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1:1
서론적인 살핌
오늘은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에베소서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방문하여 세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에베소에서 전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볼로라고 하는 유명한 전도자였습니다. 이 아볼로가 먼저 에베소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선교사역을 해 오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보다 먼저 에베소로 와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나중에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이들 부부가 먼저 닦아놓은 배경을 기반으로 해서 두란노라는 서원을 빌려서 2년 3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선교 전략상 아주 중요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도시에서는 이렇게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기간을 보면 짧게는 몇 주 혹은 몇 달을 머물면서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에서는 아주 작정하고 두란노라는 서원을 빌려서 성경을 강론하고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스라는 다이아나 여신의 웅장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가로가 55미터, 세로가 115미터나 되었으며, 돌기둥 127개가 떠받치고 있는 아주 큰 신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이 신전이 얼마나 유명했든지 그 신전 모형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는 유명한 관광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라고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이 말씀은 신전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에베소를 방문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하여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 옥중에서 첫 번째 써 보낸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였습니다.
에베소서의 가장 특징적 주제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여섯 장으로 된 짧은 서신인데 그 안에는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보면 1-2장에서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고, 3-6장에서는 교회의 속성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강해
에베소서 1: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절 말씀에는 이 서신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발신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었고,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었습니다.
발신자 사도 바울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해 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까지 받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를 통해 복음의 핍박자가 변하여 복음의 전도자가 되는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장면 가운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바울이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바울을 찾아가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데려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바울을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셔서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게 되는 이 사건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울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과정들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그 주도권도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 역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해 에베소서 1:4절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예정하셨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주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해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로마서 8:29-30절에서는 붜라고 전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는 예수를 믿고 싶다.’ ‘나는 예수를 믿어야지,’라고 한다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예수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해 주시고, 때를 따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은혜요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은혜로’ ‘선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해 주시고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섬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행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살아야 할 책임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한 질문이 이것이 아닙니까?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첫 번째 한 질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질문입니다.
바울이 두 번째 한 질문은 ‘주님 무엇을 하리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자로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관한 질문입니다.
바울에게만 이 질문이 필요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이 두 가지 질문은 꼭 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늘 묻고 알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 믿는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도 늘 질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울이 구원받게 된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오려는 복음의 핍박자요 복음의 박해자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셔서 만나 주셔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두 가지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하였듯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이 두 가지 질문을 하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큰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까?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복지기관을 세우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일들도 해야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더하여 한 일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알아가고, 닮아가는 삶들은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신자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많이 알게 되는 그만큼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삶이 없으면 그 누구도 주를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난 예수님께 자신의 생애를 드리고, 그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믿음이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해 가면서 우리 구원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서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봉사하며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과는 그 의미와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난 예수님께 그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전부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알고, 또 나를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일에 나의 생애 전부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바울이 그 이후에 살았던 믿음의 삶을 통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 믿음 생활의 가장 기본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감정과 인격뿐 아니라 인성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과 성숙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가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또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넷째,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4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성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
바울은 인류가 세운 최초의 도시 중의 하나였던 다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당시 유대인의 존경 받는 지도자였던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철저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전에 자랑거리였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만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바울에게서 일어났던 변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 살았던 그 모든 삶 즉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떠나, 그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또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다섯째,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햇빛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강한 빛은 바울의 육신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3일 동안 소경으로 있으면서 나는 평생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보내주신 아나니아란 사람의 안수를 받고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나니아를 통해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전해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1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실 때 이미 앞으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실지에 대한 계획을 다 세워두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우리가 해야될 일을 계획해 놓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뿐이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들을 이 땅에 더 살게 두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시길 원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입니까?
바울의 경우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가장 먼저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진리라고 믿던 그 모든 것들을 새롭게 정립하게 됩니다(갈 1:17).
그런 후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다소에서 전도인의 삶을 살다가 안디옥 교회 부목사로 초빙을 받아 사역했습니다. 그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하는데 일생을 드리게 됩니다(행 11:25-26, 행 13:2-3).
우리의 삶에 적용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과 사명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일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 적으로 받은 일과 사명 있는가 하면, 개개인들이 개별적으로 받은 일과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1. 공통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첫째,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듯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모델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명입니다.
복음을 아무리 능력 있게 전해도 복음을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전했어도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복음 안에서 구원받도록 했을지 모르지만 그 자신은 버림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능력이나 업적이나 성취나 그 나타나는 역사보다는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내가 본받으며 살아가야 할 유일한 대상도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첫 번째 사명입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둘째,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상 함께 있으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15-1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이 명령에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쓰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이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사명입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셋째, 성령이 충만한 성도로 사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우리 사명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에베소서 5: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 24:49, 행 1:4-5). 이를 위해 항상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다스림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안으로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밖으로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입니다.
2. 개별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신 개별적인 사명은?
첫째, 그 주신 서로 다른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성품과 기질과 삶의 여건에 맞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12:6-8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8-11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둘째, 그 받은 은사로 공통의 사명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받은 은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의 은사나 되는 것 같이 혹은 그 은사가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와 기질과 성품과 삶의 환경들을 가지고 앞에서 살펴본 공통적인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공통적인 사명에서 벗어난 개별적인 사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만의 독특한 은사나 사명에 집중에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타락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28절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그 주신 모든 은사를 가지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받은 개별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통의 사명을 이루어 나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로 언제나 공동체적인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기여 해야 합니다. 이 둘이 상호 조화를 이루어 나가게 될 때 개인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공동체적인 사명과 개인적인 사명을 분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일부 개 교회들은 성장하는데 전체 그리스도인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병든 교회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공동체적인 사명보다 개 교회를 중시하는 잘못된 신앙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큰 교회가 자신이 가진 인력과 시설로 매력적인 교회를 만들어 가면 갈수록, 그래서 그 교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마치 천국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면 할수록, 그렇게 할 수 있는 교회는 성장하겠지만 그 성장이 하나님 나라 성장과는 역행하는 성장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봅니까?
교회는 본래 하나님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본래 하나님의 위해 그 인생을 바치고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런데 성장하는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좋은 시설과 훌륭한 인재와 잘 갖추어진 예배 등등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교회를 선택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세워진 교회를 나를 위한 교회로 성도들의 인식과 체질을 교회의 인식과 체질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하나님 나라의 쇠퇴는 그 속도가 가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땅 위에 세워진 그 어느 교회보다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벽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셨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나를 위한 교회로 체질이 정착되지 않고, 사도행전 1:8절에서 말씀하신 선교 명령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박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는 항구 도시라서 살인, 폭력, 각종 범죄가 일상처럼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바울과 그 선교단은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두려움 속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은 빨리 전도하여 이곳에도 교회를 세워놓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곳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힘을 덧입고 하나님을 위해 1년 6개월 동안 폭력이 일상이 되어 있는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나를 위한 교회로 만들어 가면 그 앞날이 뻔합니다.
지금 이단 종교 단체들이 교회를 이렇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들을 위한 교회로 진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는 것에 교회의 희망적인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나를 위한 기독교가 될 때 교회는 쇠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대형교회들이 선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대형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성도님은 하나님을 위해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로 일어서야 합니다.
이 변화가 한국교회에 희망적인 미래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와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개인주의, 개 교회주의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교회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교회 즉 공동체 의식을 가진 교회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것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에베소서를 살펴보고 있는 우리는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만 보는 좁은 안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의 교회로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교회를 볼 때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회로만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연합되어 있는 교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를 우리는 무형교회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소원을 가집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는 이 무형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참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형교회가 하나님이 이 땅에 세워주신 교회의 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 무형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한국교회를 보는 이런 안목의 변화가 저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고, 저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관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