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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공의 인과율

전광용, <꺼삐딴 리>, 사상계, 1962. - 줄거리 및 해설..

작성자다詩다시|작성시간08.08.29|조회수183 목록 댓글 0

5. 꺼삐딴 리


전광용(全光鏞)


<전략>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 가지의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병원 안이 먼지하나도 없이 정결하다는 것과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이나 비싸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환자의 초진(初診)에서는 병에 앞서 우선 그 부담 능력을 감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신통치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에는 무슨 핑계를 대든,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간호원더러 따돌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중환자가 아닌 한, 대부분의 경우 예진(豫珍)은 젊은 의사들이 했다. 원장은 다만 기록된 진찰 카드에 따라 환자의 증세와 아울러 경제 정도를 판정하는 최종 진단을 내리면 된다.

상대가 지기(知己)나 거물급이 아닌 한, 외상이라는 명목은 붙을 수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양면 진단은 한 푼의 미수나 결손도 없게 한 그의 반생을 통한 의술 생활의 신조요, 비결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고객은, 왜정 시대는 주로 일본인이었고,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속에 드는 측들이어야만 했다.

그의 일과는 아침에 진찰실에 나오자 손가락 끝으로 창틀이나 탁자 위를 훑어 무테 안경 속의 움푹한 눈으로 응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 때, 손가락 끝에 먼지만 묻으면 불호령이 터지고, 간호원은 하루 종일 원장의 신경질에 부대껴야만 한다. 아무튼 단골 고객들은 그의 청결한 결벽성에 감탄과 경의를 표해 마지않았다.

1․4 후퇴시 청진기가 든 손가방 하나를 들고 월남한 이인국 박사다. 그는 수복되자 재빨리 셋방 하나를 얻어 병원을 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평당 오십만 환을 호가하는 도심지에 타일을 바른 이층 양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전문의 외과 외에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개인 병원을 집결시켰다. 운영은 각자의 호주머니 셈속이었지만, 종합 병원의 원장 자리는 의젓이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

이인국 박사는 양복 조끼 호주머니에서 십팔금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두 시 사십 분!

미국 대사관 브라운 씨와의 약속 시간은 이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계에도 몇 가닥의 유서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인국 박사는 시계를 볼 때마다 참말 ‘기적’임에 틀림없었던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왕진 가방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온 피난 유물의 하나인 시계 가방은 미군 의사에게 얻은 새것으로 갈아 매어 흔적도 없게 된 지금, 시계는 목숨을 걸고 삶의 도피행을 같이한 유일품이요. 어찌 보면 인생의 반려(伴侶)이기도 한 것이다.

밤에 잘 때에도 그 시계를 머리맡에 풀어놓거나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버려 두지 않는다. 반드시 풀어서 등기 서류, 저금 통장 등이 들이 있는 비상용 캐비닛 속에 넣고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또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이 시계는 제국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이다. 뒤쪽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후 삼십여 년,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은 변하여 갔지만, 시계만은 옛모습 그대로다. 주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이십대 홍안을 자랑하던 젊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머리카락도 반백이 넘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만 간다. 일제 시대, 소련군 점령하의 감옥 생활, 6․25 사변, 삼팔선, 미군 부대, 그 동안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이 아닌가.

“월삼 십칠 석.”

우여곡절 많은 세월 속에서 아직도 제시간을 유지하는 것만도 신기하다. 시간을 보고는 습성처럼 째각째각 소리에 귀기울이는 때의 그의 가느다란 눈매에는 흘러간 인생의 축도가 서리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도 각모(角帽)와 쯔메에리 학생복을 벗어버리고 신사복으로 갈아입던 그 날의 감회를 더욱 새롭게 해 주는 충동을 금할 길 없는 것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수술 직전에 서랍에 집어넣었던 편지에 생각이 미쳤다.

미국에 가 있는 딸 나미 본래의 이름은 일본식의 나미코(奈美子)다. 해방 후, 그것이 거슬린다기에 나미로 불렀고, 새로 기류계에 올릴 때에는 코(子)자를 완전히 떼어버렸다.

