법주의로 타락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포괄적 원리이다. 동시에 율법은 사랑의 내용을 제공한다.
경건은 신자의 반응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포함한다. 사적으로 그 규칙들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짐의 형태를 취한다. 공적으로 그것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행했던 것처럼 교회 권징의 실행으로 표현된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영광이 훈련된 순종을 강권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약하거나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 선수, 부지런한 학자, 또는 영웅적인 전사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서 순종을 추구하는 데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여기에 순종의 참된 증거가 있다. 곧 우리 자신의 애정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며, 우리의 삶이 그분의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도록 허용하여, 우리에게 가장 쓰고 가혹한 것들이라도 그것들이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달콤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달콤한 순종”과 같은 표현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I. 존 헤셀링크에 따르면,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주석들, 설교들, 논문들에서 경건한 삶을 묘사할 때 “달콤한”, “달콤하게”, “달콤함”과 같은 단어들을 수백 번 사용했다. 칼빈은 율법의 달콤함, 그리스도의 달콤함, 역경과 박해 가운데 있는 위로의 달콤함, 기도의 달콤함, 주의 만찬의 달콤함,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제안의 달콤함,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달콤함에 대해 쓴다.
그는 또한 선택의 달콤한 열매에 대해서도 쓴다. 그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과 그 모든 영광은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과 장차 올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는 것은 우리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베소서 1장 4절.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매우 달콤한 열매를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결코 분명히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