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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공부

[스크랩]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8:51~59

작성자개그맨|작성시간19.06.29|조회수1,372 목록 댓글 0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8:51~5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나눈 논쟁의 절정입니다. 이 논쟁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신성을 깊이 맞닥뜨리게 합니다. 이 논쟁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이 본래적으로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영적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실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끝에 매우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폭탄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51절 말씀 아닙니까? 우리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충격에 빠져 크게 분노하고 너무 말도 안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52절, 5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번 말씀 드렸다시피, 예수님이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육체적 죽음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가 비록 육체가 죽더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 육체가 죽더라도 완전히 그 육체가 썩고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 그 육체가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그 썩은 육체가 다시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면 그가 죽어서 영원히 죽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지는 형벌을 피하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살게 되는 천국 백성이 되기 때문에 그가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당장 육체적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줄로만 이해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터무니 없는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항변하기를, 예수님이 자기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하시니, 예수님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또 그들의 옛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다 죽지 않았느냐는 항변이요 조롱의 말을 던진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선지자들은 감히 그런 엄청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기 말을 듣고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감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감히 그들에게 사람이 자기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선포한 것이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요 분수에 넘치는, 외람되고 참람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응을 보시고서도 당당하고 초연하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54절과 5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이 볼 때에는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영화롭게 말하고 자기 자랑을 하는 허영에 찬 거짓 선지자같이 생각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참된 진리를 그대로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고 자기 말을 믿고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대로 말해줄 따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진리만을 전함으로써 지금 그들에게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감히 분수에 넘치는 말을 한다고, 자기 주제도 모르는 촌뜨기 나사렛 동네의 거짓 선지자 주제에 감히 그런 엄청난 자기 자랑의 말을 쏟아놓는다고 유대인들로부터 가시돋힌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이 반응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자기를 믿어야 자기 말을 받고 지켜야 죄 가운데 죽는 죽음을 면하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참 생명을 얻는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마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을 수 없는 분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핍박과 조롱이 무섭고 귀찮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고 나도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가서 전하라고 하신 진리의 말씀들을 숨긴다고 하면, 예수님은 핍박은 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핍박과 멸시와 조롱과 죽음의 위협을 피하려고 진리를 감추고 하나님의 참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채 영원히 죄 중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걸고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그 진리를 듣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귀한 직분 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수많은 진리의 증인 중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증인으로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모세도 이 땅에서 사역할 때 목숨을 내걸고 충성되게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게 증언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신실하게 진리를 증거하셨다고 히브리서 3:5,6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계시록 3:14,15 말씀에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고서 성령님께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우리 예수님은 아멘이시니 곧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가감없이 전하신 온전하신 증인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이 허풍선이도 아니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도 아님을 믿읍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고 들은 바 말씀을 죽음을 무릅쓰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대로 전한 옛 선지자들과 같이 그대로 전한 충성된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진실한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이 완악한 군중 앞에서나 불신앙이 가득한 대신들이나 왕 앞에서도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담대히 증언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님도 그렇게 증언하셨고 그 선지자들처럼 죽음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 외에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선포하신 수많은 말씀들이 우리의 인간적 상식과 경험으로 볼 때 말도 되지 않는 말씀일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피를 쏟으면서 증언하신 참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읍시다. 온갖 오해와 박해와 멸시를 견디면서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서의 수많은 말씀들이 예수님의 피로써 증거하신 진리의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 그 말씀들을 깊이 사랑하여 자주 읽고 묵상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모진 상황 속에서 목숨 걸고 참 증인으로 살아가셨듯이, 우리들도 이 시대에 진리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이 진리의 말씀, 영생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증거합시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며 즐거워하였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까 하시는 말씀 중에 자기는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절대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여기서 폭탄 선언을 하셨습니다.

