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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마당

제산 박재현 선생님 일화

작성자釧溟|작성시간02.12.24|조회수580 목록 댓글 0

박정희와 박재현,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相生의 관계로 놓아두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이때 박정희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은 사람이 바로 청와대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 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維新이 幽神, 즉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얼마후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은 제산의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지리산은 예부터 기인·달사·도사들이 숨어 지내는 산으로 이름이 높다. 제산 박재현은 청년 시절 지리산 일대를 10여년간 떠돌면서 가진 수많은 기인·달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靈氣에 눈이 띄였던 것 같다.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소유자. 한국 명리학계의 빅3 가운데 한 사람인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 1935~2000).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극락산 자락에 맺혀 있는 을해명당(乙亥明堂)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제산은 과연 비범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얌전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보였지만, IQ만큼은 대단했다.

‘서상에 신동 났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제산의 유년시절 이름은 광태(光泰)였다. 광태는 어렸을 때부터 ‘일람첩기’였다. 한번 죽 훑어보고 단박에 암기하는 능력을 가리켜 일람첩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 스캐너(scanner)인 셈이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인물을 수십년간 고대했던 광태의 조부는 신동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자인 광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다.

광태가 학교에 가면서 혹시 도시락을 안가져가는 날이 있으면, 조부는 직접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 문앞에 가서 기다렸다. 손자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조부가 당신 방으로 불러 공부를 시켰다. 극성스러울 정도의 손자 사랑에 광태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손자를 감싸고 도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광태를 나무라느냐”고 호통치곤 했다.

후일 광태가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포기하고 지리산 일대의 산천을 정처없이 유랑하는 낭인으로 전락했을 때도 손자에 대한 조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희 안목으로는 광태를 모른다. 내 말만 들어라. 산으로 가서 공부하겠다면 잡지 말아라. 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둬라.”

이 말이 아들·며느리에게 남긴 조부의 유언이자 당부였다.
제산은 서상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농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진주농림은 당시 5년제였는데, 제산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뽑혔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제산으로 하여금 조용히 공부나 하게 놔두지 않았다. 중2때 6·25가 터진 것이다. 피난을 가야 했다. 부랴부랴 진주에서 고향인 서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목탄으로 불을 지펴 움직이는 목탄차를 탔다.

서상으로 오던 도중 이 목탄차가 비행기 폭격을 피하려다 비탈길에서 그만 엎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제산은 다리가 부러졌고, 전쟁 와중에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제산은 그만 앉은뱅이가 돼 버렸다. 3년 동안 집에서 앉은뱅이로 있던 제산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에서 놀아야만 했다. 그후 물리치료를 받아 겨우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동년배 또래들과 많은 격차가 나 있었다. 집안의 다른 사촌들은 정상적인 과정을 마치고 이미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광태(제산)는 시골의 거창농고에 다녔다.

거창농고의 선생들은 수업시간에 제산 학생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창농고 재학시절 제산과 같은 하숙방을 썼던 동기는 다음과 같은 술회를 남겼다. 하숙방에서 친구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제산은 방에 누워 친구가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제산은 몸이 약해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산은 친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는 70점을 받은 데 비해 누워 있던 제산은 만점을 받는 희극이 연출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였다. 하지만 제산은 보편적인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무엇하느냐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제산을 키운 것은 8할이 지리산이었다

거창농고 졸업 후에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 이 산 저 산을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낭인과’(浪人科)에 입학한 것이다. 머리 좋은 천재가 낭인과로 들어가면 관심 갖는 분야가 바로 도통(道通)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나는 왜 이런 팔자인가 라는 의문을 거쳐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가 도대체 무엇인가에까지 이른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도를 통하고 싶은 대원(大願)이라고나 할까. 청년 제산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지리산 일대의 도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역사 이래 한국 최대의 ‘도인구락부’가 아니던가. 지금도 어림잡아 2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의 낭인과가 운집해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이 시절 청년 제산의 모습은 거렁뱅이에 가까웠다. 춥고 배고프고 노잣돈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완전히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불가의 의례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서는 이처럼 외로운 구도자의 심경을 ‘독보건곤 수반아’(獨步乾坤 誰伴我)라고 읊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걸어가니 그 누가 나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일러 단독자(單獨者)의 삶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부은 자는 그 길을 회피할 수 없는 법.

제산은 지리산 둘레의 산청·함양·운봉·구례 등지를 방랑하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숨어 사는 수많은 기인·달사들과 교류를 가졌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를 섭렵하게 되었다. 유교의 사서삼경과 불교의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을 비롯한 제반 불경, 도교의 벽곡(酸穀)·도인(導引)을 비롯한 호흡법과 ‘성명규지’(性命圭旨) 같은 비서(秘書)들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로만 듣던 천문·지리·인사로 통칭되는 재야의 학문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기인·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제산은 어느새 영기(靈氣)가 개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靈氣),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쪽 기능은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의하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지막에는 이를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제산은 타고난 명민함에 이 산 저 산을 순례하면서 기도와 선정의 묘미를 터득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되면 쌍권총을 찬 격이다. 제산의 지리산 시대를 계산해 보니 대략 10년 정도 된다. 31세에 결혼하면서 지리산 시대를 마감하였다고 보면 대략 20대 초반부터 30세까지 지리산 일대를 방랑한 셈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말이 있듯 ‘제산을 키운 것은 8할이 지리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의 제안 “함양군수를 시켜 주마”

제산의 지리산 시대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박대통령과의 만남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중엽인 22~30세 무렵 군대에 갔다 와야만 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한 곳은 부산의 군수기지였다고 전한다. 필자가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제산은 부산의 군수기지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과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제산은 졸병으로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령관인 박정희 장군과 졸병이었던 제산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명’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계급으로는 졸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던 제산은 박장군과 계급을 떠나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장군과 일등병의 관계였지만, 운명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는 카운셀러와 내담자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역술가 앞에서 운명을 문의할 때는 지도받는 학생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제산은 이때 박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후일 제산이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박장군과 자신은 사석에서 만나면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16 이후에는 박대통령이 제산에게 함양군수를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제산은 가끔 “박대통령이 나에게 함양군수 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그까짓 함양군수 하면 뭐하나? 이렇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지!”라는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에게 털어놓곤 하였다.


남산 다녀온 후 한동안 기관원 공포증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상생(相生)의 관계로 몰고 가지만은 않았다.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符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대통령은 70년대 초반 10월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대통령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저승 ‘유’(幽)자에 귀신 ‘신’(神)자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끄적거린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이 담뱃갑을 박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하면서 주머니에 챙겨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비서관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은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도사도 초대받아야만 했던 시대였다. 중생이 고통받는데 도사라고 어찌 무사하리오! 역사라는 쳇바퀴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깨닫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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