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이토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을 가는 순간이었지요.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사살한 뒤 뤼순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조 여사는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 의사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뒤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숨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가 근래에 들어 뒤늦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안의사의 용감한 삶의 이면에는 아들만큼이나 용감하고 나라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열사의 어머니, 조 여사의 삶과 활동을 조명한 3.1여성 동지회 박용옥 회장의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의 항일구국적 생애" 논문에서 "안중근이란 인물을 만든 것은 그 어머니의 '모성 리더십' 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 여사는 국채보상운동 때 자신의 패물을 선뜻 내놓아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 자 의연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해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 때 조 여사는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고 격려했습니다.
2년 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통감을 사살하고 수감됐을 때는 안의사 동생들을 보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또 사형이 선고된 뒤 편지와 함께 명주 수의를 보냈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그 수의를 입은 채 형 집행을 당했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대한의 남아답게 용감히 죽음을 맞으라고 사형대의 수의를 지어주면서 편지를
쓰는 어머니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조마리아 여사 마음에는 무엇에 대한 확신이 있었길래 그렇게 강한 어머니로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를 통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의 무사안일한 무조건식 자식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로만 기억하시지 마시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안중근 의사를 장렬히 목숨 바치셨던 그런 날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11명의 동지들과 나라를 지키자며
손가락을 잘라 결의를 다지기도 했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는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안중근 의사의 유언-
장르;팝 발라드 발표연도;1967년 기록;싱글챠트 16위 국적;영국 수록앨범;Bee Gees' 1st 휴일 같은 사랑의 발라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