5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여기서 의도한 바는 그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였다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을 말씀함으로써, 그 유대인들과 달리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메시야, 구원자로 믿고 기뻐하였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약 1800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나의 때’ 곧 ‘예수님의 때’란 다른 성경에서 보면, 보통 예수님의 재림의 때,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한 예를 들면, 빌립보서 2:16 말씀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는데, 이 ‘그리스도의 날’은 주님의 심판의 날,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깃점으로 한 예수님의 지상 사역 전체를 두고 가리킨다고 보여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 중에 만민의 복이 될 구원자가 오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서 그 날이 다가올 것을 항상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즐거워하다’는 헬라어 동사 ‘아갈리오’는 “기뻐 날뛰다, 대단히 기뻐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므로, 아브라함이 장차 그의 후손 중에 우리 구주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구원 사역으로 만민이 구원받을 그 날을 몹시 기뻐하며 설레며 기다렸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원문 동사를 보면, 보았다는 것도 과거 시제요 기뻐하였다는 것도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 아브라함이 적어도 암시적으로라도 예수님의 날이 도래할 것을 과거에 보았고 기뻐하였던 적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1800년 전에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날을 미리 보았고 또 기뻐하였을까요?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언약을 굳게 믿음으로써 장래 자기 후손 중에 구주가 태어나 만민의 복이 될 것을 믿음으로 미리 보고 즐거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18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른 말씀이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단적인 예입니다. 분명 그의 씨앗 곧 그의 후손 중에 구주가 태어나서 그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분명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태어나실 것과 그의 사역의 복된 열매를 미리 보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날을 기뻐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의 탄생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날을 도래할 것을 미리 보고 기뻐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의 나이 백세에 그 아내 사라의 나이 구십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당시 아브라함과 사라는 고령의 나이로서 도저히 자식을 얻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 기적을 베푸사 이삭을 낳게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로써 이삭을 통하여 그 후손 중에 장차 메시야가 태어날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확고해졌고 태어난 이삭을 보면서 그는 장차 메시야가 태어날 것과 그의 구원 사역을 미리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이 웃음인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볼 때마다 장차 예수께서 오셔서 구원하실 것을 미리 보고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또 창세기 18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두 천사를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은 대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때 찾아오신 여호와는 육신을 입기 전에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시려 종종 역사 속으로 찾아오신 구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약 선지자 이사야 역시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는데, 사도 요한은 바로 그 여호와가 본래적 영광을 가지고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2:41). 그러므로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여호와가 우리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하는 말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우리 구주를 이미 보았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말씀이 거짓이 아닌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증언 그대로 그렇게 믿읍시다. 이 일에 대하여 자세한 얘기는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아브라함 할아버지를 만나 뵈면 직접 여쭈어 봅시다. 할렐루야.

셋째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니라 다를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또 다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예수님께 작정하고 이렇게 물으면서 대듭니다.

5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약 33세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가 나이 서른 살 정도에 공적 사역을 처음 시작했다고 복음서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적 생애가 삼년이 지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서른 세 살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점잖고 위엄있게 행동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나이가 적어도 사십 세 정도에 가깝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연세를 많이 치더라도 오십 세는 못 되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생각에 예수님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오십 세가 못 되는데, 당시 1800년 전 살았던 아브라함을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한데, 예수님은 감히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니, 참 터무니 없는 말을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유대인들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예수님은 드디어 폭탄으로 말하면 핵폭탄급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합니다. 함께 5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용납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가 사람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신성한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1800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이 존재했던 때 전부터 예수님은 존재하고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원문의 단어를 그대로 살리면 아브라함이 생겨났던 때 전부터 예수님은 계속하여 현재적으로 존재해 오고 있는 분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분은 사람 중에 누가 있습니까? 나이를 1800살이나 먹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오래 살아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그가 분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지만 그는 동시에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여기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선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장차 오실 구원자가 영원하신 분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9:6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놀랍게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실 구주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지를 미리 예언한 미가서 5:2 말씀에도 동일한 사상을 담은 예언이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서 메시야의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이 만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요 세상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인식하고 그의 요한복음서 서론인 요한복음 1장 1절로부터 이것을 처음부터 명백히 선언하고 시작한 바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헬라적 호칭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그 요한복음 서론은 이렇게 마쳐집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도록 나타나신 분이 곧 구주 예수님이신데, 그가 바로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다시 선언해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20:28 말씀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해변으로 불러서 그들에게 다시 한번 교회를 잘 보살피는 사명을 당부할 때에, 교회를 두고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서 세운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피를 흘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곧 피 흘려 죽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여기서 하나님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구절만 더 살펴보자면 디도서 2:13 말씀에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복스러운 소망을 갖게 하시고, 또 우리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셨다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을 자세히 살펴 보아도 “우리의 크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크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신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를 꾸미고 있고 우리의 구주라는 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꾸미는 말씀입니다. 이 문장은 단 한 개의 관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두 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한 분만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크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구원자라고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제자 중에 가장 의심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감격에 차서 예수님께 고백한 그의 신앙 고백과 동일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

