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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강의

선사님들의 입적

작성자수천(無不通知)|작성시간19.09.04|조회수281 목록 댓글 0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는 선종. 이런 까닭에 옛 선사들은 파격적인 언어와 기행(奇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중생 제도를 위해서라면 계율을 넘어서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던 무애행을 보였다. 그렇다면 현생을 마감하는 선사들의 임종 순간은 어떨까.


‘전등록’, ‘임제록’ 등 선어록에 따르면 대다수의 선사들은 여느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누워서 입적했지만 몇몇 선사들의 경우 앉거나(坐脫) 꼿꼿이 서서(立亡) 임종하거나, 걷다가 죽음을 맞고,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서 적멸에 드는 등 숱한 기이함을 보이기도 했다.


‘전등록’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 때 마조도일 선사 문하의 운봉 스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역대 큰 스님들의 열반상”에 대해 물었다. 이에 옆에 있던 제자들이 “아난존자는 허공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스스로 다비를 했고, 어느 스님은 앉은 자세에서 좌탈했으며, 방 거사는 친구인 고을 태수의 무릎을 베고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운봉 스님은 “나는 그 분들과 다르게 죽겠다”며 물구나무를 선 채로 그대로 입적했다.


또 당나라 때 곽산경통선사는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음을 직감하자, 장작을 뜰에다 준비하고 여러 도반들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그리곤 손수 촛불을 들고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손에는 주장자를 들어 항마저(降魔杵)의 모습을 나타낸 채 불길 속에서 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가하면 중국 조동종을 창종한 당나라 때 동산양개 스님은 어느 날 법상에 올라 “오늘 난 갈라네”라는 말을 남기고 법석에 내려와 자신의 방에서 앉은 채 적멸에 들었다. 이를 본 제자들과 신도들이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러자 네댓 시간 흐른 뒤 양개 스님이 다시 깨어나 대중들을 향해 “갈 때가 되어서 가는데 왜 그리 우느냐”며 오히려 호통을 쳤다. 이후 양개 스님은 7일간 대중들을 안심시키는 법문을 한 뒤, “자 이제는 내가 가도 되겠지?”라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입적했다.


‘임제록’에도 선사의 기이한 죽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제 스님의 도반이었던 보화 스님은 스스로 장터로 관을 끌고 가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선어록에 따르면 선가의 제3조인 승찬 스님은 뜰 앞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입적했고, 당나라 때 단하천연 스님과 관계지한 스님은 걸으면서 입적했다. 또 오조 홍인 스님을 비롯해 육조 혜능, 마조도일, 임제의현, 영명연수 스님 등 수많은 선사들이 앉아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선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죽음을 독특하게 맞이한 선사들의 일화도 적지 않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도 법상에 올라 대중설법을 마친 직후 그 자리에서 좌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광사지’에 의하면 1210년 2월 지눌 스님은 모친을 천도하기 위해 법회를 열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설법하는 것도 오래지 않을 것이니, 부디 각자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곤 한달 뒤 스님은 다시 법석에 올라 마지막 법문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또 근대에 이르러서도 경허 스님의 상좌인 수월 스님과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한암 스님도 좌탈했으며, 이후 서옹·양익 스님 등도 앉은 채 삶을 마무리 했다.


그렇다면 많은 선사들은 왜 평범한 임종 방법을 버리고 기이한 죽음을 선택했던 걸까.


이와 관련 옛 선사들의 열반 모습을 조사해 온 광전 스님(조계종 사서국장)은 “이는 신통을 보임으로써 중생들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불법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자비로운 배려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윤창화 민족사 대표도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죽음까지도 초연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선사들의 기인한 죽음이 수행자로서 수행 경지를 나타내는 척도로 왜곡되거나 지나치게 이상화 되면서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스님의 수행력을 부각하기 위해 입적 이후 좌탈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좌탈에 대한 고집은 오히려 순수한 선사들의 입적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벽암록’ 등 선어록을 번역해 오고 있는 지현 스님은 “선사들의 기이한 죽음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집착을 만들 뿐 아니라 선의 근본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며 “부처님을 비롯해 옛 선사들의 대다수가 누워서 적멸에 들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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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록>으로 본 ‘좌탈입망(坐脫立亡)’ 일화들


 

 
중국 선종의 역사서인 <전등록>에 보면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 다음 선택한 시간에 열반을 맞이한 선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의 제사를 먼저 치르게 한 화산덕보 선사

먼저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선사는 입적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미리 스승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제수(祭需, 제사음식)가 진수성찬이었음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제자들이 올리는 음식과 절을 모두 받고 나서 “내일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면 가겠다”고 하고는 정말 다음 날 눈이 내리자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했다고 한다.


#제발로 관에 들어가 입적 맞은 보화선사

임제의현(臨濟義顯, ?-- 866)의 도반인 보화(普化) 선사는 입적에 이르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관 속에 들어가 열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이 <전등록>은 물론 <임제록> 37단에도 나온다.
이 선어록에 따르면,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棺)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내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으로 구름처럼 몰려 가보니 폭삭 속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엔 또 남문 밖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고 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보니 역시 또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러기를 3일, 4일 째 되는 날엔 그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혼자 관 속으로 들어가 길 가는 사람에게 뚜껑에 못질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소식이 즉시 시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서 관 뚜껑을 열어보았다.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달랑달랑 울릴 뿐이었다.


