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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이스라엘과 끝없이 전쟁… 다메섹이 중심도시
가깝고도 먼 이웃
성서 속에 등장하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 중 블레셋 사람들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이다. 노아의 아들 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람’이었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람 족속의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했고(창 25:20), 야곱 역시 아람 사람이었던 외삼촌 라반의 딸들과 결혼했다(창 28:2).
다윗 시대 이후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삼하 8:5, 삼하 10:18), 북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였던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왕상 22:35). 특히 아람 왕 벤하닷과 하사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증언하고 있다(왕상 20:26, 왕하 6:24, 왕하 13:4).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원수지간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과 아람은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사온 말들을 아람 왕들에게 되팔기도 했으며(왕상 10:29), 병 치료를 위해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왕하 5장).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람은 앗수르와 바벨론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제국들과 맞서는 강력한 제국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존재했다.
도시 연맹 국가
아람 사람들에 대한 초기 정보는 구약성서 외에는 많이 찾을 수가 없다. 주전 2300년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에블라 문서에 아라무(a-ra-mu)라고 불린 장소와, 비슷한 시기에 아카드의 왕이었던 나람신이 정복한 장소 중 아라메(a-ra-me)가 있으나 이곳이 아람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아람이 처음 고대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I세(주전 1114∼1076년)의 연대기로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아람 사람들은 적어도 주전 1200년께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밝혀졌다. 이들의 주 생업은 유목이었고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반농반목 그리고 상업 등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서는 아람의 여러 도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삭의 아내였던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었으며(창 25:20), 암몬 자손과 연합하여 다윗과의 전쟁을 준비한 아람 사람들 중에는 소바와 르홉 그리고 마아가 사람들이 있었다(삼하 10:8, 대상 19:6).
이와 같이 아람은 몇몇 도시들의 연맹 국가 형태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도시는 아마도 하맛과 다메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 등장하는 왕들 중 이스라엘에 가장 위협적인 왕들이었던 벤하닷과 하사엘 역시 다메섹에 거주했었다(왕상 15, 18, 19:15). 안타깝게도 아람 사람들의 땅인 시리아에서는 한동안 고고학의 발달이 더디었고 발굴이 왕성하지 못하여 이러한 도시들의 역사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했다. 더불어 다메섹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어 과거의 도시를 파헤치기가 어렵다. 현대 다메섹 도시의 주변을 발굴하기는 했지만 아주 적은 부분의 고대 모습이 드러났을 뿐이다. 고대 아람어로 기록된 문헌도 상당히 부족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어려움이 있다. 남아 있는 문헌 중 하맛의 자쿠르 석비가 대표적인 왕의 기록이며 성서 도시는 아니지만 알레포에서는 주전 14세기부터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스라엘과 역사를 공유하다
아람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무엇보다 성서가 가장 많이 제공하고 있다. 주전 1000년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세력이 가나안 땅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람 사람들은 이 남쪽 지역에 욕심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국을 건설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끊임없었다. 다윗과 접전을 벌였던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왔지만 오히려 다윗의 손에 2만2000명이 죽임을 당했고(삼하 8:5) 다윗은 다메섹에 수비대를 두어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삼하 8:6). 그러나 아람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저항했다.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은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왕이 되었으며(왕상 11:24) 이후에 다메섹은 아람의 중심도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열왕기하 6∼7장으로 아람왕 벤하닷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네 명의 나병환자의 발걸음으로 인해 아람군사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텔 단에서 발견된 하사엘의 석비는 우리에게 아람의 문헌과 이스라엘의 성서(왕하 8:28)가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텔 단 석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보다 자세하게 연재될 것이다). 더불어 아람의 멸망은 이스라엘에 기인하고 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왕하 16:7)라고 편지를 보냈고 니느웨에서 발견된 디글랏 빌레셀 Ⅲ세의 석비에는 주전 732년 그가 어떻게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파괴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다
그러나 이 공격은 사실 아람에게는 득이 되었는지 모른다. 주전 8세기 이미 앗수르의 문화적, 종교적 영향을 받고 있었던 아람 사람들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고 앗수르 사람들과 혼혈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바벨론이 앗수르를 정복할 때 이미 앗수르화된 아람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바빌론의 땅으로 흡수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람 사람들의 언어는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지방 언어로 사용되면서 결국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지역을 연결하는 표준어가 되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의 남유다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하고자 랍사게를 보냈을 때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는 랍사게의 아람 방언을 알아듣는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8:26). 또한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릴 때 그들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을 사용했다(스 4:7).
