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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예수님의 산상설교

작성자하나님은빛이시라|작성시간26.06.07|조회수53 목록 댓글 0

예수님의 산상설교

마태복음 5:1-12

 

성경에 기록된 복음서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도 같습니다. 마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를 그 중심에 두고, 그사이 사이에 사건들과 기적을 배치하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가 5-8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입니다.

두 번째 설교가 10장에 기록된 제자 파송 설교입니다.

세 번째 설교가 13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에 관한 설교입니다.

네 번째 설교가 18장에 기록된 제자 파송 설교입니다.

다섯 번째 설교가 24-25장에 기록된 종말 설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다섯 편의 설교 중에서 첫 번째 설교인 사상설교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보통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어떤 기대를 가지고 듣습니까?

설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시는 위로와 격려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산상에서 하신 설교 말씀을 대면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삶의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대할 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가장 먼저 팔 복의 말씀을 주셨는데 예수님이 복 있다고 하신 그 여덟 가지 마음이 내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마음 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복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죄와 악이 범벅이 되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팔 복의 말씀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이유는, 21, 27, 33, 43절 말씀에 나오고 있는 옛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거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이고, 간음 한 자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주신 율법,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은 어떤 기능을 했습니까?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도록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의의 율법을 지켜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은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기능을 했던 것이 율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팔 복의 말씀은 나타난 행위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행위보다 더 높은 법인 마음의 동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말씀이 요구하는 기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팔 복의 말씀 앞에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통해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 때문입니다.

5:48 절 말씀을 보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온전하라.’라는 이 말씀은 완전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 들을 통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차원의 삶, 하나님처럼 완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요구하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 산상설교를 놓고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습니다. 그 논의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만 간추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산상설교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7:12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된다고 해서 모두 다 이 높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사는 삶을 그 이상으로 혹은 그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가능하면 하나님의 요구에 가까운 삶을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이른 삶을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황금률의 말씀을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삶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합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아담 안에서 부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또 다른 성경에서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부패하고 죄악 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악 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상적인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줌으로 그 살아가는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알려 주는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은 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요구를 이루며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아무렇게나 막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해 줌으로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힘쓰며 살도록하기 위해서 산상설교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산상설교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예비적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없었듯이 산상설교의 말씀 들도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산상설교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주어서 속죄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듯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이 산상설교의 말씀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기능을 하여서 사람들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 주어서 죄에서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먼저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라고 하신 후에 이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심으로, 옛사람에게 말씀하신 구약의 율법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대비시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구약의 율법과 자신의 말씀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이유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이 했던 기능을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셋째, 산상설교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직인 하늘 윤리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그 삶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사람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빠르고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주신 임시적인 윤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고,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장과 같은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넷째, 로마카톨릭은 이 산상설교를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산상설교의 윤리적인 요구들이 너무 높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한 가지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마태복음 5:1절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이 산상설교의 말씀은 일반 대중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은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세대 주의자들은 산상설교를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세대 주의자들도 산상설교가 요구하고 있는 윤리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어떤 견해를 내놓았습니까? 이 산상설교의 말씀 들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세상 역사가 끝나고 난 후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지게 될 이상적인 왕국인 천년왕국 백성들이 지키며 살아가야 할 윤리이며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세대 주의 자들과 로마카톨릭 교회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지키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섯째,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윤리적인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산상설교의 말씀은 천국 시민의 윤리로서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행하며 살아야 할 실천적인 윤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견해의 특이점은 이전의 모든 견해와 달리 산상설교의 말씀 들은 그리스도인이 지켜 행하며 살아야 할 윤리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어떻게 두 부류로 나눠지는지 마태복음 5:3절의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한쪽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심령이 거만하고, 교만하고, 굳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심령 상태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마음 즉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어 가는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여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으면, 굳은 마음을 회개하고,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성도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미 가난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날 때 이미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 중에 무엇이 성경과 부합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5:3절 말씀을 다시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복 되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 말씀에는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카리오이라는 단어는 동작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존재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 복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복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존재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팔 복의 말씀을 설명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니 내 심령은 비록 거만하고, 교만하고, 굳어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자신의 심령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 가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으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마음속의 쓴 뿌리를 제거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 복에서는 그런 의미의 복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팔 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가난한 심령애통하는 심령온유한 심령을 이미 선물로 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험도 이것을 증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노력해서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노력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내게 그런 마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알려 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믿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하고,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복되다고 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시고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가난한 마음을 주실 때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며 사는 영적인 은혜 신령한 은혜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이런 이해를 산상설교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산상설교의 모든 말씀들은 너희가 이런 정도의 수준이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듯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도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산상설교의 이 복은, 결국 내가 수고하고 내가 노력해서 쟁취해 나가야 하는 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복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와 복을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이 이미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에 속한 은혜와 복들을 모두 다 주셨는데도 그 주신 복을 알지 못하여서 누리며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하늘에 속한 은혜와 땅에 속한 모든 복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신 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특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미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복을 받은 자로서 그 주신 은혜와 복을 믿음으로 누리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 목전에 두고 있었던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그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너희가 믿음으로 밟고 믿음으로 정복하는 그곳만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어도, 이들이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땅을 믿음으로 밟고 정복해 나가지 않으면 차지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밟는 곳들은 다 정복할 수 있었지만, 믿음으로 밟지 못했던 곳은 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로 되어 바벨론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70년이 지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러면 7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으니 70년이 지나가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일점일획도 변함 없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36: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 말씀을 보면 비록 70년이 차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이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예수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약속들을 어떤 사람이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고 구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으로 가려고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나안 땅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살았던 나머지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그 모든 약속들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선언하고 쟁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 적극적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심령에 역사할 뿐 아니라 우리 육신의 삶에도 역사합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이 이방인들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그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원들을 앞세우고 전장을 하러 나갔습니다.

 

이렇게 전쟁을 한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행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여호사밧 왕이 믿은 대로 역사해 주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전쟁터로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아닌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 믿지 못하였던 그대로 불레 셋과의 전쟁에서 져서 길보아 산에서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라고 하는 말씀을 믿고 나아가서 그 병을 고침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뒤따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살펴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리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권리와 특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그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의 삶에 역사하여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믿음은 우리의 육신의 삶과 영적인 삶에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깊은 영적 은혜들을 누리면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스승 중 한 명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좌절과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은혜와 복들을 다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아갔을 때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누구보다 더 깊이가 있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측량할 수 없는 영성의 높이와 깊이, 길이와 넓이를 임박한 종말 시대 속에서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다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사도 바울의 그 깊은 영성과 깊은 말씀의 이해, 그 다양했던 은사와 역사들, 그리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와 예견력과 통찰력들은 모두 다 바울이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아갈 때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까지 자신들에게 맡기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구하며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으로 그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모든 분야를 믿음으로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신앙과 교회를 개혁했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세상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다 맡기셨다는 것을 믿고,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일하며 살아가든지 내게 주어진 그 분야를 믿음으로 정복해 나가는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지금도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신 시대적인 사명을 깨닫고 내게 주어진 삶의 여건 속에서 주어진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이루고 정복하고 성취하며 살아가는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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