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일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축시(丑時), 아내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낯선 사람이 자신의 발을 짓밟아 꼼짝할 수 없었노라 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몸이 굳어버렸다고 했다. 혹시라도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CT를 찍고 심전도 검사를 받았지만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영양주사 한 대를 놓아주었고,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아내는 또다시 누군가 집 밖에서 자신을 부른다며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 포켓볼을 함께 치며 가깝게 지내던 K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수화기 너머의 K는 "절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고, 아내는 그 말에 안심했는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에게 숨긴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아내가 K에게 건넨 이야기는 위로와 공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가벼운 화젯거리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찾아간 포켓볼장에는 이미 아내의 꿈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수군거렸고, 아내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취급했다. 한 사람의 두려움과 불안이 누군가에게는 웃음거리로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탁구와 포켓볼을 함께 치는 Y라는 사람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나를 걱정하는 척하며 꺼낸 이야기는 며칠 전 K가 퍼뜨린 바로 그 내용이었다.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말이었다. 좋은 말은 사람의 마음을 북돋우지만, 좋지 않은 말은 흐린 물처럼 마음속을 어지럽힌다. 잊힐 만하면 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아내의 소문은 내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후벼 팠다.
남편인 내가 바라보는 아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물론 예전보다 깜빡하는 일이 잦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남긴 작은 흔적일 뿐이다. 오히려 젊은 시절보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을 품을 줄 아는 너그러움과 융통성을 갖게 된 따뜻한 동반자다. 그런데도 K는 그런 아내의 약점을 들춰내어 사람들 앞에 내걸고, 마치 우스운 사람이라도 되는 양 만들어 버렸다. 그 얄팍한 처사가 원망스럽고 분하여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다. 두렵고 불안한 일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남편인 내게 기대어도 되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사람을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을까. 순한 사람일수록 사람을 쉽게 믿고, 믿은 만큼 상처도 깊이 받는 법이다.
사실 요즘 아내의 건망증은 예전보다 심해졌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예전에 살던 집의 출입을 위해 우리는 열쇠를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두 번이나 새 열쇠를 받아 갔다. 얼마 전에는 세 번째로 열쇠를 잃어버리고는, 오히려 왜 자기에게 열쇠를 주지 않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새 열쇠를 건네며 인수증 한 장을 받아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또다시 열쇠를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말없이 보관해 두었던 인수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종이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과 서명을 바라보던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만약 그 인수증이 없었다면, 나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변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아내에게는 조금씩 지워져 가는 기억의 빈자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도 함부로 조롱받거나 수모를 당할 이유는 없다. 내 자매들과 제수들을 모두 떠올려 보아도, 아내만큼 순하고 착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팔불출이라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내의 맑고 정직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마음은 오히려 내가 본받고 싶을 만큼 귀하고 아름답다.
아내는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냈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며 살아왔다. 현재 팔순을 살고 있지만 내가 거동이 불편해질 때에도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곁을 지켜 줄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착한 심성과 깊은 정을 알기에,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세월 속에서 조금씩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아오며 쌓아 온 선한 마음과 진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내의 잊혀 가는 기억보다, 여전히 변함없이 남아 있는 그 맑은 영혼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세상의 가벼운 입방아와 냉담한 시선으로부터 아내를 지켜주고 싶다. 순진하고 무구한 그 영혼이 더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말없이 아내의 곁을 지킨다. 세상이 등을 돌린다 해도, 나는 끝내 아내를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만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2026. 6.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시간 26.06.22 new
별 이상이 없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이 많이 신경써 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仁齊 김권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2 new
저나 아내나 노후화가 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사람에게 얘기를 해
웃음거리가 된 것이 서글퍼집니다. -
작성자人山 이희순 작성시간 1시간 23분 전 new
믿을만한 사람이라 여겨 이야기하셨을 터인데 참 무엇하군요 세상이 그렇고 그렇지요 너무 상심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사모님을 향한 선생님의 지극하신 마음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