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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

작성자healthing|작성시간11.07.10|조회수650 목록 댓글 0

임영신(1899~1977)과 중앙대학교, 그리고 이승만과의 특별한 인연

 

흑석동에 위치한 중앙대학교의 건립자로 동작구와 인연을 맺고 있는 임영신은 충남 금산이 고향으로 초대상공부장관(*), 제헌의원(안동, 보궐선거로 당선*)을 지내는 등 한국 근현대 여성 중 가장 화려한 경력과 이력을 가지고 있는 교육자이자 정치인이다.

 

1919년 전주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일제에 연행·구속되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에도 관여하였다. 그 뒤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 등을 거쳤으며,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5년~1930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했고, 1931년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이 기간 미국에서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1957년 미국 남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박사,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니혼 대학(日本大學) 등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영신은 1937년 중앙보육학교 운영자금 모금의 명목으로 도미하였다가 결혼에 실패하면서 귀국한 후, 일제의 만주침략이후 본격화된 황국신민화 정책에 굴복하고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녀는 1941년 12월 13일 “우리들은 임전 체제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구애없이 2천 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聖戰) 완수로써 황국의 흥융을 기하며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할 것을 맹세한다”는 선서와 함께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년 1월 5일 산하기관으로 소위 총후(銃後, 후방) 부인 진영을 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발족시켰는데, 임영신은 여기에 김활란(金活蘭)*, 박순천(朴順天)*, 박마리아*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노천명*, 모윤숙* 등은 간사로 참여) 이 단체는 같은 해 3월 14일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 새출발하여, 20세 미만의 미혼자를 제외한 전 여성을 조직 대상으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영신의 친일활동은 적극적이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기록에 나타나는 그녀의 친일활동을 볼 때 우선 그녀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던 여성들이었던 김활란, 박순천, 박마리아,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 배경에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초기에 미국에 있었던 점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임영신은 해방이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는데, 1945년 10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946년 9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의원을 지낸다.

 

중앙대학교의 건립과 활동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 1933년 4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3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를 지냈고 그 뒤 다시 도미했다가 1940년에 귀국한 후 1941년 7월 경성중앙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임영신이 처음 교육사업에 뛰어든 중앙보육학교는 1917년 중앙유치원(중앙교회 부설)을 모태로 1928년에 중앙보육학교로 인가된 것으로 1933년 임영신이 인수한 것이다. 중앙대학교는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 1947년 중앙여자대학, 1948년 남녀공학 중앙대학으로, 마침내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임영신은 1953년 초대 총장으로, 1961년에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 이승만의 청혼과 임영신의 거절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이승만은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의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청혼을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도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다.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 해방후 임영신-이승만 간의 소문과 프란체스카 여사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이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홀로 귀국하였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돈암장에 기거하였는데, 임영신은 대한여자국민당의 부당수 이은혜(異恩惠)(*) 등과 함께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이승만을 도왔다.

 

그러나 이무렵 이승만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이 소문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던 것이다.

 

한국에 들어오라는 답신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에게도 이 박사와 임영신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 전해졌다. 소식을 접한 프란체스카 도너는 크게 노하여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프란체스카는 임영신을 냉대하였고, 프란체스카 도너에 의해 돈암장 출입이 제한되었다. 그와 이승만의 관계를 떼놓으려는 것이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임씨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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