아람어는 처음에 베니게어 즉 가나안어들과 같은 알파벳을 사용했으며 다른 언어들이 사라진 후 정사각형에 유사한 형태의 알파벳으로 발전되었다. 주전 538년, 고대 히브리어 알파벳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당시 살아남아 있던 아람어 알파벳을 사용하였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헬라어가 표준어가 되었지만 아람어는 지방 언어로서 계속 사용되었다. 아람어는 후에 아랍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
‘이스라엘 왕 □람과 다윗 집 □야와 싸웠다’
하사엘이 건립 추정 ‘텔 단 石碑’
아람 왕 하사엘
지금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성서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팔레스타인의 가자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직전 시리아 정부군이 이스라엘의 골란고원으로 포탄을 쏘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도 곧바로 대응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남아 있다. 오늘날 시리아가 성서시대의 아람제국과 동일한 지역인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특히 아람의 왕 하사엘 시대에 더욱 그랬다. 하사엘은 두로와 시돈의 이세벨을 견제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다메섹으로 가서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만들라고 인정했던 자(왕상19:5)로 벤하닷을 암살하고 왕이 되었고(왕하 8:15), 선지자 엘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왕하 8:12)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장면들을 성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왕하 8:28∼29; 9:14∼15; 10:32; 12:17∼18; 13:22).
성서적 연대에 의하면 하사엘은 아람 왕으로 주전 842∼796년 다메섹에서 재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람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사엘의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의 모습은 오히려 주변 국가들의 흔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유적지들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람어로 ‘하다드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에 대해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초로 성서 밖에서 발견된 다윗의 이름
무엇보다 하사엘의 자료로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에서 발견된 석비다. 더욱이 이 석비는 성서상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동시에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세기의 발견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텔 단은 1966년부터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1993년 당시 발굴 지도자였던 비란 교수는 주전 9세기경의 도시 성문을 재현하려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고대 도로와 성벽들을 복구하면서 아람어로 기록된 두 현무암 조각들을 발견하였고 다음해 같은 지역에서 조각 하나를 더 발견하였다. 모두 13행이 보존된 이 석비는 많은 부분의 복구가 불가능하여 석비를 기록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석비는 아람의 어느 왕이 그의 승전을 기념하여 텔 단에 세웠던 것이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석비는 하다드신에 의해 왕이 된 이가 그의 아버지 땅에 침략한 이스라엘과 맞서 싸워 수십명의 왕과 수천의 말, 병거를 파괴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 석비는 ‘이스라엘의 왕 □람과 다윗 집(beit David)의 □야’와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비석이 잘려나가 읽을 수 없는 문자). 아직도 찬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비란 교수는 이 석비의 주인은 아람 왕 하사엘이며 그는 열왕기하 8:28∼29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와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 석비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결국 텔 단 석비는 성서적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석비의 보다 중요한 관심은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에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텔 단 석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다윗은 성서 외에 주변 국가의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아 역사적 존재성에 대한 의심을 받아왔다. 비록 다윗 시대인 주전 10세기 기록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이 주변 국가의 다른 언어로 기록된 문헌에 등장하였다는 것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 사람 이름 앞에 사용되는 집(beit)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김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가족을 김가네 혹은 김씨네라고 불러 가족 구성원들이 김씨라는 아버지 아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듯 남왕국 유다 왕들의 계보를 ‘다윗 집’ 즉 ‘다윗가네’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왕의 조상이 다윗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학자들은 이 석비의 진위성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또한 ‘다윗 집’이라는 글이 고대 아람어를 기록할 때 두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 표시 기호가 없는 것으로 보아 두 글자가 아닌 한 글자로 이어 읽어야 하며 도시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가드를 쳐서 점령하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내기 시작했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왕하 10:32). 그는 남쪽까지 전세를 이어나가 블레셋과 유다의 경계에 있던 가드를 쳐서 점령하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였다(왕하 12:17). 가드는 현재 텔 이스라엘 남쪽 쉐펠라 지역 엘라 골짜기에 위치한 텔 에-사피 유적지로 밝혀졌고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활발히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 책임자인 메이르 교수는 발굴 답사 초기 단계부터 텔 에-사피를 찍은 항공사진에 나타난 유적지 주변을 둘러싼 2.5㎞ 상당의 선들을 따라 부분 발굴들을 시도했는데 현대가 아닌 고대에 누군가 3m 가까이 되는 깊은 웅덩이를 팠지만 후대에 메웠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웅덩이는 마치 로마 군인들이 자주 사용한 포위공격용 웅덩이와 유사했다.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 여러 전쟁의 흔적에 의하면 한 도시를 점령할 때 공격군은 도시를 둘러싸고 깊은 웅덩이를 판 후 반대편에 자신들의 군 진영을 세웠다. 이 웅덩이는 도시를 포위한다는 의미와 함께 도시민들이 성을 빠져나가 도망가지도, 또한 외부로부터 물자를 들여오지도 못하게 하고 동시에 자신들을 공격할 수 없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텔 에-사피의 웅덩이 반대편 군 진영으로 사용된 언덕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연대와 유적지 자체에서 발견된 파괴의 연대는 하사엘의 시대와 동일시되고 있다. 더불어 텔 에-사피의 주전 9세기 거주지는 심한 화재로 인해 파괴된 침략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불에 탄 여인들의 시신들도 발견되어 엘리사가 예언했던 것처럼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성에 불을 지르고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의 배를 갈랐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8:12). 결국 하사엘의 검에 겁을 먹은 유다 왕 요아스는 그에게 여호와의 성전의 성물과 왕국의 금을 바쳐 예루살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사엘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벤하닷은 아버지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요아스에 의해 아버지 때 차지했던 성읍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성서는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찔렀으며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빼앗겼던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3:25). 아마도 이 빼앗긴 성읍들 중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경계선 상에 있던 텔 단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성읍을 되찾은 요아스는 하사엘이 세워 놓은 승전비를 깨부수고 그 조각들은 성문 입구를 포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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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드神 섬기던 아람 땅에 기독교-유대교 공존
아람의 신전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운 남유다 왕 아하스
주전 732년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공격에 겁을 먹은 남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결국 앗수르의 손에 아람은 무너지고 말았다(왕하16장). 아하스는 아람을 정복하고 다메섹에 있었던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거기 있는 아람의 신전 제단과 동일한 제단을 만들도록 하였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아하스는 ‘새 제단’(왕하 16:14)에서 제사를 지냈고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 옮겨다 놓았다. 아하스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소제물과 번제물”(15절)을 새 제단에서 드리게 했고 원래의 놋제단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여쭐’ 때만 사용하도록 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신앙적 범죄는 남유다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기억되었고 사후에는 왕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는 모욕적인 형벌로 이어졌다(역대하 28:27).
