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표충사(密陽 表忠寺, 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밀양읍에서 동쪽 방향으로 28km 떨어진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 惟政, 1544∼1610)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 배치는 대광전(大光殿,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31호)과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는데 대광전은 불교(佛敎), 표충서원은 유교영역(儒敎領域)이다. 유교 공간이 불교 사찰 경내에 공존하는 특이한 가람 구조이다.
표충사(表忠寺)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팔상전, 명부전,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있다. 또한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국보 제75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이 밖에도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泗溟大師 錦襴袈裟∙長衫, 중요민속자료 제29호), 표충사 석등(表忠寺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사비(表忠寺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등이 있다.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은 중심 불전으로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藥師佛)을, 서쪽에는 서방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전란 등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2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다포계 양식이다.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건물 네 귀퉁에는 추녀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을 딸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다.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 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은 잘 다등어져 있으며, 주춧돌 역시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은 ‘표충사(表忠寺)’ 현판이 붙은 문루를 지나면 왼쪽에 유물관(遺物館), 표충사(表忠祠), 표충서원(表忠書院) 등 건물 3동이 보인다. 표충서원은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休靜 西山大師)·사명대사(惟政 泗溟大師)·기허대사(靈圭 騎虛大師) 3대사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선조 임금이 ‘표충서원’이라고 사액했다. 원래는 사당이었던 것을 1839년 현재의 위치에 있던 영정사 안으로 옮겨 ‘표충서원’이라 이름 지었으며, 사찰의 이름 또한 ‘표충사’로 고쳤다. 1871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領)으로 없어졌다가, 1883년 지역 유림의 요청으로 복원되었으며 근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1927년 절을 다시 지을 때 표충서원 건물도 함께 복원했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이 절 안에는 서원이 있을 수 없으며 부처님과 3대사의 영정이 함께 있는 것은 더욱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1971년에 표충서원을 절의 서쪽에 위치한 팔상전으로 옮겼다. 서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이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행하는 제사도 승려가 아닌 관리가 주재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보물 제467호)은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4-9, 표충사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3층석탑이다. 탑 앞에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으나 이 곳은 탑(塔)과 석등(石燈)이 놓였던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인데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삼층석탑(三層石塔)의 기단(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塔身部)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新羅石塔樣式)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출토 유물 일괄(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出土 遺物 一括, 보물 제1944호)은 1995년 실시된 삼층석탑의 해체보수 과정에서 기단 적심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들 유물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20구의 금동불상과 탑에 봉안된 여러 공양물, 석탑의 보수를 알려주는 조선 초기의 <개수기비(改修記碑)>(1491년)를 포함하고 있다. 불상 중에는 머리와 대좌 등이 파손되어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으나 출토지가 분명한 곳에서 시기를 달리 하는 많은 불상이 일괄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석탑 내에 사리장엄구 이외 불상을 봉납한 사례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형식과 양식, 그리고 시대별 층위를 가진 불상이 다량으로 봉납된 사례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드문 경우이다. 또한 이는 통일신라 9세기 대에 건립된 석탑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실증적 자료이기도 하다.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불상 및 청동탑편,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상평통보 등은 금동불상 연구와 석탑의 공양의식, 중수사례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되므로, 일괄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였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국보 제75호)은 표충사 소장,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로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향완(香垸)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이 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銀入絲)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銀入絲)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雲龍文)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북면 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로왕의 창건 설화를 간직한 밀양 만어사(密陽 萬魚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이 절은 46년(수로왕 5)수로왕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수로왕 때 가락국의 옥지(玉池)에서 살고 있던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羅刹女)가 서로 사귀면서 뇌우(雷雨)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였다. 수로왕은 주술(呪術)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하였으나 불가능하였으므로 예를 갖추고 인도 쪽을 향하여 부처를 청하였다. 부처가 신통으로 왕의 뜻을 알고 6비구와 1만의 천인(天人)들을 데리고 와서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고 설법수계(說法授戒)하여 모든 재앙을 물리쳤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수로왕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터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절의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미륵바위라고 하며, 이 미륵바위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득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륵전 아래에는 무수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고기들이 변해서 된 만어석(萬魚石)이라 하며, 두들기면 맑은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이라고도 한다.
