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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디자인

작성자Cho Eungi|작성시간03.09.28|조회수408 목록 댓글 0
들어가며
어느새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쓰이는 일상어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서구적이고 奇異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이 단어가 이제 우리의 문제, 우리의 논의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그 이념이 철학적으로 확실히 정립되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는 모더니즘의 발생에 대한 蓋然性이 서구에서처럼 확연하지 않다. 즉 한국 사회는 세계사적 조류에 별로 영향을 받지 못한 제 3 세계적인 면모가 강하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수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발판 없이 상당 부분 수용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이유에 대해서 뒤이어 서술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오게 된 蓋然性과 그 세부적 측면을 관찰한 후 이를 디자인의 측면에서 서술하기로 히겠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Signifie' : 연쇄적 Signifiant
Signifie' 와 Signifiant 는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따른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즘과 뒤이어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겉보기 특성을 지적하는 말로 이보다 더 간단한 말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소쉬르의 이론을 원용한 까닭은 디자인이 일종의 言語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signifie'는 언어의 내적 측면 즉 의미전달구조를 의미한다.반면에 연쇄적signifiant은 언어의 외적 측면이고 청각 영상의 표면적 연쇄를 말한다.
- 모더니즘의 등장과 전성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에 대한 반항운동이며 일종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불린다. 보들레르는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일시적,우연적 측면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멸한 측면이다."라고 말한다. 보들레르의 의견을 따르자면 모더니즘은 겉보기로 이중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모더니즘이 추구하고자 한 것은 두 가지의 합일이다. 즉, 아래 [그림1]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서 보듯, 일시적. 찰나적
[그림1]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그것의 불멸을-즉 그림에서는 시계가 멈추어버린-추구한다. 이 측면에서는 니체의 디오니소스 신화와 베버의 이론의 중간적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원불멸한 본질을 찾는 데 있어 찰나적이고 우연적인 측면을 동원한다면, 필연적으로 과거의 역사 및 정치 문화와는 단절되어 버린다. 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은 이 단절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였으며, "창조적 파괴"란 개념을 도입하여 이것을 합리화시켰다. 아래 그림은 바뜰리에(J.F.Batellier)가 그린 만화로 파리의 새로운 대로문화가 과거의 도시구조를 근대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보여준다.
[그림2] J.F.Batellier 의 만화



















이러한 파괴와 창조라는 모더니즘의 특성은 그 초기 발생단계인 19세기부터 보여졌다. <견고한 것은 모두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것은 세속화되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들의 생활과 자신들의 동료간의 관계에 대한 참된 조건과 맞닥뜨리게 된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진보에 대해서 맹신적이었으며 종국에는 이데아를 향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에 대해서 편집증적인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부르주아 계층으로부터 시작된 모더니즘은 차츰 사회주의와 공리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모더니즘은 1848년이후에 크게 도시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1848 년 이전에는 모더니즘은 아직 계몽 사상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1848 년 이후의 모더니즘은 여러 사상과 개념의 혼재로 인하여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포괄적인 측면에서 이데아를 향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 외에는 간단히 언급이 되지 않는다. 20 세기의 모더니즘은 기계의 발달과 대량 생산과 그 맥을 같이했다고 말할 수 있다.-예술의 측면에 있어서는 기계의 발달이 모더니스트 예술 전반을 지배했다.- 그러나, 기계미학만이 20세기 모더니즘의 전부는 아니었다. Marshall Bermann은 20세기 모더니즘을 보들레르의 거리에서 모더니즘, 페테스부르그의 저개발의 모더니즘, 상징의 숲인 뉴욕에서 모더니즘의 세 가지로 나누었다. 19세기의 모더니즘과 비교한다면 20 세기 모더니즘은 무미건조해졌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들은 산업화와 기계의 고도 발달이 神만이 할 수 있었던 창조작업을 해내는 것에 대해 감탄하고 찬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그 창조작업이 극도로 진행될수록 모든<인간적인>것들을 잃어버리는 데 대하여 괴리를 서서히 느껴갔다. 특히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 나서 모더니즘은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 모던 디자인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 운동 등에 종사한 사람들은 인간 해방 등의 사회적 목표를 위해 합리적인 질서를 설정하고자 하였다.여기서 합리적인 질서란 것은 기술적 효율성이나 기계생산을 가리킨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의 hausbau(집을 짓다)를 도치한 말로 얼핏 들으면 건축교육을 위주로 지어진 학교인 듯 하나, 실제 학교에서 주안점이었던 것은 새로운 사고 방식의 유도였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혁명으로 혼란한 독일에 메시아적 사상을 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로타 슈라리어의 1921년 작 <신은 죽는다:Gott ist tot>를 보면, 그들은 모더니즘을 새로운 신앙 정도로 간주하고 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1924년 경 등장한 슐리크 등의 논리적 실증주의는 갖가지 과학 발전과 연결되어 있던 탓으로 모던 건축의 실천적 제이념과 쉽게 결합하였다.