비를 불러오는 신 하다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하스보다 먼저 아람의 신들을 섬긴 기록이 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시대 당시,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가나안 신들과 함께 아람의 신들을 섬겼다(삿 10:6).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석비와 그의 말 눈가리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아람의 신은 하다드라고 불렀다. 하다드의 기원은 앗수르와 바빌론의 아다드 신이며 비를 불러오는 신이다. 그래서 하다드의 형상을 보면 한 손에는 번개, 그리고 다른 손에는 철퇴가 들려져 있다. 황소의 형상을 보여주는 하다드는 가나안뿐만 아니라 앗수르와 바빌론 지역에서도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신상으로 자주 발견된다.
하다드는 구약성서에서 시돈과 두로의 바알처럼 고대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미친 아람의 신이었다. 특히 비를 다스리는 신이었기 때문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한 신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테슙으로, 그리스에서는 제우스로, 로마에서는 주피터로 불린 신들과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기후는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다.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지나 비가 오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염원은 비를 내리는 신에 중요성을 더했고 결국 하다드는 하늘의 신 바알과 함께 최고의 신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비를 다스렸기 때문에 초목을 관리할 수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하다드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가나안의 신화에도 고대 근동지역의 기후는 하다드 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인간이 풍요롭게 살게 된 농경을 관장하는 신으로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그의 형제 신인 바다의 신 얌(yam)과 싸워 이겼으나 죽음의 신인 못(mot)과의 싸움에서는 죽고 만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온통 메말랐고 결국 그를 되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고대 근동지역은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은 이스라엘 안에도 퍼져나갔고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어느 신이 비를 내리게 하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다(왕상 18장). 하다드에 대한 신앙은 아람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뿌리 깊게 박힌 것으로, 왕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왕 이름은 ‘하다드는 도움’이라는 뜻의 하닷에셀이며(삼하 8장), 유다 왕 아사(왕상 15장)와 이스라엘 왕 아합(왕상 20장)을 괴롭힌 다메섹의 왕은 ‘하다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벤하닷이었다.
사라진 아람의 흔적위에 세워진 유대교와 기독교
앗수르와 바빌론의 영토가 된 아람지역에 하다드 신을 주신으로 했던 종교적 관습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전 4세기 이후 헬라 문명과 주전 1세기 이후 로마 문명의 부흥은 아람과 이스라엘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종교적 상황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 왔다. 이젠 아람의 이름이 아닌 수리아의 다메섹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주후 1세기 이후 다메섹에 만 명 이상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박해하고자 했던 바울과 그의 회심 사건도 일어났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헬라-로마의 종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다메섹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다메섹은 아니지만 시리아 영토 내 좀 더 앗수르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라 불리는 유적지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존의 모습이 발견된 바 있다.
두라 유로포스는 헬라-로마시대에 잘 요새화된 도시였지만 주후 3세기 참혹한 전쟁 이후 버려진 땅으로 그 이후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 1920년 발굴이 시작되자마자 당시의 버려진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이 유적지는 ‘시리아 사막의 폼페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주전 2세기경부터 헬라 문명의 상업도시가 있었던 두라 유로포스에서는 다양한 종교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주후 2세기 건축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교의 회당과 기독교의 교회가 발견되었다. 특별히 이 교회는 현재까지 발견된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로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하여 사용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벽면들은 성서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다. 재미난 것은 이 두 건물이 거리상 매우 가깝다는 것과 건축 구조에 있어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건물의 다른 점이 있다면 벽화의 내용이다. 회당의 벽화의 경우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광경,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에스더서 등을 표현한 데 반해 교회의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가 되어 있다. 두라 유로포스뿐만 아니라 아람 지역의 많은 도시들에는 유대회당과 교회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9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나게 되고 오히려 다메섹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이 사실에 당혹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 다메섹에서 도망 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시리아 지역이 보다 기독교화되는 데 불을 지폈으리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초대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시리아 정교회라 불리는 교파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696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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