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자본주의론의 ‘근대’ 개념과 신식민사관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
문제의 소재
현재 한국의 경제사학계에서는 일본의 경제사학자 나카무라 교수의 이른바 중진자본주의론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카무라 교수는 일찍이 『노예제·농노제의 이론(奴隸制·農奴制の理論)』(1977), 『세계 자본주의와 명치유신(世界資本主義と明治維新)』등의 저서를 집필한 바 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와 중진자본주의론을 제창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의 이론을 『근대 세계사 상의 재구성(近代世界史像の再構成)』(1991)을 통해 집약하였다. 또한 나카무라는 1980년대 이래 한국의 가장 활동적인 경제사 연구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공동연구를 진행해 왔으며, 『조선 근대의 역사 상(朝鮮近代の歷史像)』 『조선 근대의 경제구조(朝鮮近代の經濟構造)』(나카무라 사토루·안병직·김영호·이대근 공편, 일본평론사, 1989)등의 저서를 한국 경제사학자들과 공동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주도하고 있는 연구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국 근대 역사 상에 대해서 통일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각자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 경제의 발전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의 대표적 존재로 위치짓고, 종래의 한국 경제사에 대한 역사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정리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 경제를 식민지성이나 반봉건성에 중점을 두고 분석해온 종래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면서 현재 선진국 진입을 준비하게 된 한국 경제의 저력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인식을 전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역사인식으로 자부하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보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이 연구모임의 한국 측 학자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은 안병직이다. 나아가 그는 나카무라의 『조선 근대의 역사 상』을 『세계 자본주의와 이행의 이론』(비봉출판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나카무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주로 나카무라의 이론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진자본주의론에 입각하여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는 한국 경제사학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근대’ 개념에 대하여
‘근대’ 개념에 대한 이해는 봉건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 대한 역사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이미 1950년대 초부터 유명한 ‘자본주의로의 이행 논쟁’으로 전개된 바 있었다. 모리스 돕(M. Dobb) _ 다카하시 고하치로(高橋幸八郞) 측과 폴 스위지(P. Sweezy) _ 마스다 시로(增田四郞)에 의해 대표되는 이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에 의해 정리된 바 있기 때문에(주종환, 『농업경제학연구』, 동국대 출판부, 1974년) 자세한 내용은 그것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나카무라는 스위지-마스다의 논리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면서 돕-다카하시의 견해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으며, 월러스타인이 가지고 있는 근대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월러스타인은 1)근대적 노예제, 근대적 농노제(그가 말하는 환전작물 재배를 위한 강제노동제), 2)분익농제(分益農制), 3)자영(그는 자유로운 소토지소유와 소차지농제를 넣고 있다)과 세 가지의 임노동제 노동형태를 세계시장에서의 위치(즉 주변부·반주변부·중심부)만으로 규정하고, 국내적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그가 범한 또 하나의 오류는 이 모든 것들을 자본주의적 관계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잉여가치생산의 측면만을 보고 직접적 생산관계를 무시했기 때문이다(나카무라의 『근대 세계사 상의 재구성』, 229~230쪽 참조. 이하 인용문 뒤에 붙인 쪽수는 모두 이 책의 것임).
나카무라의 비판은 필자가 이미 지적했던 월러스타인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주종환, 「농업에 있어서 자본주의 기원 재론 ― I. Wallerstein의 ‘자본주의’ 개념에 관하여」, 『제26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83). 그러나 문제는 그 대안으로 제시된 나카무라의 ‘근대’에 대한 이해가 결과적으로 월러스타인의 견해와 다를 것이 없다는 데 있다. 나카무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근대 세계시장에 편입되어 변질하거나 해체되어 점차 근대적 생산으로 전화하여 가는 경우 유통과정에서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그것에 종속되어 감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와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그것은 또한 노동과정=생산력의 측면과 사회적 과정=생산관계의 측면이 있다)라는 양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249쪽).