사상적 모더니즘이 여러 가지 개념의 혼재로 인해 불분명한 특성을 지닌다면 디자인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확연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언어에 있어서 signifie' 의 가중치와 마찬가지 현상이라 설명할 수 있다. 모던 디자인은 몬드리안의 차가운 콤포지션 등에서 나타난 추상성을 진정한 형태의 원형으로 받아들인다. 디자인이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형식적 요소보다 내용적 요소를 중시한 것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와 결합한 이러한 사고 방식들은 이후에 불어닥치는 디자인의 조류에 상당부분 기여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모던 디자인은 세계적 추세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소박한 이데아론에 어느 정도 뿌리를 둔다. 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영원불멸한 것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이것이 디자인에도 예외가 되지 않고 조형의 본질은 결국 누구에게나 있어서 동일하며 영속성을 지닌 것으로 다가오리라고 모던디자이너들은 생각하였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물론 전 시대의 러스킨과 모리스의 조형 사회주의의 영향이 상당히 강한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귀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세계적 추세는 자본을(특히 미국 자본주의의) 기반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상당히 특징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모던예술은 정치에 포섭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논리적 실증주의와 결합된 모던 디자인은 1940년대에 들어서 사회사상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은 사회내 지배계층과 그다지 불편한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기계 문명과 산업 사회가 본격화됨에 따라 바우하우스나 울름의 이론들은 기업자본의 구미에 맞게 되었으며, 모더니즘은 실증주의적, 기술주의적 합리주의적 모습을 띠고 예술의 모던화 보편화는 경제적 모던화 보편화와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이 때 미국이라는 새로운 예술의 토양이 주어졌다. 2 차대전 중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수많은 모던 예술가는 "파괴해 버릴 역사라고 할 것이 없는" 미국에서 "비교적 편하게" 창조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고 전쟁의 결과로 부국이 된 미국에서 실용주의 자본과 결합하여 본격적인 기계시대의 미학을 산출해나가기 시작했다.
모던 디자인은 흔히 육면체의 빌딩숲으로 이루어진 도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이든,파리든,뉴욕이든지 엇비슷한 모습들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모던 디자인이 적용된 많은 공업생산품들은 기능을 중시하여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다. 모던 디자이너들은 몬드리안의 콤포지션의 복제품을 도로, 건물, 전자 제품, 심지어는 밥그릇에까지 담아 놓았다. 기능적 이유가 아닌 심미적 목적에서 행한 장식은 불경시되었으며, 모던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작품이나 사상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는 거의 광신적이었다. 디자인에서는 오로지 signifie' 만이 제작자 이외의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의미를 지는 것이다.
모던 디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기능적 성향이다. 모던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은 물체의 기능을 속성으로 이해했으며 그 결과 디자인의 이데아는 그 기능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정밀하고 정확하며 그들의 이데아를 널리 펼 수 있는 수단이 기계라고 믿게 되었으며 이런 일련의 사고들은 모던 디자이너들을 기계예찬론자로 만들어 버렸다. 모던 디자인은 물질 내에 내재된 이데아는 인간 이성의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범세계적이라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모더니즘이 전파되는 나라는 모두 비슷한 형태의 디자인만 행해지는 것을 원했다. 디자이너들은 유일미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모던의 네모꼴을 국제형식으로까지 발전시켰다.
