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피크닉 신영호 강사입니다.
오늘도 마음의 에센스를 밝히고
세상만사에 대해서 여여하고 초연할 수 있는 심성을 들여다 보는 시간으로
금강경의 명구절 "심심미묘법" 패시지(passage)를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즐거운 정독이 되셨으면 합니다.
평어체로 진행합니다.
*** 금강경의 위치와 문제의식(화두)
금강경은 반야경 계열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텍스트이다.
이 경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보다, 깨달음에 집착하는 마음 자체를 잘라낸다.
그래서 금강(金剛)이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여 어떤 관념도 베어내는 지혜라는 뜻이다.
선사(Zen Master)님들의 취모검과 비슷함... 미세한 한 올의 털끝 하나도 정밀하게 베어버리는...심검...
도학인과 역술가에게 이 경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다루는 사람들이다.
도는 기(氣)와 이치의 흐름이고, 역술은 시간·상징·운명의 구조다.
문제는 이 보이지 않는 질서를 ‘실체화’하는 순간, 수행과 해석은 바로 독이 된다.
금강경은 그 지점을 정확히 겨눈다.
심심미묘법이란 무엇인가?
금강경에서 말하는 심심미묘법, 즉 “甚深微妙法”은 문자 그대로
심심: 지극히 깊고
미묘: 눈에 보이지 않으며
법: 모든 현상을 성립시키는 작동 원리를 뜻한다.
** 이 구절은 아마 금강경 사구게만큼 소중한 가르침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화두로 들고 있지만 어느정도 깊은가...
감탄과 찬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각성을 했을 때 "이래서 부처님은 이를 심심미묘법이라고 밖에 설하지 않을 수 없으셨구나..."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 깊은 회고의 사유 속으로 명상(Meditation)할 때
"과연 부처님의 심심미묘법이... 본인이 생각하는 이 정도의 수준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금경경을 대면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에야 어느정도 중중무진법계와 홀로그램 우주론 그리고 스승과 제자의 문답 사례를 통해서
조금씩 증득해 가는 이 심심미묘법...
저는 아직 모른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도 아마 내일도 금강경속에 메아리치는
붓다의 경외로운 가르침들 속에 조용히 그 부처님의 그 깊고 깊은 마음을 조용히 귀기울여 경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 예를 들어,
스승이 제자 학인에게 독대하면서 묻습니다.
"자네는 어제 내가 틀린 이야기를 했는데... 왜 그 당시 끄덕이고 다 받아들이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나?
"스승님은 제가 스승님이 틀린 이야기를 그냥 듣고 있고 그대로 수용한 것을 아시고 계셨는지요?"
"물론 그 날은 몰랐지... 그러나 그 후 생각해 보니 틀린 것을 인지했네. 자네와 함께 있을 때 내가 그 때 그렇게 틀린 내용을 말해도 자네는 가만히 있기에 나도 그냥 넘어 갔었네... 내가 틀린지 모르고..."
"만약 제가 배우는 입장에서 스승님의 가르침에 맞고 틀리고, 즉 진위를 이야기한다면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제대로 공부를 배우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게 많은 입장에서 제가 어찌 스승님의 틀린 부분을 지적할 수 있는지요?"
"나도 자네가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지... 근데... 자네는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줄도 알고 있었나?"
"네... 어느정도만요... 스승님을 믿으므로 스승님도 틀린 것을 알고 계시건 모르시건 저는 분명 그 너머에는 무언가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고 틀리고보다 스승님이 틀린데애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스승님이 가르치는 내용들 중 배울 만한게 많고 스승님이 가르치려는 그 진정성 있는 마음... 저는 이를 너무 존경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스승님이 가르치는 내용들 자체도 중요할 수 있지만 굳이 너무 옳고 틀리고의 진위(참거짓)에만 신경쓰거나 집착하는 것, 그리고 가르침에 흠결을 본다면 어찌 그것이 스승님으로부터 공부하는 학인의 도리이고 마음자세인가요? 만약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배운다면 아마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제대로 된 공부는 요원하고 스승님의 대법이 아닌 지식만을 얻게될 것일지 몰라 조심스럽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담론은 밤새 이어진다...
제자는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승도 제자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결국 스승이 제자를 믿고, 제자가 스승을 믿으면
그 둘 간에는 진위(참과 거짓)의 구별보다는
서로가 알아가고 배워가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마음으로 하나될 것이다... 사제 간의 교학상장, 절차탁마
물론 이는 금강경의 심심미묘법 가르침에 대한 단면적인 일부 해석일 뿐...