나카무라는 그의 일련의 저작 중 어디에서도 ‘근대’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근대적’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것이 ‘자본주의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나카무라의 지적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즉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전화되는 경우 두 가지 측면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하나는 유통과정에서 주로 외국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그에 종속되어 감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이며, 다른 하나는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타인은 바로 전자의 측면만을 강조하면서 후자의 측면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나카무라 자신이 제시한 논리가 월러스타인의 오류를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는 위 인용문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는 크게 나누어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공동체
2)노예제·농노제 등의 인격적 예속관계
3)단순 상품경제에 속하는 관계 : 중간적 지주제, 역무(役務) 관계=용역급부(用役給付) 관계, 단순 소상품생산(농민과 길드적 수공업)
그런데 이러한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근대 세계시장에 편입되고, 또 유통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단순상품경제화하면, 특히 그 결합이 강화되어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가면 잉여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근대적 상품경제로 전화되어 간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직접적 생산관계는 그것에 따라 착취가 강화되어 부분적으로 변형되지만 기본적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카무라는 외부로부터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의 파도가 밀려들면 어떠한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도 그 생산양식을 온존한 채로 전부 자본주의화되어 잉여가치의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경제, 즉 자본주의적 상품경제로 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월러스타인의 견해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나카무라는 자신과 월러스타인과의 차별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지만 그 차별성을 사실상 거의 발견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근대적 형태를 세 개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1)근대적 공납제 2)근대적 노예제·근대적 농노제 3)근대적 중간적 지주제, 근대적 용역 관계=초기자본·임노동 관계·근대적 소상품생산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근대적 공납제는 식민지화 초기에 있어서 식민지 지배가 현지의 공동체적 관계를 이용하여 공동체를 외부로부터 통째로 착취하는 관계이다. ……3)중간적 지주제가 단순상품경제적 관계 중의 하나의 형태라는 점에서는 추상적 일반적으로 중간적이라는 규정이 성립한다. 그러나 농업이라는 특수 부문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관계는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있으며, 근대적 형태의 완선형태는 근대적 기계제 소경영이다. 거기에 중간적 지주제에서 중간적이라는 규정은 노예제·농노제 등의 직접적 지배·예속 관계에 의거한 토지소유도 아니고, 다른 한편에서 있어서 근대적(농장형) 기계제경영(소경영이 지배적이지만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대경영도 포함)을 기초로 하는 토지소유 그 어느 쪽에도 확실히 속해 있지 않으며 양자의 중간이라는 의미이다(250~252쪽).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나카무라는 공납제나 농노제 위에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근대 내지는 자본주의로의 과도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선진 자본주의에 의한 상품화폐경제의 침투가 그 같은 과도적 성격을 가져오는 이유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카무라의 ‘근대적 공납제’나 ‘근대적 농노제’, 나아가서는 ‘중간적 지주’의 개념 등은 월러스타인의 기본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월러스타인도 후진국의 어떠한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노예제, 농노제, 분익농, 자영농제를 포함)도 선진자본주의 제국에 의한 상품화폐경제의 물결에 휩쓸리면 모두 ‘환전작물을 위한 강제노동제’로 재편성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지주 또는 영주는 자본가로 간주할 수 있고, 소작인 또는 농노는 자본주의 사회의 임노동자로 간주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관계와 동일한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카무라가 월러스타인에 대해서 “세계시장에서 잉여가치 생산의 측면만을 보고 직접적 생산관계를 무시했다”고 한 비판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월러스타인의 저서가 발간된 지 3년 후인 1983년 제26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월러스타인을 비판하였다.
월러스타인의 견해는 상업의 발달이 자본주의를 가져왔다고 주장한 스위지의 견해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제로부터 자본제로의 이행의 지표는 어디까지나 생산과정의 구조적 변화 과정에서 구해야만 한다. 상업 부문에서 어느 정도의 발전이 있었다 해도 그와 같은 상업이 전자본제적 생산(관계)에 기생하고 있는 경우 그것은 자본제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전자본제적 성격의 상업(전기적 상업)이다(주종환, 『한국경제 현실과 이론』, 일빛, 1994에 재수록). 이러한 월러스타인에 대한 비판은 나카무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중간적 지주제론’
나카무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자본주의, 즉 ‘근대’에 대한 개념에 기초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나타났던 조선의 기생지주제를 반봉건적(봉건적 본질을 가지지만 자본주의에 의해서 창출되었다는 의미에서 반봉건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봉건적 토지소유란 토지점유권(=사실상의 소유)을 가진 자립적 소농민경영으로부터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지대를 착취하는 것(=농노제)에 입각한은 중층적 토지소유이다. 기생지주적 토지소유 아래 놓여 있는 소작인은 자립적 소경영이지만 토지점유권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 의미에서 토지소유로부터 전적으로 유리된 존재이며, 경영 차원에서 보았을 때도 언제든지 토지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경제외적 강제는 필요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차지관계에 불과하고 이때 소작료는 기본적으로 차지료에 해당된다. 그런데 소작료에는 소작농의 맹아적 이윤, 운용자본의 이자, 노임의 일부까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극히 고율로 책정된다. 또 역사상의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기생지주적 토지소유에는 전근대적 성격이 부차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기생지주제는 그런 의미에서 배타적이며 근대적인 토지소유인 것이다(151쪽).
