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등
- 류시화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꽃 멀미
-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꽃 씨
- 서정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써야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 하나의 유리이슬이 되어야지.
은해사 솔바람 목에 두르고
내 가슴의 서쪽으로 떨어지는 노을도 들고
그대 앞에 서면
그대는 깊이 숨겨 둔 눈물로
내 눈 속 들꽃의 의미를 찾아내겠지.
사랑은 자기를 버릴 때 별이 되고
눈물은 모두 보여주며
비로소 고귀해진다.
목숨을 걸고 시를 써도
나는 아직
그대의 노을을 보지 못했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위해
나는 그대 창 앞에 꽃씨를 뿌린다.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의 꽃씨를 묻는다.
맑은 영혼으로 그대 앞에 서야지
꽃밭에 서면
-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