더 깊은 화두로 참구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법은 ‘비밀 공식’이나 ‘고급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심심미묘법은 (상을 지니고) 말해지는 순간 이미 어긋난다.
붙잡는 순간 이미 사라진다. 그래서 금강경은 반복해서 말한다.
“이것은 법이 아니다. 이름하여 법이라 한다.”
** 말이나 글이나 어디에도 걸리지 말라...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라)
이 문장은 도학인과 역술가에게 치명적(ciritical)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모든 비전, 비법, 노하우, 술수를 동시에 부정하기 때문이다.
도학인에게 주는 가르침: 도를 도로 만들지 말라.
도학에서 가장 큰 함정은 ‘도에 대한 자아’다.
나는 기를 안다
나는 단전을 안다
나는 소주천을 안다
나는 도맥을 열었다
이 순간, 도는 이미 막힌다.
금강경의 심심미묘법은 말한다.
도는 흐르나, ‘도인’은 없다.
작용은 있으나, 주체는 없다.
도학 수행에서 진짜 위험한 것은 기의 과잉이 아니라 자의식의 고착이다.
금강경은 수행자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집착, 즉 ‘수행하는 나’를 베어낸다.
그래서 이 경은 고급 수행서일수록 반드시 함께 읽혀야 한다.
도학적으로 풀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氣)는 쓰되, 기를 쓰는 자가 되지 말 것
법(法)은 작동하되, 법의 주인이 되지 말 것
체험은 오되, 체험자에 머물지 말 것
이때 심심미묘법은 ‘공허’가 아니라 ‘자동성’으로 드러난다.
무위이되 무력하지 않고, 비개입이되 방임이 아니다.
역술가에게 주는 가르침: 해석자를 비워라
역술에서 가장 미세한 업은 ‘맞추는 나’다.
이 사람의 팔자는 이렇다
이 운은 흉하다
이 선택은 필패다
이 언어가 강해질수록 역술가는 무거워지고, 내담자는 갇힌다.
금강경의 심심미묘법은 역술의 모든 전제를 해체한다.
운명은 있다. 그러나 고정된 주체는 없다.
상은 있다. 그러나 실체는 없다.
팔자는 작동한다. 그러나 단정할 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말하는 ‘상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역술적 상징은 파도이지 바다가 아니다. 파도를 읽되, 바다를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급 역술일수록 다음 원칙이 필요하다.
해석은 하되, 판결하지 말 것
구조는 보되, 존재를 규정하지 말 것
경향은 말하되, 자유를 닫지 말 것
심심미묘법은 역술가에게 예언 능력을 주지 않는다.
대신 ‘업을 만들지 않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진짜 고급이다.
*** 심심미묘법과 공(空): 없음이 아니라 비고정성
많은 수행자와 역술가가 ‘공’을 허무로 오해한다.
그러나 금강경의 공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음’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이렇게 말한다.
보살은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한다.
상에 머무르지 않기에 공덕이 한량없다.
이 논리는 도학과 역술에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에 머무르면 힘은 생기나 업이 생긴다.
공에 머무르면 힘은 흐르나 업이 남지 않는다.
심심미묘법이란 결국 이 지점이다.
작동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
개입하되 소유하지 않는 지혜
*** 알되, 아는 자를 만들지 않는 인식
금강경이 요구하는 수행자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금강경은 수행자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특별함을 해체한다. 그래서 이 경은 수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도학인과 역술가에게 이 불편함은 필수다.
정리하면 금강경이 요구하는 심법(태도)는 세 가지다.
첫째, 체험을 자아로 만들지 말 것
둘째, 해석을 권위로 만들지 말 것
셋째, 깨달음을 정체성으로 만들지 말 것
이 세 가지만 지켜도 심심미묘법은 자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결론: 심심미묘법은 비법이 아니라 자세다
심심미묘법은 숨겨진 주문도, 고급 테크닉도 아니다.
그것은 삶과 수행, 해석 앞에서 취하는 하나의 자세다.
너무 깊어 설명할 수 없고, 너무 미묘해 붙잡을 수 없기에, 오히려 가장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도학인에게는 수행의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며
역술가에게는 해석의 카르마를 씻어내는 칼이다.
금강경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경은 언제나 ‘나’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피크닉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