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 김종완
내 집은 서울 종로의 14평 아파트다. 원룸으로 된 이렇게 작은 평수는 오피스텔인 줄 알았는데, 이건 아파트라 했다. 내가 보기엔 도시가스가 들어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집은 맨 꼭대기라 복층이다. 복층이라지만 두어 평 정도 크기의 다락방 하나가 위에 붙어 있는 꼴인데, 다락방은 문도 없고 허리를 펼 수도 없는 공간이다. 아래는 사무실로, 다락은 잠자리로 이용했다.
명색이 잡지사고 출판사이므로 편집하는 직원이 필요했다. 직원을 채용했으나 이런 환경에서 오래 견디지를 못해 겨우 책 한 권 내고나면 그만두었다. 그러길 몇 번, 그때마다 잡지는 체제가 흔들렸다. 그렇다고 모든 걸 외주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지방에서 대학 다니는 막내를 불러 올렸다. 아이가 올라오자 위층의 잠자리를 그 놈에게 양보하고 나는 아래로 내려왔다. 사실 막내가 딸아이여서 두 칸짜리 전세방이라도 얻어 살아야했지만 서울의 주거비는 촌놈의 상상을 초월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생활의 공간이 없는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고, 일이 다 끝난 다음 방을 가득 차지한 타원형 탁자를 한 쪽 벽으로 밀치고 의자들을 치우고 바닥에 잠자리를 까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최소한의 경비로 버텨내야 했다.
우리는 처음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아이는 내가 잠이 들어 이불이라도 차내면 덮어주었고, 난 그놈을 키울 땐 되어 보지 못한 자상한 아빠가 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놈은 여자고 나는 남자다. 나도 심한 야행성이지만 그놈은 더했다. 컴퓨터를 가지고 놀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아래로 내려왔다가 위로 올라갔다가,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그러다 새벽 두세 시엔 부엌으로 내려와 딸그락거리며 식사를 하고, 다시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고 똑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난 주로 밤에 일을 하는 체질인데다 내 일이라는 게 집중을 요하는 것들뿐이다. 아이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까지 귀에 거슬렸다. 아니 어쩔 땐 아이의 숨소리마저도 거슬렸다. 이건 동물의 영역싸움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밤새 영역싸움을 하다가 새벽에 내가 잠이 들면 아이는 늦은 아침까지 지켰다가 그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낮에 손님들이 와도 녀석은 잠을 자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럴 때마다 난, 아이가 밤샘을 했어요, 변명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괜히 아이를 불러들여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자책감이 나를 죄었다.
그럴수록 이 좁은 공간에 대해서 화가 났고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에 있던 화분을 꽃가게를 하는 회원에게 부탁해서 전부 치워버렸다. 화분이 몇 개나 된다고, 그것들이 자릴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한다고, 그만큼도 공간을 내어줄 만한 여유가 나에겐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난 그 푸른 생명들을 보살필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갔던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딸아이와 나는 너무나 사소한 일들로 부닥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큰 소리가 나고 아이가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무엇 때문에 그런 충돌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하찮은 의견 차이였거나 둘 중 하나가 조금 무례했을 게 틀림없다. 아이는 내려간 다음 날 사과의 전화를 했고 난 또 그앨 불러올렸다. 난 못난 애비라는, 아이는 불효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서로 조심하다가 다시 부닥치고, 또 아이는 내려갔다 돌아오고, 그러길 반복하며 지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시선이란 마치 총구를 겨누는 것만큼이나 부담스러운 거였다. 과장이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좁은 공간이라도 서로 분리만 된다면 부닥침이 덜할 것 같았다. 발코니를 유리로 막아 창고로 쓰던 곳을 치우고, 유리로 된 지붕과 벽을 두꺼운 스티로폼으로 싸고 바닥에는 전기보일러를 깔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계엔 책장을 들여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제 아랫방을 비무장지대로 비어놓고 아이는 위층에 나는 발코니방에 서로의 몸을 숨겼다. 나의 독서의 30%는 화장실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숨길 데 없는 몸뚱이의 눈물 나는 자구책이었던가. 방을 옮기고 나서 우선 눈에 띄게 나의 화장실 점유 시간이 줄었다. 우리는 비로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후 우리 부녀 사이에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강도와 횟수가 줄었을 뿐이다.