- 포스트 모더니즘의 출현
" 2 차 대전 당시 나찌 폭격기의 런던 폭격보다 더 비참하게 런던을 망친 개발업자의 횡포"라는 찰스황태자의 말은 런던에 세워진 모던 건축물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말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1970년대 이후에 일어난 여러 사조를 말한다. 특히 건축 부분이 두드러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자체는 모더니즘의 정의가 그랬던 것처럼 확실하게 무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 모더니즘 이후의 사조라는 개략적 고찰과 모더니즘을 반대하기 위한 반모더니즘, 탈모더니즘적 성격에 주안점을 둔 고찰이 있다. 요즘에는 이 두 가지 이론에 대한 兩是的 혹은兩批的이론들이 있다. 포스트모던이 사상적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다른 것, 자신 이외의 것(The Otherless)관한 문제제기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인간이성에 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상호텍스트성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전자의 양 이론은 주로 思想的인 見地에서 많이 이룩되었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의 연속성 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관점은 하버마스와 제임슨에게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에 대한 진보로 이해하려는 측면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다른 한 견해는 리오타드와 후이센의 주장이 있으며 포스트모던에서 커다란 변혁적인 측면을 찾고자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벗어났건, 혹은 계승했건 간에 모더니즘이 그 생성요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측면들은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궁극적 목표인 형이상학적 초월성을 아이러니의 내재로 비하시킨다. 모더니즘들이 취하는 이상세계에 대한 생각들을 "교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상당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주장들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법들을 "수단적"인 측면으로 援用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 중에는 보들레르가 주장했던 일시적, 찰나적,우연적인 면이 그대로 보인다. 그러나, 단지 영원불멸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략되고 그 반대로. 일시적, 찰나적, 우연적 측면의 언어에 대한 연쇄적 signifiant이 강조되어 그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그 겉에서 혼돈을 탐닉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모던이 사상적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다른 것, 자신 이외의 것(The Otherless)관한 문제제기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인간이성에 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가위손"이라는 에드워드 팀버튼 감독의 영화가 있다. 이는 배트맨과 함께 90년대 포스트모던의 특징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자신 이외의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주인공 에드워드는 미완의 인조인간이라 감정은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 이외의 것인 에드워드의 사랑, 배신, 등을 대리적 체험을 통해 얻어내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후 헐리우드의 공상과학영화들이 수퍼맨적 만능구조가 아닌 절름발이 구조의 영웅을 양산해 내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얼마전에 개봉된 포에스트 검프의 경우도 그 예의 하나일 수 있다.
모더니즘의 발전이 전기산업사회의 기계발달에 발맞추어 이루어져 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발달은 후기산업사회의 출현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방향 정보통로가 열린 통제된 사회에서 획일화를 도모한 것이 모더니즘의 배경이라면 쌍방향 채널을 이용해 상호정보 송신과 정보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토양이다. 정보의 채널이 증가하게 되고, 언어보다는 영상매체의 혼합적 이미지가 의사소통의 새로운 형식으로 쓰이게 되며 예술은 갖가지 엉뚱한 이미지의 혼합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합목적적이고 형식적인 합리성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탈중심, 탈권위를 지향하는 새로운 형식의 출현이다.
- 포스트 모던 디자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차이가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건축이다.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은 다분히 기능적이다. 그리고 육각형의 보편성을 지닌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의 그러한 특징 하나하나에 반기를 들면서 일어났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전원적이며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국제적인 건축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탈서구, 탈중심, 탈제국주의적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모던 건축을 "엄청난 따분함의 폐해"라는 말로 혹평했다. 육중한 이데올로기를 받치고 있는 듯한 건물의 단조로움 그 단조로움은 결국 기계에게는 어울렸을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지루함 외에는 안겨준 것이 없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특색을 드러내는 것은 광고이다. 여기서 도다른 포스트모더니즘디자인의 특질을 본다. 그것은 이미지의 혼재-경우에 따라서는 광고 대상이 생략되기도 하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이너스의 꼼빠니아 광고중에 영화 "The God Father"의 주제곡으로 쓴 "Parles plus bas"가 잔잔히 흘렀던 적이 있었다. 이것이 전 시대 광고와 확연히 다른 점은 "Parles plus bas"는 조이너스의 의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전 시대의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 "맛을보고 맛을아는 샘표간장"과는 달리 로고송에 대상이 없으면서도 "Parles plus bas"를 듣고 조이너스의 의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디자인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상주의로부터의 탈피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디자이너들은 이성의 보편성에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후기산업사회라는 사회적 형태의 변화는 디자인 양상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 놓았다. 후기산업자본은 용도에 의해 결정되는 디자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지도 않은" 상품의 디자인을 요구한다. 일본 SONY사에서 세계시장의 80%정도를 소화하고 있는 캠코더를 디자인한 경우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용도가 아주 모호"한 경우 기능은 무엇으로 보야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부닥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개인용 컴퓨터이다. 도데체 이 기계의 용도는 무엇인가? 디자이너의 스케치북인가, 글 쓰는 도구인가, 아이들의 오락기인가, 통신용 단말기인가, 책인가, 작곡가의 피아노인가, 노래방 기계, 오디오 시스템, TV, 비디오, 자명종, 전화자동응답기, 팩시밀리, 디스켓 선반 등등 이 기계의 모던적 관점에서의 기능적 본질과 이상은 너무나 혼재되어 있고 그 혼잡성은 앞으로 더해질 것이라 예상된다.
