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마가복음 16:17-20
사도시대는 표적과 기사의 시대였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렇습니다. 개척시대, 선교의 일선에서는 지금도 그와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지금은 사도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일들이 지나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복음 전도의 주류를 이루지는 않는다는 것이 교회시대의 특징입니다. 복음이 증언되면 무엇보다 신자의 삶 속에 표적이 따라옵니다. 사람의 성격이 변합니다.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정말 순수한, 사람 같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분위기도 환경도 점차 변합니다. 전인적이고 전체적인 삶의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복음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영혼 속에 심어줍니다. 영생(zoe aionion)은 하나님과 같은 종류의 생명(God's kind of life)입니다. 이 생명은 식물 차원, 동물 차원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 차원, 천사 차원도 넘어섭니다. 신자가 가진 생명의 차원은 하나님 아들의 차원이기 때문에 천사 차원인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은 그 자체로 굉장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 특징은 권세에 있습니다. 왕족인 어린아이에게는 능력이 아직 많치 않습니다. 지식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왕이고 어머니가 여왕이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 아이가 부탁하면 곧 왕의 이름으로 명령이 시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에게는 굉장한 잠재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잠재 능력이 어느 때고 발휘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하고, 성숙해야 하고, 그 일과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눅 10:19-20에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권세(Authority, eksousia)입니다. 권세는 능력(power, δυναμις)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권세가 능력을 지배합니다. 신자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뱀을 집어올립니다. ‘이것은 사탄의 일이요 사탄의 궤계라’고 영을 분별하고 영의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귀신의 일들을 드러낼 수 있는 재판관(a god)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권세를 믿음에 두지 않고 자기의 느낌에 두기 때문에 그 권세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 권세를 하나님의 약속 위에 두지 않고 자기 경험의 범주에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허약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스스로 강하게 느껴지든지, 약하게 느껴지든지 그런 것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느껴지든지 아니든지, 여러분은 사탄을 명하여 쫓아낼 수 있습니다. 권세는 사용하기 위한 것이지 자랑하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권세가 모든 일에, 모든 상황에 다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 전도라고 해서, 무조건 믿음으로 한다고 해서 항상 마귀가 묶이고 마귀의 일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무너지고 묶이고 말겠지만 어떤 일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안 되기도 하고 기다려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꼭 내가 약하거나 내게 권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과 대적한다는 것은 살짝 기어들어온 뱀을 집어올리는 일입니다. 즉 귀신을 귀신 취급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탄이 확실하고 귀신의 일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간지럽게 취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발 나가주세요 제발 떠나주세요’ 그러면 귀신이 웃습니다. 귀신은 간지럼(tickle)을 타지 않습니다. 귀신은 귀신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고(행 10:18)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 9:25)” 그러면 귀신이 대꾸하겠지요. ‘난 네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맞어. 꽤 똑똑하네. 내겐 능력이 없어.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한 권세가 있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 놈을 결박하노라’ 사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귀신의 일들을 집어올리십시오. 신자는 귀신을 교회에서,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분별하고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주신 주님의 약속이요 명령이요 부탁입니다.
영생(God's kind of life, zoe aionion)과 권세(Authority, eksousia)를 가진 성도들의 두 번째 표적은 새 방언을 말하는 것과 병든 자에게 안수한즉 병이 낫는 것입니다. 방언은 말입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합니다. 기도하면서 신앙의 덕을 쌓고 마음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누립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 방언은 새 언어 곧 천국의 언어요 성경의 언어입니다. 언어는 온 몸을 굴레 씌웁니다. 우리의 삶을 속박합니다. 생활을 지배합니다. 여러분이 병든다고 지속적으로 말하면 병이 듭니다. 가난을 자꾸 말하면 가난이 강도 같이 옵니다(잠 6:11). 말이 씨가 됩니다.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는 것처럼 우리의 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의 혀를 사탄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사탄은 이렇게 발명합니다. “너에게는 구원도 없고 희망도 없다. 너는 실패할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병들 것이다. 너는 사랑받지 못하고 일하지 못하고 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발명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절망은 없다. 죽음도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가장 좋은 것이 오고 있다. 청춘은 새롭게 된다.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영원하다. 정녕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고 너를 싫어버리지 않겠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겠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요 14:3)” 할렐루야! 이보다 순수하고 원색적이고 투박하기 때문에 진실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혀가 우리의 전체 몸을 굴레 씌웁니다. 유명한 의학잡지에 ‘한국 사람들은 그들이 습관적으로 말하던 그 병으로 그들의 조상들이 죽었던 그 때에 죽는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답니다. 자기 아버지가 50대에 암으로 죽었으면 ‘나도 그때 그 병으로 죽을꺼야’라고 말하다가 그 때쯤 되어서 그 병으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의 혀가 그의 미래를 굴레 씌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 삶을 굴레 씌워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산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사는 이상 주님도 나를 위하신다. 내 영을 위하시고 내 몸도 위하신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고전 6:13)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내게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신다.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신 일을 다 이루고 하나님께로 갈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 삶은 결코 회색이 아닙니다. 지겹지 않습니다. 생명은 생명나무요 빛과 즐거움입니다. 