한편 그는 이 ‘배타적 근대적 기행지주제’를 소위 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로 규정한다. 심지어 중간적 지주제는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도 있을 수 있다(201쪽)고 주장하였다. 즉 중간적 지주제에서의 지주와 차지농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관계로서의 토지에 대한 임차관계이며, 고리대자본과 소생산자의 관계가 화폐의 임대차관계인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는 일반적으로 소농민적 단순소상품생산 단계에 성립한다는 것이다(205쪽). 그는 이러한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제가 성립되는 시점을 일반적으로 소농민이 단순소상품생산자로 된 단계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유럽에서는 14~15세기 이후로 설정된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은 송대 이후(10세기 이후부터), 일본은 15세기 이후, 조선은 17세기 이후로 설정된다(206쪽).
나카무라는 이러한 중간적 지주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존 연구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오류를 범하였다고 평가한다. 하나는 그가 중간적 지주제라고 보고 있는 지주제를 봉건제(국가적 농노제도 포함하면 농노제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라고 평가하는 견해이다. 다른 하는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지대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잉여노동, 잉여생산물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지대로서 착취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경제외적 강제란 인격적 지배·예속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닌 관계(예를 들면 공동체적 규제)이든가 중간적 지주의 그것이 아니고, 봉건 국가 내지는 봉건 영주, 혹은 국가적 농노제 아래서의 국가 권력의 강제 기구이다. 그 어느 것도 중간적 지주제가 농노제(봉건제)로 되는 근거일 수 없다(206~207쪽).
이와 같이 나카무라는 전근대 사회에서의 기생지주제의 봉건적 성격을 부정하고,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라고 규정하면서 봉건제로부터 자본제로의 과도기에 일본·중국·한국 등에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기생지주적 토지소유를 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로 평가하였다. 따라서 그는 종래 이것을 ‘봉건적’ 또는 ‘반봉건적’ 지주제로 규정한 학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나카무라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다. 첫째 ‘중간적 지주제’ 개념은 자본주의적 성격을 강조하고 봉건적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인데, 그 중간적 지주제라는 개념에 의해서 전자본주의에서 기생지주제가 가지고 있는 봉건성을 이와같이 간단하게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결국 봉건적 본질을 강조하는 것은 ‘반봉건 지주제’의 개념이고, 자본주의로의 과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중간적 지주제’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면에 초점을 두면 ‘반봉건적’이라는 평가가 될 것이고, 현상적인 면에 초점을 두면 ‘중간적’이라는 개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중간적’이라는 기묘한 개념을 끌어내어 ‘반봉건적’이라는 개념이 오류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봉건적이라 했을 때 ‘반(半)’의 의미는 바로 봉건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과도적이고 중간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에 나카무라가 말하는 ‘중간적’이라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굳이 이 새로운 ‘중간적’이라는 개념을 끌어내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나카무라는 과도적 반봉건적 지주제의 봉건적 본질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중간적 지주제라는 개념을 끌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견해에 서게 되면 중간적 지주제는 상품화폐경제가 존재하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 즉 중간적 지주제는 돈벌이를 위해 농업을 영위하는 계급사회이기만 하면 ‘대홍수 이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왔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전근대적’이라든가 ‘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양자 사이에 생산관계의 차이가 있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중간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반봉건적’이라는 표현이 본질을 더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중간적 지주제의 개념이란 위와 같이 시대를 초월한 개념이기 때문에 각 시기대의 역사 발전을 위한 변혁 주체를 설정하는 것을 모호하게 할 우려가 있다. 봉건시대에는 변혁의 과제가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제약하는 봉건성을 타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와 같은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진 변혁 주체는 당연히 현상적으로 자본주의, 또는 근대적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진 변혁 주체는 당연히 현상적으로 자본주의 또는 근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제도라 해도 그 본질이 봉건적인 것이라면 그 봉건적 성격을 폭로하고 강조함으로써 타도의 목표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지배적이었던 기생지주제의 성격을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소위 노농파(勞農派)의 견해는 기생지주제를 타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그 시기에는 극히 반(反)변혁적인 견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카무라의 견해에 대해서도 동일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기생지주제를 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굳이 변혁의 대상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극히 반변혁적인 사상에 이를 우려가 있다.
