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木花) 꽃을 보면~>/구연식
<목화>
신아문예대학에서 가을 문학기행으로 영광~고창 일대를 답사했다. 서정 시인 서정주가 다니던 초등학교 분교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서정주 시 문학관’을 방문하였다. 대표적인 시 <국화 옆에서>에 걸맞게 온통 국화로 꽃 대궐을 차려 놓았다. 그런데 한 모퉁이를 돌아 나오니 두 이랑에는 하얀 목화송이가 탐스럽게 피어서 예쁘기도 하지만 나를 순간 의하게 만든다.
그 옛날 영국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목화재배로 식민지를 침탈했던 사건이 번뜻한다.
혹시 시인이 일제 강점기 시대 식민지 서러움을 저항하기 위한 한낱 상징이 아닐까? 라고 궁금증으로 치밀어 오르니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다. 물증으로 목화송이 하나를 꺾어서 해설사로 달려가 그 내용을 물으니, 해설사는 목화송이가 있는 것은 처음 알았다면서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기에 목화밭 현장에 가보았다. 아! 여기는 개인소유 땅이고 저기 계신 아주머니가 주인이라고 한다. 영국식민지 이야기를 곁들여가며 혹시 일제 강점기 민족의 저항 의식이 있어서 목화를 심었느냐 물으니, 아녀요? 목화꽃이 좋아서 그냥 심었다고 웃으시면서 가장 탐스러운 목화송이 두 개를 꺾어서 손에 쥐여 주신다.
엉뚱하게 출발한 목화송이는 가을날 고구마밭 줄기처럼 이리저리 엉켜서 달라붙는다. 나의 소싯적에는 목화 추억도 많았다. 목화 꽃을 언뜻 보면 부용화 또는 무궁화꽃 같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목화는 대표적인 비식용 작물이었으나 주전부리가 귀하던 시절에 목화밭에서 다래를 손으로 눌러보아 약간 물렁물렁하면 땋아서 씹으면 달짝지근하고 즙이 많아서 그리도 좋았다. 너무 쇠여서 뻣뻣한 다래는 한 입 깨물고 밭고랑에 마구 뱉어버려 목화밭 주인한테는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애상 거리여서 아예 말썽꾸러기 아이들은 얼씬도 못 하게 지키는 때도 있었다. 목화 수수께끼도 생각난다. ‘꽃 폈다가 열매 맺고 다시 꽃 피는 것은?’
목화솜 꽃이 함박눈처럼 만발하는 가을쯤에 목화밭을 을씨년스럽게 찬바람이 가르고 지나가면, 목화 잎사귀들은 수수밭의 전설 호랑이 피처럼 검붉은 반점으로 얼룩져 있고, 피를 닦는 솜을 머리에 이고 있어, 상처의 치유를 내린 하늘의 고마운 식물로 착각이 든다.
늦가을 목화 수확을 마치고 덜 익은 다래는 햇볕에 말려 벌어지면 나머지 목화 수확을 마쳤다. 이때 목화솜을 받치고 있는 다래 껍질은 뾰쪽하고 날카로워서 손을 쉽게 찔러 몰래 따 먹은 다래의 벌침인 것 같았다.
그때는 방한 시설도 방한복도 없어서 어머니는 목화솜을 두툼하게 넣고 누비질하여 핫바지 핫저고리를 즐겨 입혔다. 참으로 친환경적인 의복문화로 우리에게 목화솜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는 의복이었다.
그 시절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보낼 때 농을 짜서 보냈고, 가을에 딸내미 결혼 시킬 때는 반드시 봄에 목화를 심어 솜이불을 장만하여 농과 함께 보냈다. 친정어머니는 고르고 고른 목화송이를 타서 이웃 아주머니와 품앗이로 이불을 꿰맨다. 이불 홑창도 위쪽과 아래쪽 입과 발을 덮는 곳을 구분하여 위는 빨간색 아래는 검은색으로 구분하여 벽사(辟邪)와 위생을 더한 이불을 만들었다. 첫날밤을 치르는 철부지 어린 딸내미에게 지극정성을 다한 친정어머니의 앞가슴 같은 포근한 목화이불이었다. 그래서 목화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인가 보다.
목화하면 영국이 인도를 지배 당시 스와라지(swaraj:자치운동)로 물레를 직접 잣고 있는 간디의 풍자도를 잊을 수 없다. 빠짝 마른 몸의 중요 부분만 천 한 조각 두르고 도수 높은 안경 등의 의미는 지금도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아주는 길잡이 같다. 인도에서 채찍으로 재배한 목화를 영국에서 가공 역수출한 옷은 한 올도 걸치지 않고 스스로 짠 옷을 입겠다는 각오이다. 영국의 빵 대신 간디 탕(맹물)으로 연명하여 피골이 상접하여도 인도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목화와 저항하는 ‘마하트마 간디’가 목화하면 자동 발상 적이다.
유럽과 미주 대륙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어렸을 때는 동화책에서 최근에는 영화로도 소개되고 있다. 검은 피부색과 대조되는 하얀 목화밭에서 갖은 학대와 굶주림으로 삶을 이어가는 톰 아저씨의 절규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 왔지만, 내 영혼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외친 선언은 너무 불쌍하여 지금도 생각하면 참기름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다.
우리나라 목화 전례는 고려말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 성공으로 백성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중에 한 분이시다. 문익점 선생은 목화씨를 이 땅에 들여옴으로써 혁신과 창조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씨앗을 유력 가문에 나눠줘 전국에 퍼지게 했다. 이후에도 재배 기술을 축적하고 종자 개량, 물레개발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목화 산업의 성장 여건을 마련한 인물이다. 혁신과 창조, 동반 성장, 지속 경영 등은 이 시대의 기업가들에게 요구되는 면모이기도 하다.
나도 신혼 초에는 장모님이 지어 주신 목화솜 이불을 덮고 살았다. 그런데 중간에 목화솜을 세탁하고 말리고 다시 타서 이불 꿰매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 아내는 헌 이불 수거자에게 넘겨주었다. 요사이 아내는 모든 침구류에서 정전기가 일어나서 목화침구류로 교체해야겠다며 잠에서 일어나면 꼭 구시렁거린다.
조물주는 어련히 알아서 몸에 좋은 목화 옷을 내려주셨는데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들은 이제는 A.I에게 의지하는 세상이 되어 가니 목화는 하늘에 구름이 되어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4.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