나미짱! 딸의 모습은 단란하던 지난날의 추억과 더불어 떠올랐다. 온 집안의 재롱둥이였던 나미, 그도 이젠 성숙했다. 그마저 자기 옆에서 떠난 지금, 새로운 정에서 산다고 하지만, 이인국 박사는 가끔 밀려오는 허전한 감을 금할 길 없었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죽었고, 아들의 생사는 지금껏 알 길이 없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 후처로 들어온 혜숙(惠淑). 이십 년의 연령 차에서 오는 세대의 거리감을 그는 억지로 부인해 본다. 그러나 혜숙의 피둥피둥한 탄력에 윤기가 더해 가는 살결에 비해 자기의 주름잡힌 까칠한 피부는 육체적 위축감마저 느끼게 하는 때가 없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난 돌 지난 어린것, 앞날이 아득한 이 핏덩이만이 지금의 이인국 박사의 곁을 지켜 주는 유일한 피붙이다.

이인국 박사는 기대와 호기에 찬 심정으로 항공 우편의 피봉을 뜯었다.

전번 편지에서 가타부타 단안을 내리지 않고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한 그 후의 경과이다.

‘결국은 그렇게 되고야 마는 건가…….’

그는 편지를 탁자 위에 밀어 놓았다. 어쩌면 이러한 결말은 딸의 출국 이전에서부터 이미 싹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택한 딸, 개인 지도를 하여 준 외인 교수, 스콜라십을 얻어 준 것도 그고, 유학 절차의 재정 보증인을 알선해 준 것도 그가 아닌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서류에 따라 미국 유학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오히려 아버지 자기가 아닌가.

동양학을 연구하고 있는 외인 교수. 이왕이면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면 좋겠다던 솔직한 고백에 학문을 위한 탁월한 견해라고 무심코 찬의를 표한 것도 자기가 아니던가.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암시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인국 박사는 상아로 된 오존 파이프를 앞니에 힘을 주어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후략>



▶ 줄거리

 이인국 박사는 수술을 끝내고 나오며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정을 돌이켜보던 그는 문득 미국에 유학을 떠나 있는 딸 나미의 편지를 생각한다. 그 편지에는 기필코 미국인과 결혼하겠다는 딸의 고집이 담겨 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닥쳐 왔음을 깨닫는다. 상대는 동양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교수.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자신이 외국인 교수 앞에서 딸의 미국 유학을 주장했고, 또한 그 외국인 교수가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찬성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담배 파이프를 지그시 깨문다. 백인 사위에 흰둥이 손자라,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같은 사실을 그는 자신의 후처인 혜숙에게 말한다. 그러나 혜숙은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입맛을 다시며 미국 대사관의 브라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선다. 차를 타고 달려가면서 그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북인 그의 고향에는 해방이 되자 느닷없이 소련군이 진주해 들어왔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진주군의 탱크 행렬을 바라보았다. 벌써 며칠째 붐비던 그의 병원에는 이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친일파라는 오명과 함께 치안대에 연행되어 온갖 욕설과 구타에 시달렸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는 삶을 희구하는 가녀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감방에 감금된 그는, 감방 안에 이질이 만연하자 형무소장의 명령에 의해 응급처치실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텐코프라는 소련인 군의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눈에 스텐코프의 왼쪽 뺨에 붙은 혹이 들어왔다. 그는 그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스텐코프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는 그 뒤, 스테코프의 추천에 의해 하나뿐인 아들 원식이를 모스크바로 유학 보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에 6․25 사변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 중에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역시 자신의 기술과 수완으로 상당히 높은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단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아들의 소식을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자동차가 브라운의 관사에 닿는다. 브라운과 만나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는 브라운의 얼굴이 자꾸 스텐코프의 환영과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브라운으로부터 자신의 미국행에 대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뿌듯한 무엇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는 브라운의 관사를 나오면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그리고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서, 또한  월남을 결행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미국에 가서도 반드시 그러하리라고 확신을 가진다. 택시를 타고 느긋하게 달리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가을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 어휘 및 구절 이해

 꺼삐딴 : 영어의 캡틴(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 어로, 원음은 ‘까삐딴’. 8․15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이 말은 우두머리나 최고라는 뜻으로 쓰임