포스트모던디자인은 상호텍스트적이다. 즉 디자인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극단적인 예는 광고디자인에서 디자인과 상관없이 하나의 드라마를 추구하는 것이다.훼미리 쥬스의 광고 같은 경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만나는 과정을 드라마적으로 서술하여 훼미리쥬스에 대한 관심을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가져오도록 한다. 상호텍스트적이란 것은 아까 말한 연쇄적 signifiant 의 강조로 볼 수 있다. 그것의 내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는 내면을 보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전자제품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자동차의 신차 Avant 의 경우 고려청자에서 응용한 곡선디자인을 이용하고, 尾燈은 호랑이눈 형상을 하고 있다. 쌍용의 무쏘가 가진 이미지는 돌고래이다. 디자이너는 청자, 호랑이눈 등등의 기존에 잘 알고 있는 대상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그것들을 혼용해서 시각적 내재언어화함으로 새로운 물체인 자동차를 이야기해 주려 한다. 이런 상호텍스트성은 전술한 "용도가 아주 모호"한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현대는 기존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던 사물이 그 용도가 엉뚱한 예로 전용되는 것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포스트모던디자인이 모던디자인을 반대하고 나온 측면이 많다고 하지만 그 표현 형식은 모던 디자인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광고 디자인에서는 콜라주, 데칼코마니, 마블링 등등의 우연성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그대로 援用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디자인이 추구하는 것은 모던에서처럼 우연성을 통한 이데아의 실현이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우연성 자체를 찾는 것이다.
- 해체주의


윗 시는 황지우가 1983 년에 쓴 시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난해한 시를 읽다가 눈이 잠시 쉴 수 있는 재치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기존의 시 형식을 분해하여 어떤 다른 것을 도모하고 있다. "묵념 5 분 27초"는 이미 시어가 아니다. 이것은 강한 명령이다. 기존의 시가 직유와 은유를 사용하여 시라는 언어 예술을 창조하였다면 이 시는 직설적인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의 주안점은 이것이 시적 대상을 따로 떼어 버린 해체주의의 일면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이 시는 죽어버린(혹은 죽어버려야 하는)현대한국의 현실(혹은 자아)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묵념을 하라고 강요하고 그럼으로 그것이 선포되었다고 생각되게 한다.
해체주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역사적 시점은 약간 달리한다. 해체주의의 시초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사실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해체주의의 패러다임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탓도 있다. Arnold S nberg의 無調音樂으로부터 시작하여,피카소,브라크의 그림, 체육관에서 의자만 빙빙 돌다가 영국 국기 문양이 그려지며 ReeBok라고 외치는 선전에까지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공존하며 해체는 존재한다. Sartre의 사상이나 Camus 의 "L' tranger"에서도 비슷한 측면이 보인다. 해체라는 현상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후기산업사회의 사회 현상에서도 관측된다. 절대적 진리라는 사실이 부정되고, 지금껏 사회를 이끌어 온 엘리트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사회주체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이는 M.Foucault 의 견지와 비슷하다. 푸코는 서구철학이 당연시해 온 이성과 계몽에 대하여 회의하고 지식-권력체계에 대하여 탐구했다. 푸코는 해체의 인식에 있어서도 이 체계가 붕괴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 해체주의 디자인
해체주의 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은 광고디자인에서 나타난다. 파편화된 이미지광고, 서술구조의 해체-시공간의 해체, 언어 메시지의 실종 등등의 경향으로 보여진다. 현대 광고는 광고 대상의 실체와는 무관한 형상들이 뒤덮힌 광고들을 본다. 특히 성적인 표현을 광고에 표현하는 것이 잦아지며 이는 신제품 런칭 광고와 열세에 처한 기업의 광고에 많이 쓰인다. 해체주의 디자인은 크게 두 가지 형상으로 다가온다. 첫째는 기존의 관념이나 사물을 깨뜨려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여성 생리대 광고를 하고 있는 남성모델이나 속옷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겉옷 등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다음으로 나열된 파편적 이미지로 대상물을 형상화(이 경우 대상물은 부재하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범주는 큐비즘 때부터 있었다. 조르쥬 브라크의 1913년의 일련의 작품들 '클럽 에스의 콤포지션', '클라리넷', '병과 컵 바이올린'등을 보면 신문지 조각, 나뭇결, 포도송이 문양 등의 대상물과 상관없는 이미지들의 나열이 있다. 현대에 이러한 이미지나열은 주로 광고에서 보인다. 엘칸토의 부부부부부 로 시작하는 광고, 메르꼴레디의 갈색빛 영사기가 나오는 광고 등이 있다. 양자의 차이는 전자는 작가가 '이것을 클라리넷으로 보아라'식으로 강요를 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후자는 부재의 이미지 나열 속에서 감상자가 '아 그것이구나'를 알아채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해체주의 디자인의 대표적 예는 베네통 사의 광고가 꼽힌다. 베네통 광고는 첨예한 세계적인 문제를(즉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을) 광고디자인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으로 소비자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베네통 사의 이러한 일련의 광고는 몇 가지 인식의 혼용과 재창출이다. 