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조건
천수호
고흐는 씨를 뿌리고 나는 수확을 한다
고흐가 파묻은 씨앗에 물을 주지 않은 것에 반성하는
이상한 꿈을 지나
내가 축낸 21세기의 노오란 햇살 한 두름을 지나
사치와 허영의 시간을 지나
찬양 받은 그의 한 쪽 귀와 말라붙은 물감 밭을 일궈내어
내 잠의 깊이만한 뿌리를 캐낸다
나의 수확은 뿌리에 집착했고
고흐는 인간의 귀에 생명을 고집했다
고흐가 자신의 피조물로 백 년을 살 동안
나의 환생조건은 바뀌지 않았다
그의 비의는 환생 가능성에 너무 오래 젖어있었고
나의 기대는 다시 씨를 뿌린다
귀 큰 코끼리로 오십 년, 당나귀로 오십 년 살다 간
그의 무덤에서
우주의 가장 구체적인 구조로 베고니아가 핀다
—《딩아돌하》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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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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