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영성과 觀想> 관상하는 삶의 이야기들
요나의 박넝쿨 신앙(욘4:1-11)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원하시며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인간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보면 요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요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큰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앗수르는 주전 8세기경 북방의 신흥국가인 아라랏과 전쟁으로 이전 시대보다 국력이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라 안팎에 거듭되는 악재에도 그들의 악독함과 잔인함은 갈수록 심해졌고 자신들이 믿는 아누, 벨, 에아 등 잡다한 이방신을 속국인 이스라엘에까지 강요했습니다. 결국 니느웨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성을 멸하시지 않고 선지자 요나를 통해 한 번의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바 그것은 요나의 행적을 통해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 했을 때 하나님은 니느웨를 멸하시지 않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또 믿지 않는 니느웨 사람들 같은 불신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요나의 신앙을 보겠습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욘1:1)’,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욘3:1)’ 이렇게 음성을 들어도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본문에 보면 때로 요나는 정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이 일어 다 죽게 되었을 때에 제비가 뽑혀졌을 때 자기 때문이라고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1:12).”
또 회개도 합니다. 요나서 2장 전체는 요나의 회개 기도입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기도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순종해서 니느웨 회개를 선포했지만 4장을 보면 그의 신앙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순종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한결 같은 자기 고집과 뜻이 있습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But Jonah was greatly displeased and became angry.” 요나는 하나님의 니느웨 구원을 매우 ‘displeased’ 싫어하고 ‘angry’ 성냅니다.
더욱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애하시기에 이스라엘은 구원하고 니느웨는 멸망시킬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은 인애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는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신앙관이요 구원관입니다. 철저한 자기중심적이요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3절을 보면 요나는 죽어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Now, O LORD, take away my life, for 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욘4:3).”
지독한 옹고집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옹고집입니다. 이게 무슨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까? 이게 무슨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앙입니까? 왜 이렇게 니느웨가 구원 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달랩니다. 깨닫게 하려고 무엇이 옳은가 판단해 줍니다.
4: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네가 왜 성을 내느냐? 네가 하는 짓이 옳은가?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게 합니다. 그래도 요나는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봅니다.
5-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욘4:5-6).”
5절에 초막을 짓고 어떻게 하는 지 보려고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해를 가립니다. 박넝쿨로 해를 가립니다. 그런데 요나는 박넝쿨을 크게 기뻐합니다. 이것이 요나의 신앙입니다. 초막을 짓고 기뻐합니다. 요나서는 6절에서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의 12만 명을 구원하셨을 때 크게 성내고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것을 대비 시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신앙입니까?
7-8절입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4:7-8).”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잠간 있는 현실의 아픔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느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습니다. 박넝쿨 같은 인생의 복들을 크게 기뻐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잘되고 내 나라를 핍박하고 내 가치가 손상이 될 때면 죽기 살기로 나를 고집하고 크게 싫어합니다. 반대로 그것이 내 뜻대로 될 때 크게 행복해 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요나의 신앙에 하나님은 어떤 말씀으로 요나서를 끝냅니까?
9-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의 하나님의 뜻은 인애이고 인간 요나의 뜻은 자기중심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구원하시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 세리 창녀도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회개 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는 것이 요나서가 말하는 구원의 해답입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해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시며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관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구원관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축복관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행복관은 어떻습니까?
오늘 그늘을 주는 초막이나 내일 없어 질 박넝쿨과 같은 세상의 찰라 적인 것에 목을 매며 희노애락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관, 구원관, 축복관, 행복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애)에서 찾아야 합니다. 관상기도는 그 길을 찾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