베네통 사의 광고는 일차적으로 보는 사람의 시각을 끌도록 한다. 이것은 성적 과다노출로 인해 얻어지는 광고이미지와 비슷하다. 일단 광고를 보게 되었으면 대중들은 그 광고가 자신들의 (비극적인)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이미지는 기업이 마치 현실 참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재빨리 성금을 내어 자기 기업이 자선 사업의 선구자인 양 선전하는 기업처럼-이미지를 주게 된다. 그 다음 그 위에 찍혀진 녹색의 베네통 사 문구에 의해 그것이 베네통과 연관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파편적인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융화되고 다시 혼합되어 세계적인 베네통을 실감하게 한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던 디자인
1985 년 이후, 해커그룹이 작성한 GNU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GNU 는 다음 이니셜을 딴 것이다. Gnu's Not Unix, 얼핏 들으면 장난기어린 발상이기도 하나 이는 프로그래머들로부터 상당히 진지한 소리로 통하고 있다. 이 이니셜 자체도 해체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다. 해체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당한 연관을 가진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연관은 GNU의 약어와 비슷하게 짜여져 있다.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이 공유하는 것은 The Others 에 있다. 파편적이고 미완성적으로 행해지는 디자인은 그것을 보는 자아에게 이미지의 합성을 요구하고 있다. 모던 디자인처럼 '다 된' 완성품 장난감 공룡을 주어 지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레고블록 한 상자와 공룡의 이미지를 주고 공룡을 직접 만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발상을 한 디자인 역시 자아에게 그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있다.
나오며: 한국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안인가?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한국과 같은 제 3 세계에서는 바우하우스나 울름의 모더니즘적 고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서구에서 들어온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입시기에 있어 큰 시간적 차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해야만 할 개연성을 반감시킨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사회에 마치 모더니즘적 시기가 존재했다는 듯이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건축물이나 광고적 측면에 있어서 상당히 뚜렷한 양상을 보인다. 1990 년대 지어지는 가정집은 이어령의 '한국의 담장'에 나오는 옛 모습을 연상시키듯, 낮아지고 내부가 훤히 보이는 양식으로 10 여전 전의 건축과는 달리 변하였다. 최근 세워지고 있는 여의도의 증권가 건물은 네모꼴의 형상보다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적 사고방식은 결국 절망감을 처절하게 맛본 서구 철학이 동양 철학으로 이행하고 있는 현상이며, 이것은 서구적 문물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실마리가 된다고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획일적, 탈제국주의적 신념이 강하여, 전체주의보다는 지역주의 세계주의보다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으며 한국 사회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 때문에 이것을 기존 모더니즘의 산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수용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은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공존하며 점차 포스트모던적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수용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제문제는 불교의 禪宗, 도교의 道德經에 씌여진 문제들과 상호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 모더니즘은 대안인가
김민수 선생님의 '모던디자인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일탈은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파생된 제문제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성찰'이라고 귀결을 짓고 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은 후기산업사회의 철학적 대안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는 과감히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모더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한 동기가 반성이었다고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표피성과 경박성, 그리고 민감한 상업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닌다. 그러나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던의 제문제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한동안 '모던 기피증'의 편집적 요소를 보여 주는 과도기적 체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요즈음은 M.Safdie 의 말"포스트모던-그거 이제 싫증납니다.!" 처럼 포스트모던이 다른 형태로 변신할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시대이다(물론 아직 서구에 한정되지만). 시행과 착오로 이루어진 인류 역사처럼 앞으로 디자인의 여러 제문제에 있어서 새롭고, 더욱 인간적이고, 올바른 방향의 이념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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