그라나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한국·중국·일본의 변혁의 과제는 사회의 근대화, 즉 자본주의화를 전제로 한 민중혁명으로서의 이중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대의 변혁 대상으로서 민중 동원의 기초였던 기생지주제의 성격을 자본주의적인 것, 근대적인 것 등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을 변혁 대상에서 제외시킬 위험성이 있다.
더욱이 한국에서 일제하의 기생지주제를 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로 규정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일련의 식민지 정책을 ‘근대적·중간적’인 것으로 규정하게 되어, 그것을 합법화해 버리는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나카무라는 일본의 ‘지조개정(地租改定)’과 한국의 ‘토지조사사업’ 등을 근대적 토지개혁이라 하고, 그 자본주의적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토지개혁과 동일선상에 두고 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한국의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자본주의적) 중간적 지주를 광범하게 성립시켰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토지개혁이 된다. 따라서 당연히 그 진보성 내지 역사적 필연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변혁 대상과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카무라는 “종래의 토지개혁에 관한 연구의 약점의 하나는 혁명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연구나 법령의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가 많기 때문에 그 경제적 성격이나 경제적 성과가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223쪽)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토지개혁은 지극히 정치 경제적 변혁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에서 그것을 둘러싼 제계급간의 이해대립에 관한 고찰을 빼놓고서는 사회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적 성격이나 경제적 성과만을 분리하여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카무라의 주장은 잘못이다.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일면적인 경제주의에 빠진 오류 때문에 한국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창출된 반봉건적 지주제를 근대적 중간적 지주제라는 말로 바꾸어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의 역사적 성격
위에서 제기했던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토지조사사업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조선조 봉건사회 앞에는 두 개의 선택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하나는 갑오농민전쟁으로서 폭발한 농민적 혁명의 길이고, 또 하나는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개명사상을 표방하는 봉건지배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중략) 일제에 의해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였던 농민적 토지개혁에로의 울부짖음을 총검에 의해 억누르는 가운데 진행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이 땅에 나타난 농업구조는 일부 논자들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소농적인 것도 아니었고, 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조선조에 경제외적 강제의 체계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에 의한 행정적 지배에 의해 강력히 유지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하에 있어서는 그것이 일제에 의한 군경 지배체제에 의해 대치된 데 불과하였다. 농촌의 기본적 생산구조의 성격은 여전히 봉건제의 실질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둘러싼 농촌의 외곽적 경제구조만이 식민지적 자본제로 탈바꿈되어가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반봉건적 농업이었다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주종환, 「개항 전후와 일제 초기의 농업 구조의 성격」, 『전국 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76년 ; 주종환, 『한국경제의 현실과 이론』에 재수록).
반면에 나카무라는 일제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농업이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래의 토지소유관계를 자본주의에 적합한 성격으로 개조해 나가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적합한 토지소유에 대해서 “법적 형식적으로 근대적 배타적 토지소유를 공인하는 것, 그것에 의해 토지상품화를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근대적 토지개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일제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을 근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노예제, 농노제를 폐지하고, 그 아래 있었던 근대적 배타적 토지소유권을 법인하든가”, “대토지소유는 폐지하지 않고 그것에 근대적 배타적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266쪽). 이를 통해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하고, 농업 생산을 상품화폐경제화하여 잉여가치 생산으로 전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지주는 농업자본가, 소작인은 사실상의 자유로운 농업노동자가 되어 사실상의 농업 자본주의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지주-소작 관계가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소작 관계라는 나카무라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인정될 수 없다. 화폐경제가 발달하면 농업이 자본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농업의 자본주의화라고 하는 것은 직접생산자인 농민들이 모든 경제외적 강제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과 농민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도 분리된다는, 이른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임금노동제에 입각하는 노동시장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전제조건이 성립되어 있지 않을 때는 비록 거기에 화폐경제가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소토지소유로서의 자작농적 소상품생산은 이 관점에서는 확실히 봉건제로부터 자본제로의 과도기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과도기적 존재로서의 자작농적 소상품생산이 농업에서 지배적 존재로 되는 것은 한국에서도 해방 이후 농지개혁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반봉건적 기생지주제가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나카무라도 말한 바와 같이 잉여가치 생산이었는데, 거기에서의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는 반봉건적 지대로서의 소작료였지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농업노동자의 부불노동(不拂勞動)에 기초한 근대적 이윤은 아니었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소작농에 대한 직접적인 인신적 구속으로서의 경제외적 관계는 철폐되어 지주-소작관계는 외견상 자유로운 계약관계로 전화되고, 토지에 대한 상급 소유권과 하급 소유권의 병존과 같은 중층적 토지소유관계는 근대적인 토지등기제도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견상의 근대화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외견상으로는 여러 가지로 근대적인 것같이 보이는 제도나 관계가 도입되었지만, 사회의 가장 기저에 있는 생산관계는 조선 후기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기생지주제는 조선 후기 이래 이미 광범하게 존립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그대로 일제 식민지시기로 이어졌다.