화분을 모두 다 정리한 뒤에도 화분이 간간이 들어왔다. 그러면 며칠 두고 보다가 누구에게 주어버렸다. 살아있는 것들을 좁은 공간에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나름의 배려였다. 봄 세미나 때 제법 큰 화분이 하나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거였다. 할 수 없이 아랫방 현관 쪽 붙박이 옷장 앞에 두었다. 화분 가운데 앞쪽에는 두 촉의 양란, 뒤쪽으론 심비디움 그리고 양 옆으론 테이블야자와 산호수가 심어져 있고 바닥엔 이끼를 깔아 놓았다. 가운데 뻗어 오른 두 줄기의 꽃대에는 화려한 꽃이 만발해 있었으나 일주일 정도 지나자 시들어 버렸다. 이번엔 심비디움의 잎새가 하나 둘 지기 시작하더니 둥치만 지저분하게 남았다. 봄과 여름을 지냈다. 딴에는 정성을 들인다고 들이며 돌보고 있다. 꽃에 대해서 잘 안다는 분께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전문가가 잘 키우면 내년에 난에서 꽃을 피우지 않겠어요?”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난은 이미 죽었을 거예요. 화분이 겉으론 그럴듯하지만 안은 스티로폼으로 채워져 있어서 살기 어려워요.”
그가 가고 난 후 가위를 들고 화분으로 갔다. 앙상하게 서 있는 양란의 줄기를 보며 말했다.
“이미 죽어 버렸니? 겨우 꽃만 피우고 바로 죽으면 어떻게 해. 새끼만을 위한 삶이 아닌, 네 몫의 삶도 있어야 되는 것 아냐?”
가위를 밑둥 깊숙이 넣어 잘랐다. 마치 죽은 자를 염하듯 경건하게. 그런 다음 벌레라도 나올 것 같은 심비디움의 둥치들을 대강 다듬었다. 더는 가위질이 불가능한 딱딱한 부분만이 뾰족뾰족 남겨졌다. 화분은 가운데는 텅 빈 채 양 옆에만 푸른 기운이 팔팔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아이는 시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아예 내려가 버렸다. 아이가 내려가 버리자 난 해방감에 들뜨기까지 했다. 그렇게 좁아 보이던 공간이 갑자기 넓어 보이지를 않나, 그렇게 어수선하기만 하던 실내가 아늑하게만 느껴지질 않나, 심지어는 너무나 적요하여 참선 삼매에라도 들 것 같았다. ‘이놈을 진즉 보내버릴 걸 그랬어.’
늦가을 어느 석양 무렵 난 의자에 앉아 탁자 너머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자기만큼 비쳐 든 햇살이 하필이면 화분만을 온전히 비추고 있었다. 화분의 양 옆으론 테이블야자의 푸른 넝쿨들이 성지의 입구를 장식하듯 서 있고, 그 뒤로 산호수의 숲이 우거져 있는데 바로 눈앞에 펼쳐 있는 듯 가깝고, 가운데 바닥에는 이끼들이 잔디처럼 쫙 펼쳐져 있는데 마치 먼 지평선을 바라보듯 이상하게도 아득하게 보였다. 그 시야의 끝머리쯤 회색으로 탈색된 심비디움의 남겨진 둥치들이 마치 무등산 서석대의 거대한 주상절리대가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듯 그렇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이라도 올리고픈 장엄한 모습이었다. 나는 솟구치려는 샤만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억지로 피식 웃으며 다짐하듯 소리 내서 말했다.
“이런 시선의 불균형이 어디 있담. 원근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닌가!”
이후에도 시선의 착각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 난 화분 속의 서석대를 보며 갑자기 쓸쓸해졌다. ‘난 아직 서석대를 오르지 못했어. 그런데 몸이 이래 가지고 더는 산을 탈 수 없을지도 몰라. 과연 살아서 오를 수나 있을까?’ 그때 갑자기 서석대가 스톤헨지로 변하는 것이었다. 난 하짓날 스톤헨지를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 중의 한 명이 되어 우리네 탑돌이 하듯 스톤헨지를 돌고 돌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발코니 방의 창가엔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박스 위로 공룡 한 마리가 불쑥 내 시야에 뛰어 들어 왔다. 놈은 몸을 비틀면서 고독에 몸부림치듯, 혼란 중에 잃어버린 새끼를 찾듯, 분노와 애절함이 묻어나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난 놀라지 않았다. 그 공룡과 나의 거리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그 공간에 애당초 없었다. 영화관객이 화면 밖에서 화면을 보듯 나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놈은 언제 달려왔는지 바로 스톤헨지 앞의 넓고 넓은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아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궁금해서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저 공룡은 뭐란 말인가? 그것은 딸아이가 두고 간 헝겊필통이었다. 왜 이리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자꾸 보이는 거야?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이제 내가 마음의 화평을 얻었다는 것. 아이는 시골로 내려간 지 몇 주째고, 이제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김종완] 수필가. 문학평론가.
수필과비평 주간 역임. 에세이스트 주간, 발행인.
* 신곡문학상 수상
* 수필평론집 『수필 들여다보기』, 『다시 읽는 우리 수필』등
공간이 주는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늘 갈등과 함께죠. 서로 부대껴 살아가며 방법을 모색할 때 해결 방법도, 따뜻한 정도 생기겠지요. 혼자 동떨어져 나가면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그냥 잊히는 것이 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