그러므로 이제 유대인들 앞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원전부터 살아계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였으니, 이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한 죄를 범한 것으로 보고 그를 향하여 돌을 집어 들고 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레위기 24:15,16 말씀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물론 정식 재판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인지 여부를 판정한 후에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행동으로 나선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한 순간에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지막 59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여기서 ‘숨어’라는 원문 단어는 수동태입니다. 그러므로 “숨김을 받아서”라는 것이 본래의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숨겨주심으로써 악한 자들이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지 않게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돌로 침을 받아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도록 예정되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악한 자들의 포악한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무사히 성전을 빠져나가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목숨 내걸고 그 대적자들 앞에서도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모든 말씀을 볼진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 분명합니다. 그의 모든 말들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주장들로 가득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죄 가운데 죽을 것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면 진리를 알고 진실로 자유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고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1800년 전의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속하여 존재해오신 분일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이단 사이비나 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판단으로는 이는 엄청난 신성 모독의 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장차 오실 구원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시고 유대 족속 중에서 태어나고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겠지만 그는 태초에, 상고로부터 존재하신 분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하신 아버지가 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수많은 적대적인 비판자들 앞에서 자기가 바로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낼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곁에서 직접 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도했던 사도들은 한결같이 그가 영원전부터 계신 창조주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상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모든 주장을 다 종교적 망상으로 치부하고 신성 모독의 엉터리 거짓 선지자의 말로, 미치광이의 말로 취급하든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모든 말씀 그대로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믿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처럼 돌을 들어 치던지, 아니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든지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를 종교 생활의 일환으로 나와서 좋은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의 수양이나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닌다면 그 교인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니는 것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그냥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타나 좋은 종교적 교훈들만 전해주신 분으로서 훌륭한 종교적 교사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대적자들이 자기에게 돌을 들어 치려고 덤벼들지라도 그의 엄청난 자기 선언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멸망과 영생을 가르는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에게 동일한 부담을 가지고 묻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이천년 전에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창조주시며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정녕 예수님을 믿어야만 그 이름으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는 것을 믿습니까? 정녕코 예수님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고 그를 믿는 신앙을 가짐으로써만 참된 자유를 얻게 됨을 믿습니까? 정녕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진심으로 지키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의 증인처럼 예수님이 사람 중에 뛰어난 존재 정도로만 보는 신앙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가르침인가 이제 확실하게 알게 된 줄 믿습니다. 이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어떤 목자, 또 다른 어떤 구원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이나 신천지나 안상홍 증인회나 문선명이나 정명석 이단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가를 이제 분명히 알게 된 줄 믿습니다. 오직 완전한 사람이심과 동시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흠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살려내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요동하지 맙시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렇게 철저하게 그를 반대하는 자 앞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증거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심하지 맙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단지 우리 이성과 상식을 따라 믿는 신앙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를 따라 그대로 믿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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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천안 함께가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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