2)신분제도에 의한 인신적 구속은 1930년대까지 관습적으로 농후하게 남아 있었다.
3)조선조에서는 불안전하게나마 보장되어 있던 소작 농민의 경작권이 갑오농민전쟁에 의해 일거에 폐지되는 것같이 보였지만 지주와 일본 제국주의의 연합세력에 의해 탄압되고, 자유로운 계약관계라는 명목하에 심히 불안정한 소작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때문에 소작인들의 지주에 대한 인격적 예속, 즉 경제외적 강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4)소작 농민에 대한 직접적 인격적 경제외적 강제는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점차 희석되어 갔는데,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로서의 지대가 잉여 전체를 흡수해 버리는 상황 아래에서는 근대적 이윤이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즉 잉여가치의 지배적 형태는 농업에 관한 한 지대였지 이윤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근대적 관계는 아니었다.
5)농업 이외의 분야에서는 자본제가 광범하게 유입되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하의 조선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기저를 이루었던 농업에서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기생지주제가 조선조로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농업은 반봉건적 성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6)그와 같은 반봉건적 농업에 입각하는 반봉건 사회를 일제의 군경(軍警) 지배체제가 강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농업에서의 경제외적 강제가 식민지 지배체제에 의해서 체제적으로 보장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반봉건적 사회였다.
7)거기에서의 민중의 변혁 목표는 민족해방과 독립, 반봉건적 지주제의 타파, 모든 착취로부터의 자유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반봉건적 지주제의 타파는 자본주의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 과제가 그런대로 달성된 것은 해방 이후 농지개혁에 의해서였다. 이를 통해 소농민적 소상품생산이 농업의 지배적 생산관계가 되고, 비로소 농업의 근대적 생산관계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소농민적 생산관계는 농민층의 분해를 경유하지 않고 가족 노작적 소농경영 그대로 점차 자본주의,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여 자기 변화해 가게 되는데, 아직 자본주의적인 성격은 아니고 주로 소상품생산적인 성격에 머무르고 있다.
8)토지조사사업의 근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와 같은 근대성을 도입했던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농업을 근대화할 목적하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 전래의 봉건적 기생지주제를 자기의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하여 종속시킴으로써 최대한 잉여가치를 취득할 목적하에 시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봉건적 반동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며, 결코 근대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농지제도의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농지개혁으로 이루어졌다.
나카무라는 일제 초기의 토지조사사업까지도 ‘근대적 토지개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껏해야 ‘근대 지향의 토지정리사업’이상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것은 종래의 중층적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정비하여 토지에 대한 하급 소유권을 부정하면서 상급 소유권을 지주의 배타적 독점적 소유권으로 확정하였다. 그럼으로써 토지소유의 상품화를 촉진하고, 자본주의로의 길을 개척하려 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 근대를 지향하는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직접적 생산과정 그 자체에는 아직도 구래의 봉건적 지주, 즉 소작관계의 본질을 농후하게 온전시켰다. 이를 통해서 공업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 농업에서의 반봉건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두 개의 생산관계가 상호 규정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식민지 반봉건적 이중구조의 사회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나카무라의 견해는 잘못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중진자본주의론의 문제점
위와 같은 근대의 개념에 기초하여 나카무라는 한국 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흥 공업국화’ 내지 중진국화한 데 주목하면서 그 토대를 형성했던 것은 일제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이고,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이며, 1930년대 이후 전시하의 공업화였다고 주장하였다. 나카무라의 이 같은 견해는 안병직을 거쳐 한국의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다.