창건 이후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1180년(명종 10) 중창하였으며, 1506년(중종 1)화일(化日)이 중건하였다. 이어서 1879년(고종 16)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미륵전·삼성각(三聖閣)·요사채·객사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만어사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181년의 중창 때 건립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견고하게 정제된 탑이다. 또, 산 위에 있는 수곽(水廓)의 물줄기는 매우 풍부한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씻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밀양 만어사 삼층석탑(密陽 萬魚寺 三層石塔, 보물 제466호)은 지금의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석탑도 지금의 위치가 원래 세워져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밀양 만어사 삼층석탑(密陽 萬魚寺 三層石塔)이 현재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에서 퇴화된 자취가 엿보이지만 각 부의 구조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密陽 小台里 五層石塔, 보물 제312호)이 세워졌던 절은 조선 숙종 때 폐사되었다고 하며, 절 이름도 확실한 근거가 없어 천주사(天柱寺)·죽암사(竹巖寺)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단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基亶) 구성의 형식이 독특하고 탑신(塔身)에서도 특색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단(基壇)은 1단이면서도 4장의 긴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2구씩 새겼다. 윗면 중앙에는 별도의 돌을 얹어 탑신 괴임을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그 윗면이 지붕돌처럼 경사져 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을 제외하고는 몸돌·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 몸돌은 각 모서리에 두툼한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높이가 매우 높다. 이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도 크게 줄고 기둥조각도 훨씬 좁아졌다. 지붕돌은 처마끝이 위로 들린 정도가 경쾌하고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네 귀퉁이에는 독특하게도 작은 연꽃무늬 조각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방울장식을 달았던 듯한 큼직한 구멍이 있다. 탑(塔)의 머리에는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과 철로 만든 기둥의 한 끝만이 남아 있다.
1919년 탑머리에서 고려 예종 4년(1109)이라 기록되어 있는「당탑조성기(唐塔趙成紀)」가 발견된 바 있어 탑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밀양 월연대 일원(密陽 月淵臺 一圓, 명승 제87호)은 조선조 중종 때 지조와 청명(淸名)으로 빛나는 월연(月淵) 이태(李迨) 선생이 만년에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관직을 물러나 낙향하여 중종 15년에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의지로 조성한 별서이다.
이태 선생은 낙향하여 쌍경당과 월연대 등의 건물을 세우고 주변 풍경을 아름답게 조경하였다고 전해진다. 월연대는 밀양 8경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조경문화답게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지은 것이 그대로 눈에 보인다. 작은 돌들을 모아 가지런하게 쌓은 석축과 토담, 그 위에 자연스럽게 놓인 건물들이 무질서한 듯 멋스럽다. 또한 밀양 월연대 일원에서 보이는 강변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보름달이 뜨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밀양강과 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월연대 일원에서 조망되는 강변 풍경과 보름달이 떴을 때의 월주경(月柱景)이 매우 아름다우며, 바위에 새겨진 암각글씨와 월연대 12경등 다양한 문화 경관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명승지이다.
밀양 숭진리 삼층석탑(密陽 崇眞里 三層石塔, 보물 제468호)은 현재 경작지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며 근처의 밭과 개천에서 많은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구체적인 사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가리사(加利寺)의 옛터라고 전하고 있다.
탑의 모습은 현재 기단(基壇) 아래부분이 파묻혀 있어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으나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탑신부(塔身部)는 1·2층 몸돌이 각각 한 돌이고, 1층 지붕돌도 한 돌이지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을 한 돌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몸돌의 각 면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각 층의 심한 체감 비율로 인해 기단부에 비하여 빈약한 느낌이다. 지붕돌 아래는 받침이 3단씩이고 윗면에는 1단의 낮은 괴임을 두었다. 떨어져 나가있던 3층 지붕돌을 올릴 당시에 3층 몸돌의 한가운데에 사리공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기단부가 1단으로 구성되고 지붕돌의 경사가 급한 점, 괴임이 낮은 1단으로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최우성, 신한국문화신문 기자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