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요한복음 6장에 주안점을 두고 말씀드려보겠습니다. 38절부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38 내가(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장)
이 구절을 읽는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치 유대인들같지 않으신가요? 자기가 뭔대 우리와 같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갓 인간이면서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가소로운 주장이며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두 선교사업을 해보겠다고 거리로 나가보면 절실히 느끼는 체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의 얘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흥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복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떡보다 더 중요하지만 그들에게는 떡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고 떡이 없는데 진리라는 것이 떡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거리 전도를 듣는 것보다는 듣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 하나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대부분 그랬을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없이 무언가가 바쁩니다. 아니 바쁘지 않아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를 몰라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뜬금없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별난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지나가고 맙니다.
적어도 그는 지극한 영생을 놓친 것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었더라면, 우리가 영원히 사는 존재이며, 영원히 살아야 할 존재라는 금쪽 같은 말씀을 지나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왜 지금 살고 있는가 장차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일컬어 하늘에서 내려온 떡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저도 저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비웃는 무리 중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구? 하늘에서 어떻게 떡이 내려올 수가 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들은 영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에 살리리라
세상을 비롯한 우주의 창조주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위임을 받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한 무한 신뢰와 그분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심성을 갖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그를 신뢰한다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도록 계획하셨고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불사불멸 더 나아가서 영생을 성취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범속한 인간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뵈올 수 없을지라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시현을 통해서, 그의 영의 음성을 통해서 심지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또 어떤 사건이나 일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꿈을 통해서 두 번, 그 외에도 지도자의 말씀을 듣는 중에도 그리스도의 영을 느꼈고, 경전을 상고하는 중에도 놀라운 영의 음성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주님과 조우하기에는 그에 걸맞은 성결이나 고결함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그에 개의치 않으시고 순간순간 저를 일깨워주시는 성신의 영향에 감사드립니다. 주야로 주를 묵상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우선 제 자신이 성결하게 될 것입니다. 성결하지 않고서는 주님 면전에 거할 수 없다는 경전의 말씀이 항상 제게 경고로 다가옵니다. 때로 화를 참지 못하거나 불손한 언행을 한다거나 하는 등 주님 면전에 이르기에 부적절한 언사가 지금도 여전히 제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잘 표현되는 수단이 있는데 바로 눈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상대의 눈을 그윽히 바라보면 그의 속마음이 읽힙니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는 우리 마음도 읽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게 되면 몸에 필요한 영양소는 몸에 축적되고 나머지는 배설 작용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면 영적 흡입은 어떻게 될까요? 영적 양식도 몸 안에 갇혀 있다가 차오르게 되면 어디론가 배설을 해야 하는데 바로 눈입니다. 입으로도 배설이 가능하지만 그 배설은 온갖 치장과 속임이 있을 수 있으나 눈을 통해 하는 배설은 자신의 감출 수 없는 엑기스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는 스펜스 더블류 킴볼이 있었고 고든 비 힝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그들의 풍모에서 영적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닌 영이 깨끗하면 그의 눈길은 순수해지고 그리스도의 영을 느끼게 해줍니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살다보면 하늘의 방식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아도 동조하며 진정한 나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교리와 성약 6편 36절에서 다음과 같이 일렀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나를 바라보라. 의심하지 말며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분들이 제 주위에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가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분은 아닐지라도 자기만의 길을 걸으며 내색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우리가 매주 성찬식 예배에서 빠지지 않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물을 드는 것은 주님을 내 안에 들이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꾸준히 성찬을 취하면 우리의 회개도 진지해지며 회개의 수도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닮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어 더하여 우리는 또 어떻습니까? 주님을 상시 기억하도록 가먼트를 입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누구와 있든지 간에 주님 기억의 외투, 전신갑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축복받은 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강력한 외투를 입고 있는 우리 아닙니까! 설령 유혹이 닥쳐올지라도 고무줄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가먼트를 만져 보는 우리가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유혹에서 재빨리 돌아설 수 있는 우리입니다.
많은 고난이 우리를 덮칠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우리는 주야로 기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 위대한 영적 힘은 우리의 눈을 통하여, 시선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며 나를 바라보는 이들도 신성한 영적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내가 평생을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예수님을 닮은)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간증을 강화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강건너 높은 화려한 건물에서 저희를 보며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비아냥섞인 조롱을 할지도 모릅니다. 간증이 약화될 때 그런 처우를 받는다면 우리는 실망하고 낙담하며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나 자신을 다시 둘러보고 신앙 간증을 강화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크나큰 시련을 자주 겪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맞는가! 그렇다면 왜 내게 이 끝없어 보이는 시련을 주시는가?
그런 와중에도 기도를 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단순한 경우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나와 아내는 아주 중요한 부동산 서류를 찾고 있었습니다. 달포 전부터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가 마감일이 내일로 닥쳐오자 몸이 달기 시작했습니다. 온 집안을 샅샅이 아내가 뒤지고 있었습니다. 큰일이다 싶어서 나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초등회 어린이처럼 되어 겸손하게 주님께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되어 아직 뒤지지 않은 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눈 앞에 있는 전기가마 위에 낯익은 바인더가 보였습니다. 기쁜 마음에 얼른 다가가서 펼쳐보니 바로 그렇게 찾던 서류들이 몽땅 모여서 먼지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서류가 없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서류 덕분에 관련된 다른 서류들도 찾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아주 단순하고 겸손한 기도의 효험입니다. 물론 어떤 기도는 끝까지 응답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기도하는 동안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마음에 불안의 소요가 완화됩니다.
제가 온누리합창단의 일원이었을 때 배운 노래가 있습니다. 시각 및 언어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를 세계적인 사회봉사자로 만든 셜리반 여사가 작사한 "잃어버린 화현"이라는 아주 유명한 곡이 있는데 그 가사가 항상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읽노라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고 그지없이 외로울 때
무심코 거문고 줄을 퉁기어 보았네
거문고 가락은 울려 꿈 속에서 헤멜 때
내가 잃어버린 노래속에 기억하는 것은
주님의 부드런 음성
서쪽하늘 저녁 놀이 곱게 번지어 가듯이
내마음 속에 스며드는 주님의 음성을 듣네
슬픔과 탄식은 가고 괴로움 사라지리
어디서 오는가 따뜻한 영혼의 입김
나 오직 바라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영원한 나라갈때까지 고이 간직하는 것
거문고에서 울려나는 은은한 가락은
나의 맘속에 속삭이는 사랑의 주음성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나라에 가며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 나 가까이 듣겠네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나라에 가며는
부드러운 주의 음성 내가 듣겠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