그는 종래의 연구에서 일본의 독점자본이 일본 본국 경제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 내에서는 관련 산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지적되었던 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1930년대의 공업화는 조선 경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에 이르렀다는 조건, 즉 앞에서 말한 식민지적 원시축적의 진행에 덧붙여 하부구조(Infrastructure), 유통조직의 발달과 관련된 부문의 최소한의 성립 등의 조건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진출 자체가 그러한 관련 부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조선의 공업화는 물론 일본 본국으로의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켰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인 자본의 형성·발달을 포함하여 조선 경제 전체를 끌어들이면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바는 이 시기에 근대적인 조선인 노동자계급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농촌으로부터의 인구 유출도 가속되었다는 것이다(160쪽).
그에게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는 다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비교해도 군사적 봉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사회, 즉 전근대 사회의 해체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식민지 자본주의를 육성하였던 새로운 형의 제국주의 지배였다. 그 근거는 국내적으로 독점자본의 확립, 중화학공업화, 농촌 기생지주제의 후퇴, 노동자계급의 권력적 통합 등의 변화, 즉 현대자본주의화, 선진자본주의화의 움직임에 조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세계시장의 불안정이 해체되는 가운데 종래 구미 열강에 종속된 제국주의로부터 자립·대항하여 독자적인 지배권을 구축해가는 제국주의로의 전환과 조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165~166쪽).
그는 한국에서의 종속자본주의의 고도 발달이라는 현 상태에 입각하여 그 발전 과정 안에 식민지시기를 자리매긴다는 시각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그는 제1기(1876~1910년)를 반식민지 국가적 농노제, 제2기(1910~1935년)를 식민지 과도적 사회, 제3기(1935~1945년)를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로 구분한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해방 이후 한국의 중진국화를 준비했던 것으로 된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조선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 그 내부구성의 변화를 중시”하는 것으로 호도한다. 따라서 식민지시기는 근대 조선 사회와 일본 제국주의와의 상극·상호침투·상호규정 관계로 발전해 간 과정이며, 궁극적으로 식민지형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으로 파악된다.
그의 『근대 세계사 상의 재구성』이라는 책명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역사 이론의 필요성을 반영하였다고 주장된다. 즉 그 동안의 연구는 식민지하에서 나타난 발전의 전체상을 파악하지 않았고, ‘역사적 시점이 약하고’ 자본주의적 공업화의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이론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빈칸을 메우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근대의 세계사에 대한 상’에 관한 새로운 역사 이론의 재구성이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급격한 자본주의적 공업화 과정이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급격한 자본주의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카무라의 이러한 인식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저명한 일본 경제학자 오오카와 카즈시(大川一司)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다.
오오카와는 일본 경제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거기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장기적 통계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는 눈부신 고도성장이 전전의 오랜 과정을 통해 준비되어 온 추세를 전후에 일거에 가속시킴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는 설, 즉 ‘추세가속설(趨勢加速說)’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후진국들은 일본의 이 같은 경험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은 ‘지조개정’에 의해 반봉건적 고율소작제도에 기초한 영세농 경제를 수립하고,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의 희생 아래 관료와 결탁한 관료독점자본주의를 육성함으로써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자본주의적 고도 독점과 전근대적 농업·가내공업·중소기업의 병존, 그리고 이것에 의한 경제의 이중구조 등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나타난 일본 경제의 구조였다. 농민의 빈곤이 도시근로자의 임금수준을 규정함으로써 빈곤의 악순환이 지배하고, 이것에 의한 국내시장의 제약은 일본 자본주의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대외 지향적 성격을 갖게 하였다. 일본이 주조적인 빈곤의 악순환에 입각한 이중구조에서 탈각할 수 있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후진국이 일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이 아니라 전전의 일본 경제인 것이다
(주종환, 「개발경제학의 기본시점을 둘러싸고 ― 와타나베 토시오 조교수의 한국경제론의 비판적 검토(開發經濟學の基本視点をめぐって ― 渡툌利夫助敎授の韓國經濟論の批判的檢討)」, 동경 : 『세계경제평론』, 세계경제연구협회, 1982년 8월호 ; 「일본 경제의 교훈 ― 오오카와 카즈시 교수의 개발이론에 대한 약간의 의문(日本經濟の敎訓 ― 大川一司敎授の開發理論に對する若干の疑問)」, 동경 : 『세계경제평론』, 세계경제연구협회, 1982년 12월호 ; 오오츠카 카츠오(大塚勝夫), 「일본의 경험과 개발도상국의 비교연구 ― 주종환 교수의 의문의 배경을 생각한다(日本の經驗と開發途上國の比較硏究 ― 朱宗桓敎授の疑問の背景を考える)」, 東京 : 『세계경제평론』, 세계경제연구협회, 1983년 9월호 ; 주종환, 「일본 경제의 성공을 보는 시각 ―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 교수의 ‘일본경제론’을 읽고」, 동경 : 『경제평론』, 1983년 8월호 : 위의 일련의 논문들은 다음에 재수록되어 있다. 주종환, 『한국 현실경제와 이론』, 서울 : 도서출판 일빛, 1994).
