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생각이 머무는 공간

[겨울 끝자락의 일기]

작성자[자명]|작성시간21.02.01|조회수190 목록 댓글 22

겨울 끝자락의 일기

 

사람은 자기 입장에 따라 모든 사물이 달라 보이고 좋아했던 것도 두려움이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올 겨울을 보내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다. 비를 참 좋아했다. 햇살 가득한 날보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산행이 더 좋았고 청량감 더한 바람보다 비오는 날의 그 바람이 내 감성을 더 충만하게 했다. 조금 여유를 부릴 때 비라도 온다면 음악을 듣거나 한줄 시를 읽는 이 호사는 어디에 비길 수 있을까. 그러나 금년 겨울의 비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필자가 운영하는 RV리조트 사업장의 하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마음고생은 이루다 말 할 수 없었다. 이곳 빅토리아는 겨울이면 눈 대신 비가 내린다. 이른바 몬순기간이다. 비가 올 때는 하수시스템 공사를 할 수 없어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우산을 받지 않아도 좋은 가랑비가 내리던 예년과 달리 올 겨울은 유독 빗줄기가 세찼다. 배수에 문제가 생긴 사업장은 물이 고였고 마음을 잠시도 내려놓지 못하게 하였다. 1월 중순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일주일에 절반은 햇살이 비쳐 한시름 놓게 되었다.

 

주말이면 밀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틈나면 혼자 산행을 하거나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도 내가 휴일을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다. 돌아보면 난 보편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것 같고 늘 닦이지 않은 길을 혼자 걸어온 것 같다. 내 문학과 실용적 글에서의 경계는 투자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통적인 질문에 답하기보다 늘 독창적인 궁금증에 대한 의문으로 늘 인내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함에도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아들 집까지 걸어서 가 봐야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차에 길을 나섰다. 차로는 10분 거리지만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2시간30분이 걸렸다. 그 집에도 차실이 있어 차 생각이 날 때면 불쑥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날 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1 년에 서너 번 가는 게 고작이다. 뒷마당 잔디도 궁금했고 그냥 그 집을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새 동네는 전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한 폭의 그림이다. 샘 집이 가까워지자 샘이 이층 서재에서 나를 발견하고 불러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심스러운 마음도 숨 길수 없었다. 마음조이며 집을 둘러보고 서둘러 떠났다. 토요일 쉬는 날에 나타나 신경쓰이게 할까봐 싫었다. 아들이 결혼을 한다면 더욱더 조심되어 방문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없이 다녀간 것을 알게 되면 또 잔소리를 들을 것이고 많이 섭섭해 할 것을 알지만 그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사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된 후론 어떤 이유로도 그들의 방을 허락 없이 들어가거나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들이 대학을 앞두고 방황하고 있을 때 난 자퇴하고 해외배낭여행을 권유했었다. 방황의 시간을 보내면 미래가 보일 것이라고 나는 믿었고 그도 동의했었다. 며칠 후 그는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배낭하나 메고 해외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그를 배웅하고 돌아설 때 그 맑고 조금은 허전했던 그 하늘. 오늘 그 친구의 집을 떠나올 때 올려다 본 하늘도 그때의 허공이었다.

이젠 그도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처음 새집으로 이사를 하던 날 이 집을 어찌 관리할까 생각했는데 참 정갈하게 관리를 잘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저 자리를 채워 함께 살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하기엔 무척 조심스럽다. 나보다 훨씬 더 생각이 깊고 자신의 미래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낮이 많이 길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 본 하늘엔 금시 연한 빛의 달이 떠 있었다. 적당한 차가운 기운은 그만큼 맑아서 좋다. 참 오랜만에 저 달을 보는 듯하다. 늘 내 마음의 언덕에 떠 있는 달빛을 보다 마음 끝에 멈춘 곳에 또 하나의 달이 떠 있다는 것을 오늘 본 것이다. 늘 가까이 있는 것이 새롭게 보이고 소중하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나는 나를 보는 것이다.

 

2021,1,31(토요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자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3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른이 되어가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철이 들기는 커녕 반대로 가고 있어요
    안부전합니다
  • 작성자온정 | 작성시간 21.02.02 자명님의 맛깔스런 글 감사드립니다. 배수시스템 문제로 자명님 많이 고생하시는 것 안타까웠는대. 글을 읽어보니 정말 큰 고생하셨내요. 건강하세요 자명님!
  • 답댓글 작성자[자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3 반갑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가버렸습니다.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위안이자
    희망입니다.
  • 작성자아름다운선물 | 작성시간 21.02.03 자퇴, 여행.. 멋진 아버지시네요~~^^
  • 답댓글 작성자[자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3 멋진 흉내를 내보려고 노력중입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안부전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