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11시. 주말의 느긋함을 누리며 방에 누워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친구였다. 어디냐는 물음에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광주 보훈병원'이라 답했다. 늘 신뢰하던 친구였기에 그 유약한 목소리가 더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마음속에 불이 난 듯 다급해져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문득 3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 K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 서독안경점을 하며 늘 함께 탁구를 치던 다정한 이였다. 그 역시 보훈병원에 간다고 하더니 몇 달 후 부고를 보내왔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문상조차 가보지 못해 늘 마음의 가시로 남아 있던 터였다. 그런데 또 다른 친구가 하필 보훈병원이라니. 이번에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았다.
아내에게 "친구 L이 입원해서 문병 다녀오겠다"고 하니 아내도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홀몸으로 아파하고 있을 친구에게 아내까지 데려가는 것이 행여 부담이 될까 싶어 혼자 가기로 했다. 아내의 배려로 곧장 공용버스터미널로 가 11시 45분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출발 5분 전이었다. 혹여 버스를 놓칠까 평소 들르던 화장실도 생략한 채 서둘러 탑승했다.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으니 한 시간이면 도착하리라 믿었지만, 오판이었다. 도로 위에서 두 시간이 넘게 지체되었다. 아침을 먹고 화장실도 못 간 탓에 광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변 신호가 왔다. 사색이 되어 이를 악물고 버틴 끝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화장실을 찾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아 애가 탔다. 겨우 찾아 일을 보고 나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처음 가보는 보훈병원을 찾기 위해 택시를 탔다. 토요일인 데다 신세계백화점 주변 개발로 인한 교통 체증 탓에 병원까지 또 한 시간이 걸렸다. 그 옛날 내가 고등학교와 군대를 다닐 적엔 광산군의 한적한 시골이었던 곳이 눈부신 신시가지로 변해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후라 사방이 고요했다. 입원실 로비에서 간호사에게 친구 L의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황당하게도 그런 환자가 없다는 말이었다.
기가 막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 지금 어디 있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여수 동인병원"이었다.
허탈함과 분노가 치밀었다. 점심도 굶고 천신만고 끝에 택시까지 타며 이 먼 길을 왔는데. 당장이라도 화를 내고 싶었지만, 노년에 좋은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다시 택시와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오전 11시에 나선 길인데, 여수 동인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되어 있었다. 온종일 굶은 채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친구를 마주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에게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준비해 간 쾌유 봉투만 전하고 돌아섰다.
집에 오니 아내가 고생했다며 위로해 준다. 오늘 있었던 황당한 소동을 다 이야기하면 나도, 친구도 바보가 될 것 같아 "문병 잘하고 왔다"며 좋은 말로 둘러댔다. 하지만 불쾌한 속내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여수라고 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것 아닌가. 왜 정직하지 못했을까. 의심은 꼬리를 물고 수수께끼처럼 남았다.
이유 불문하고 거짓말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씁쓸한 마음 위로, 거짓말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양치기 소년의 우화가 오래도록 맴도는 하루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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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시간 26.06.21 new
황당한 일을 겪으셨군요.
소변이 마려운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임박하여
2간여를 참고 버스안에서 벼티셨다는 대목애서
제가 더 긴장을 했습니다.
그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간 보훈병원 .
입원한 곳이 달랐다니 어터구니가 없습니다.
새샘 신의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
작성자仁齊 김권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1 new
새샘 신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세상 살다보니 이런 일을 당했구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배신감 마저 들었고 괘씸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결코 L은 얍사한 녀석은 아니라 믿어서 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삶이 善한 씨앗을 심어서 입니다. ^^ -
작성자人山 이희순 작성시간 26.06.21 new
동인요양병원이 보훈위탁병원이기에 혹 보훈가족인지 모를 친구분이 그런 뜻으로 대충 알려드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원 병원을 속일만한 이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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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仁齊 김권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56 new
동인요양병원이 보훈위탁병원은 맞았습니다. 그런데 여수에 있으면서 광주보훈병원에 입원하고 있다고 했으니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만나러 간다고 했으면 솔직하게 말해야지 이만저만 분통이 터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ㅜ 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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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人山 이희순 작성시간 09:04 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