이 같은 필자의 견해의 정당성은 일본 경제학자 미나미 료신(南亮進)에 의해 다음과 같이 뒷받침되고 있다. 미나미는 전후의 경제성장에는 전전과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고, 이 요인이 전후의 성장률을 특별히 끌어올리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전전과 전후를 단순히 결합시켜 성장률의 추세를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전에 나타났던 경향의 연장으로 이해하기에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즉 전후에 새롭게 나타난 요인에 의존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에 새롭게 나타난 요인이란 무엇인가. 그는 한국전쟁과 농지개혁, 재벌해체, 노동조합의 보급 등 경제민주화에 의한 기업간 경쟁조건의 정비와 대중의 구매력 증진, 방위비의 생산적 투자로의 전환, 민간 설비투자의 확대, 일본적 고용 관행 등 12개의 요인을 들고 있다. 그는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전후의 경제 민주화(토지개혁·재벌해체·노동조합의 보급 등)를 들고 있다. 특히 농지개혁이 실시되지 않았다면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미나미 료신(南亮進), 『일본의 경제발전(日本の經濟發展)』, 동경 : 동양경제신보사, 1981, 37~40쪽).
나카무라의 중진자본주의론은 결국 일제에 의한 일련의 식민지 정책을 모두 조선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위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그것에 의해 한국 경제는 중진국화하는 계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형태만 바꾼 식민사관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즉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가지고 있는 수탈이라는 측면을 교묘하게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면 도대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이다. 역사의 진보에 대하여 막무가내로 반대만 일삼은 시대착오적 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친일 매판세력은 역사의 진보를 수용한 세력이란 말인가. 필자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나카무라라는 일본인 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 경제사학자들이 나카무라의 논리에 따라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해보고자 하는 형태이다. 그들은 앞에서 필자가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명확히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토지조사사업은 원래 한국에 자본주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착수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을 통해 한국 농민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실시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 민중의 필요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왕조에 응집된 봉건지주들과 연합하여 총검에 의해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기만적인 자본주의화, 즉 반봉건적 자본주의로서의 기생지주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한편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련의 농업정책 및 공업정책도 일본 제국주의의 군국주의적 팽창정책을 떠받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코 한국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로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발전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식민지 경영의 부차적 산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카무라의 중진자본주의론은 그 같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눈감고 있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식민지정책이 갖는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 침략자를 한국 근대화의 기수로 탈바꿈시켜 미화하는 논리인 것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이상으로 나카무라의 『근대 세계사 상의 재구성』을 중심으로 그 이론의 본질을 분석하고, 거기에서의 문제점을 파헤쳐 보았다. 이 글에서는 주로 그의 역사이론상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분석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이론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뒷받침됨으로써 비로소 이론으로서 충분히 성립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관한 분석은 후일을 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분석하는 사람의 주체적 역사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교토대의 저명한 역사철학자 미키 기요시(三木 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에 의해 쓰이는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로고스로서의 역사’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현재의 자아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과거는 현재이며, 현재는 과거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현재는 또한 미래이기도 하다”고 한다면 모든 역사적 인식은 현재로부터 과거를 훑어내어 미래로의 전망을 가짐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카무라의 역사인식도 물론 그것을 목표로 하였을진대, 그는 과연 어떠한 미래로의 전망을 가지고 근대 세계사 대한 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신판 식민사관으로 빠져 들어가 있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적에 관계없이’ 그의 이론을 선진국의 선진이론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실증적으로 정당화시키는 데 급급하고 있는 무정신(無精神)의 한국 경제사학자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역사비평』, 1994 겨울호 발표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