 감정(鑑定) : 사물의 좋고 나쁨이나 진위(眞僞) 등을 분별하여 판정함. 여기서는 ‘헤아려 정함’의 뜻으로 쓰임

 지기(知己) : ‘知己之友(지기지우)’의 준말로 서로 마음이 통하고 알아 주는 친한 벗. ‘지음(知音)’과 같은 뜻임

 유서(由緖) : 사물이 옛적부터 전해 오는 까닭과 내력


 설령 있다 해도 - 신조요 비결이었다. : 미리 환자의 경제 정도를 계산해 놓은 뒤이므로, 설령 외상이 있을지라도 이내 받을 수 있다는 뜻. 인물의 치밀한 계산 능력을 설명으로 제시했다.


 시계는 목숨을 걸고 - 인생의 반려(伴侶)이기고 한 것이다. : 이 시계는 이인국이 대학 졸업 때에 수상품인데,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구성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 작품 해제

 갈래 : 단편 소설. 풍자 소설. 본격 소설

 배경 : 1940년대 - 1950년대의 남한과 북한

 성격 : 풍자적. 냉소적. 비판적

 경향 : 신심리주의적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표현 : 몽타주 수법

 구성 : 역순행적

  ․현재 - 이인국 박사의 처세술과 인간성

     회상 매체(1) : 회중 시계

     과거 : 일제 치하(일어로 처세함)

  ․현재 -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자동차 안.

     회상 매체(2) : 석간 신문의 머리 기사

     과거 : 광복 이후(노어로 처세함)

  ․현재 - 고려 청자를 선물함.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음.

 주제 : 세태에 따라 능란하게 변신하는 기회주의적 인간 풍자 

 출전 : <사상계>(1962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


▶ 작품 해설

 “꺼삐딴 리”는 외과 의사인 이인국 박사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일제 치하, 광복, 국토 분단, 군정, 건국, 6․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의 체험자로서 누구보다도 재빨리 환경에 적응한다. 그것은 곧 그가 살아가는 특유한 신조와 방법인데, 작가는 주인공을 통하여, 시류(時流)와 타협하면서 일신의 안녕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인간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은 이기주의자요 기회주의자, 변신술에 능한 인간의 전형으로 기회주의적 변신술 속에 자신을 지키는 평면적 인물이다. 민족 수난기에 수차에 걸쳐 지도 이념이나 시대 정신이 바뀌어도 머리가 좋은 인물(이인국으로 대표되는 지도층 인사)들은 지조도 신념도 없이,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공동체 의식이 없이, 오직 자신의 영달과 안일을 추구하는 보신책만을 강구한다. 이 소설은 이인국으로 대표되는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그러한 정신 자세를 꾸짖는 비판 의식이 주제 의식으로 깔려 있다.

 격동과 격변의 현대사에서 변함 없이 살아 남아 사회 지도층으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의 오늘의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준엄한 비판의 소리를 들려 주고자 하며, 인간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데 이 소설의 문학적 가치가 있다.


▶ 작품 이해


■ “꺼삐딴 리”와 인물의 전형성

 이 작품은 일제 말기에서 해방을 거쳐 6․25 전쟁 후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역사적 격동기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생존을 도모해 가는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전형을 창조하여 보여 주고 있다. 친일파에서 친소, 친미로 변신을 거듭하며 권력에 빌붙어 오로지 세속적인 명예와 부만 추구하는 이 인물은 민족적 양심조차 마비된 반민족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작자는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이러한 인물을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를 바라봄으로써 민족의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 온 기득권 계층이자 사회 지도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의 방식을 준엄하게 비판한다. 작자는 이를 통하여 인간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꺼삐딴 리”의 구성의 특징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구성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회중 시계’다. 시계는 시간성의 표상이다. 이렇듯 시간성을 표상하는 시계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 작품의 구성이 시간 문제와 밀착되어 현재와 과거에의 기억 및 연상으로 넘나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 10개의 서사적인 장절(章節)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첫 번째와 마지막이 현재이며 나머지 7개의 장절은 모두 흘러가 버린 시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회상이며 재생이다. 다만 5장절 전후에 다시 현재가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시대적으로 구분된 장절을 몽타주식으로 구성된 몽타주(Montage)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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