#물구나무 서서 입적한 등은봉 선사

등은봉(鄧隱峰) 선사의 일화도 있다. 등은봉 선사는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다. 등은봉 선사는 평소에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고래(古來)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는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선사는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하더니 그대로 입적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달겨 들어 넘어뜨리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다비(화장)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비를 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소식은 삽시간에 고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침 비구니스님으로 있던 속가 누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누이동생은 “오라버니는 살아 생전에도 괴팍한 행동만 일삼더니 죽어서도 계속 골탕을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꼼짝 않고 서 있는 오빠의 시체를 ‘탁’ 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좌탈한 명허 스님, 12년간 토굴서 장좌불와

 

삶과 죽음이 둘 아니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

감산 대사의 <몽유집(夢遊集)>
 


몇 년 전 시작된 웰빙(well-being) 붐이 최근에는 잘 죽어야 한다는 의미의 웰다잉(well-dy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이러한 웰다잉의 원조가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고, 이를 초월해 생사를 자유자재로 누리는 선()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생사와 열반의 대립을 초월한 선사들의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란 깨달음의 삶과 극적인 임종이야말로 수행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던져주는 말없는 가르침에 틀림없다.

지난 1 26오후 1 30, 앉은 채로 입적[坐脫]한 용담당(龍潭堂) 명허(明虛) 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는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2003년 입적한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스님에 이어 청원 탄공선원의 탄공 스님, 고창 선운사의 기산 스님,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 이은 또 한번의 좌탈 열반상인 것이다.

 

 

 


세수 63, 법랍 38세로 입적한 명허 스님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 해발 1000여미터 고지에 2칸으로 토굴을 지어 12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오랜 기간 눕지 않고 하는 참선)와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엔 일체의 곡기를 끊는 수행)으로 용맹정진해 온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열반하는 날 미리 입적을 감지하고 토굴 500여 미터 아래에 거주하는 홍금선(45) 신도의 부축을 받은 후 앉은 채로 좌탈한 것이다. 홍씨는스님께서 1주일전부터 몸져 누우셔서 시봉을 해드렸는데, 입적 당일 일으켜 달라 하셔서 몸을 앉히자마자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육신을 소멸해 없어질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 하여 일명똥자루라 부르며 몸을 벗는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탈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기뻐한다. 특히 선사들은 임종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다)이라는 극적인 모습을 통해 생생한 묵언의 가르침을 보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삼조승찬 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보화 선사는 요령 소리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등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관계 선사는 몸을 태울 화장나무를 미리 준비해 그 위에 서서 열반했고, 보조 국사는 제자들과의 백문백답을 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그대로 입적하기도 했다
.

고승들의 이러한 좌탈입망은 선()의 궁극적 목적이 생사로부터의 해탈에 있음을 일깨우는 마지막 법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사의 근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의 삼법인을 철저히 요달해야 한다. 모든 존재에 실체성이 없다는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의 관점에서 보면 생(), ()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과 환상같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과 사가 모두토끼 뿔’, ‘거북 털과 같이 이름으로만 존재하기에 생과 사가 다를 바가 없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인 것이다
.

따라서 선가에서는 생과 사, 생사와 열반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망념으로 본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생사는 싫어하면서 열반은 얻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결코 생사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반의 참뜻은지금 여기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피안(彼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此岸)이 곧 피안이고,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둘 아닌[不二]’ 이치를 깨달을 때 삶의 현장 속에서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좌탈입망이 그대로 완전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생사에 자재한 그러한 모습만으로도 후학들에게 환희심을 주고 발심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좌탈한 명허 스님 역시 남이 알아주건 말건 평생을 치열하게 용맹정진한 수좌(首座)로서 소리 소문없이 많은 스님과 신도들의 존경을 받은 스승이었다.

1944년 8월 17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전통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주천(李柱泉) 거사의 4남으로 태어난 명허 스님은 20세에 43경 등 한학을 통달했다. 5년간 막동리에서 서당훈장으로 43경을 가르치다가 문자와 세속 삶의 무상함을 느껴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해 69년 도광 스님을 계사로, 도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화엄사 승가대학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오대산 북대와 상주 선역사 등 제방선원에서 운수안거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고향인 막동리에 산중토굴을 지어 장좌불와 수행에 들어갔다
.

스님은 토굴수행을 하면서도 찾아오는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한편 불치병에 걸린 많은 신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등 남모르게 보살행을 실천해 왔다. 12년전 상주 선역사 일대의 토지 1만여평을 연꽃마을에 기증하는 등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특히 중국 소림사에서도 수련자가 드문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수련, 본격적인 참선에 앞선 몸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스님은 <달마역근경>을 번역한 <역근세수(易筋洗髓)의 비결>이란 책을 무료로 보급하기도 했다
.

한편 명허 스님의 다비식을 봉행한 화엄사 문도스님들은 스님의 사리를 화엄사와 상주 선역사의 부도에 봉안키로 했다. 또 스님의 유품인 사고전서, 대장경, 역경집성, 정통도장 등 3천 여권의 유, , , 한학관련 희귀도서는 유언에 따라 화엄사 도서관에 기증했다. 화엄문도회는 2 1일 거행한 여수 흥국사 초재를 시작으로 구례 천은사, 금산 태고사, 고양 선재정사, 고양 상운사, 예천 법흥사, 구례 화엄사 등에서 2재부터 7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여수 흥국사=김성우 객원기자  2007-03-07 붓다뉴스

 

▼ 아래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gksdka1876?Redirect=Log&logNo=120030048980

 

좌탈입망 [坐脫立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생사가 동일할 지언데 그대는 편안하게 입적하실겐가?

나는 집이나 병원에서 똥 오줌 살까 두려우이~~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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