삶은 기쁨과 보람입니다. ‘신자는 치료받고 강건하고 유능한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명랑하고 부요하고 강건한 말을 생산하십시오. 새 방언을 말하십시오. 말할 뿐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친구에게 맞고 돌아왔을 때를 기억하시지요. 그 때 여러분을 어루만지며 껴안고 위로하시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여러분은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나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치유에 대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구는 단 10:19,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그리고 막 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만지십니다. 그러면 나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몸으로 우리 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의 팔과 입과 손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병든 자의 머리나 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손에 손잡고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이 치유하는 강수처럼 여러분의 손길을 통하여 그 몸에 흐르고 치유가 임할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간구는, 신자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오늘도 우리의 몸 위에 강물처럼 흐릅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까지 적시며 나아가 내 마음을 놋 성벽이 되게 하사 어떤 충격과 공격도 넉넉히 견디게 만듭니다. 오늘날 같이 영적으로 허약해진 시대에는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큰 문제로 대두됩니다. 사람마다 오랜 상처, 숨은 상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여간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무엇보다 상처받지 않는 것이 최상입니다. 한번 상처받으면 회복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소년 요셉이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받은 상처는 여간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구덩이에 빠지고 감옥에 끌려갈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때 그의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는 평생 기를 펴고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항상 사람을 두려워했을 것이고, 의심했을 것이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환경이 그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주었지만 그는 믿음과 기도로써 그 상처를 극복해 냈습니다. 고함은 쳤지만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명은 질렀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도, 떡 굽는 관원장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창 40장). 마침내 이스라엘 족속과 애굽의 신민들까지 사랑으로 포용하는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중 가장 귀한 것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약속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내적 은혜의 표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생을 가진 성도의 진정한 권세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치명적인 독이 특정한 경우에 진짜 화학적인 독이 될 수 있지만 모르고 마신 독으로 죽게 된 신자는 하나님이 되살려 주십니다(행 28:3-6). 그렇다고 내가 참으로 신자인가 아닌가 시험하기 위해 독을 마시는 바보 같은 분은 없으시겠지요. 현대인은 어디서나 독을 마시고 삽니다. 공기도 오염되고 물도 오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위험한 오염은 영적인 오염입니다. 우리가 TV를 보고 책을 읽는 동안 그 독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영적 억압 속에 살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30만 명의 미국인이 일선에서 죽었지만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후방에서 걱정과 공포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죽었습니다. 공포와 걱정, 두려움과 근심 같은 독들이 온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믿는 자들은 이런 독성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두려움의 영이 우리를 떠납니다. 영적인 독극물에서 해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과 기쁨을 회복하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결코 비교하지 않습니다. 상처는 우쭐댐과 비참함 때문에 받습니다. 불행은 불평과 시기심 때문에 느낍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나 경쟁과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셨다고 믿고, 일하게 하셨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언제나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축복의 자리로 변합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란 시를 아십니까?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예수 믿으면서 불행한 이유는 세상적 기준을 가지고 자꾸만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없으니 불행하다’는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언제나 성경적 기준으로 해석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섭리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자리를 지키고 견디는 것이 신앙이요 순종입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은 신자인 나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신자다. 문신자 권사다’ 늘 그렇게 주장하고 선포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산다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할렐루야! 표적 중의 표적은 참음과 견딤입니다. 예수 위해 똑바로 살면 고통이 있습니다. 제물의 성격은 죽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 고통을 담부하실 때 변명하셨습니까? 어떤 설명도 의견제시도 없었습니다. 다만 행동으로 보이시며 고난받는 종으로 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며 사는 신자는 세평과 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순종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쎈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피와 눈물로 기도하며 봉사했다면 누구나 천사고 영웅입니다. 우리의 영웅 스데반은 죽을 때 그 얼굴이 천사 같았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고 했습니다.
표적은 상황을 주도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면 여러분의 남은 평생에 주님 위해, 교회 위해 사람들의 욕을 몇 섬이라도 들을 각오로 일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의 말씀대로 늘 우리와 제일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이 많고 상처가 크기 때문에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지금 다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생을 주창하시고 자녀의 권세를 행사하십시오. 살짝 스며든 귀신들이 떠나갈 것입니다. 새 소망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우울과 흑암, 가난과 질병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상처받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낙관적이 되고 낙천적이 되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이 세대에 보내신 하나님의 종들이요 우리들의 영웅임에 틀림없습니다. 찬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를 다같이 찬송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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