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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숙

2025 한국산문 4월호 '오늘만 사는 사람'

작성자호호북|작성시간25.04.01|조회수37 목록 댓글 0

<2025 한국산문 4월호 양효숙 수필>

 

오늘만 사는 사람

 

사립학교 교사인 동생은 오늘만 산다고 이십 년 전에도 말했다. 오늘도 대전에서 익산까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기차를 탄다. 어떻게 매일 그렇게 할 수 있냐는 말에 “누나, 나는 오늘만 다녀온다고 생각해.” 오늘이란 시간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정의하며 사는 이들이 어디 남동생뿐일까.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만 사는 이들에 의해 세상은 움직인다. 제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지구의 자전축처럼 제 몫을 다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오늘도 마지못해 사는 인생 뒤로 오늘만 사는 차별화된 사람이 보인다.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나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왕년에 잘 나가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 가상현실에 갇혀 사는 시간도 점점 늘어난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인 듯 보여도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이 통으로 다가오고 그 사람에게서 또 다른 세상이 보이고 읽히기에 겸손할 수밖에.

운전직으로 정년퇴직한 후 시설직 용역으로 다시 학교에 온 분이 있다. 아침 일곱 시 무렵에 출근해서 학교를 마치 사람 돌보듯 한다. 행정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고 방치된 공간을 쓸고 닦는다. 개교 이래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계약서대로 움직이지 않고 융통성을 발휘한다. 원래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오다니. 오늘만 일하고 말 것이냐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계약한 시간만 있다가 가면 된다고 모두 말리는 분위기다. 다른 누군가 대신해 주지 않는 내 일이기에 하는 거라고. 애들이 오기 전에 책걸상 등 손을 봐둬야 한다고. 그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뭔가를 바라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며 자기만족도가 높은 선택이란 걸 쉽게 확인한다. 교장은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다며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하지 않고 아무나 들을 수 없는 말이 오간다.

운전직으로 학교에 근무할 때 상조회장도 해봤다니 그만의 대인관계도가 그려졌다. 대부분 상조회장은 부장급 교사가 맡아서 교직원의 친밀감과 화합을 이끌어낸다. 어느 조직이든 갈수록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뭔가 해보려는 의지보다 책임지는 직책으로부터 벗어나 묻어가려는 세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소신껏 움직이는 이들에 의해 감동한다.

미담 제조기 같은 이들이 조직에서 흔치 않다. 업무와 연결된 관계의 밀도도 촘촘하기 쉽지 않다. 기존 주무관이 손 놓고 있던 일을 말하기가 무섭게 해결해 준다. 원래부터 타고난 시설주무관인 것처럼. 최소한의 주어진 일만 하자고 의기소침해 있던 조직에 새로운 핏줄기가 돈다.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이런 시설주무관을 처음 본다는 입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뭔가 보상해 주고 싶도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쉽게 감동하지 않는 마음에 보상 심리가 활성화된다. 따뜻한 차 한잔을 내밀며 자연스럽게 건네는 사적인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오간다. 그가 원하던 대로 여섯 시간 계약도 성사됐다. 여덟 시간은 오히려 원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의사 표현했다. 기분 좋게 일하며 즐기려는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20년 된 학교의 역사는 찌든 먼지와 함께 닦이면서 새롭게 씌어진다. 파인 곳마다 새살이 차올랐다. 5층 건물과 운동장 위로 연결된 만국기가 펄럭였다. 인조 잔디로 뒤덮인 운동장과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환호성이 터진다. 체육대회 하루 행사에 귀찮다는 이유와 위험하다는 설득력으로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의 꿈을 응원하며 바로 떼지 않고 2주 이상 펄럭이도록 했다.

소신껏 즐겁게 일하는 이를 아무도 못 말린다. 퇴직이 3년 남은 내게 정년이 연장돼 함께 더 있길 바란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오늘만 사는 사람들의 태도가 남다르다. 그동안 학교도서관 사서로 세 곳을 거쳤다. 학교 분위기는 주로 관리자들에 의해 달라졌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는 교장 권한은 완장처럼 쓰였다. 다시 돌아가도 동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말하고 움직일 뿐이다. 때론 색깔이 다른 소신끼리 부딪칠 때도 있다.

오늘도 사는 게 아니라 오늘만 산다고 말했을 뿐인데 마법처럼 일상이 바뀐다. 제시간에 출근한 것도 하나의 성공담으로 의미 부여된다.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지금 이 순간을 희생시키듯 살기보다는 현실 만족도에 관심을 둔다.

종이책들이 한국십진분류표에 의해 도서관에서 제 자리를 잡듯이 오늘만 사는 사람책들도 유유상종 모여있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기보다는 당당한 자기만의 입지를 구축한다. 읽고 싶은 대로 읽거나 해석하는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관계 맺으면서.

방학에도 출근하는 이들이 정해져 있다. 방학이어서 한숨 돌리거나 재충전의 기회로 대부분 여기지만. 대부분 학교가 방학을 이용해 공사하느라 외부인들이 더 눈에 뜨인다. 업체에 맡기지 않고 작업복 차림으로 교실 전체를 혼자 페인트칠 하는 시설주무관이다. 비용 절감에 기여하는 그에게 또다시 시선이 모아진다.

각자 고유 업무를 하면서 우린 교직원으로 연결돼 있다. 졸업하는 날까지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지 않는 애들 명단부터 뽑았다. 담임이나 학생과 연계하다가 학부모와 직접 연락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연체도서 변상 방법을 몇 차례 안내했는데도 무응답으로 일관할 때 흔들리기도 한다. 이렇게 버티면 되는구나 혹시라도 좋지 않은 여지를 줄까 봐 심리전을 펼친다.

학창시절 이후로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며 대출하러 온 시설주무관을 기쁘게 맞이한다. 시국과 맞물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말에도 귀 기울인다. 오늘만 사는 사람들이 주로 나누는 얘기가 엇비슷하다고. 이런 시설주무관과 작가 등으로 자리매김된 채 선한 영향력과 희소가치를 드러낸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기념하거나 기록에 남기고 싶다. 과거가 현재를 구하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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