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 드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이었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벗 삼아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전날 곱배기 칡냉면과 간밤 야식으로 먹은 고구마와 감자가 뒤늦게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양심도 체면도 모르는 방귀가 연신 터져 나왔다. 다행히 길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든든한 공범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남은 가스까지 시원하게 털어내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복합운동장을 다섯 바퀴쯤 돌았을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아랫배 깊은 곳에서 묵직하고도 다급한 신호가 울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소변만 보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급히 운동장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나는 결국 근처 풀밭으로 뛰어들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이었지만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허둥지둥 뒤처리를 마친 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주머니를 뒤적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핸드폰이 없었다.
혹시 집에 두고 나왔나 싶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지만, 신호음만 갈 뿐 집 안은 적막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길에서 흘렸구나.’
온갖 연락처와 사진, 카드가 들어 있는 핸드폰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손전등을 꺼내 들고 다시 빗길로 나섰다.
새벽의 어둠은 여전히 짙었다. 손전등 불빛으로 풀숲을 샅샅이 훑던 그때, 검은 풀잎 사이에서 낯익은 액정 하나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얼씨구나, 찾았다!”
절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허리띠 지갑 틈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고무밴드로 단단히 묶으며 혼자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니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깨달았던 순간의 아찔함이나, 조금 전 길거리에서 큰일을 치를 뻔했던 난감함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진땀 나게 만드는 일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없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손때 묻은 손전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십 년 전 사두고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강산이 변할 세월 동안 서랍 속에서 잠만 자던 녀석이 오늘 새벽에는 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핸드폰을 찾아주었다. 물건의 가치는 쓰이는 순간에 비로소 드러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거실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이 못째 뽑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사실 예전부터 달력은 말썽이었다. 마트에서 산 접착식 고리는 바람만 불어도 떨어지기 일쑤였다. 직원에게 하소연했더니 전동 드릴로 튼튼하게 못을 박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평생 한두 번 쓸까 말까 한 공구를 사는 일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남자가 돼가지고 달력 거는 못 하나 제대로 못 박아서 어디다 쓰우?”
그 말에 괜히 자존심이 건드려졌다.
문득 손자가 사달라고 졸라 샀던 비싼 장난감들이 떠올랐다. 몇 번 갖고 놀지도 못한 채 쓰레기봉투 속으로 들어간 것들. 그에 비하면 전동 드릴은 살아 있는 동안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생활 도구가 아닌가. 마침 몇 년째 고장 난 채 방치된 욕실 수건장 경첩도 있었다.
문제는 아내였다.
“이제 와 팔순 나이에 뭣 하려고 그런 걸 사요?”
그 말이 뻔히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새벽에 제 몫을 톡톡히 해낸 손전등을 떠올렸다. 십 년 만에 빛을 발한 손전등처럼, 전동 드릴도 언젠가는 값어치를 해낼 것이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결국 나는 아내 몰래 일을 저질렀다.
며칠 뒤, 손자 장난감 상자만 한 전동 드릴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잔소리가 터져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장난감이 아니요. 노인들 치매 예방하는 특수 도구라오.”
아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가운데 드릴 스위치를 눌렀다.
“위이이잉—!”
요란한 기계음이 집 안을 울렸다.
“치매 예방 도구가 뭐 이리 시끄러워요?”
“이 소리가 귀청을 때리면 잠자던 뇌세포가 깨어나는 거요. 치매도 놀라서 도망가고!”
허풍 섞인 설명과 함께 시멘트 벽에 못을 박아 넣자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력은 단단히 제자리를 찾았다. 내친김에 3년 동안 말썽을 부리던 욕실 수건장 경첩까지 고쳐놓았다.
삐걱거리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마침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당신, 아주 일류 기술자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새벽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찾아주던 손전등의 불빛처럼, 아내가 건넨 ‘기술자’라는 한마디가 팔순 노인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돌아보면 오늘 하루는 참 별난 날이었다. 길거리에서 체면을 구길 뻔했고, 핸드폰을 잃어버릴 뻔했고, 느닷없이 전동 드릴까지 사들였다. 하지만 그 모든 소동 끝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쓸모없어 보이던 것들이 어느 날 불쑥 제 가치를 증명하듯, 늙어가는 인생도 아직은 쓸모가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은 괜스레 기분이 좋다. 손전등도, 전동 드릴도, 그리고 팔순의 나 자신도 아직 현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청석 임병식 작성시간 26.06.23 new
“위이이잉—!”
요란한 기계음이 집 안을 울렸다.
“치매 예방 도구가 뭐 이리 시끄러워요?”
“이 소리가 귀청을 때리면 잠자던 뇌세포가 깨어나는 거요. 치매도 놀라서 도망가고!”
허풍 섞인 설명과 함께 시멘트 벽에 못을 박아 넣자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력은 단단히 제자리를 찾았다. 내친김에 3년 동안 말썽을 부리던 욕실 수건장 경첩까지 고쳐놓았다.
삐걱거리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마침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당신, 아주 일류 기술자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현장감 있는 글을 읽으며 저 또한 가슴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
작성자仁齊 김권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전날 냉면과 과자 그리고 고구마 감자를 많이 먹었더니 새벽에 대변이 급하게 나오려고 하여 난감했습니다.
급하게 일을 하다 보니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십 년 동안 묶어 놨던 손전등을 이용하여 찾았습니다.
손전등을 생각하며 그간 숙제로 놨던 벽에 못 박기, 서랍 경칩을 드릴을 사서 고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