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목사 사사기강해 (28) - 미가, 레위인, 단 지파, 그리고 나 (삿17:1-13)
(사사기 17:1-13)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 하였더라
8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11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
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아, 얼마 전에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을 출간한, 마스힐 바이블 교회의, 로브 벨 목사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단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서, 고통 받게 할 리 없다’고 주장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켰죠. 성도가 일만 명이 넘는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는 그런 미국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가, ‘지옥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요 근처에 있는 풀러 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힌두교인도 불교도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교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리처드 마우 풀러 신학교 총장은, 남침례신학교 총장인 알버트 말러도, 자신과 같은 입장이라고 밝혔어요.
실제로 남침례신학교의 신학 근간인, ‘원칙개요(abstracts of Principles)’라고 있어요. 그 원칙개요 5항의 ‘인간의 타락’ 조항을 보면, 인간에게는 책임질 나이라는 것이 있는데, Age of accountability죠? 책임질 나이! 그 나이가 바로 열두 살이라고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그 열두 살 나이를 끌어다 쓴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책임질 나이가 되기 전인, 열두 살 이전에 죽은 모든 아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천국에 간다’라는 게, 남침례교회의 신학이에요.
인간의 행위는 책임질 나이가 되기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책임질 나이가 지난 이후의 인간의 행위의 가치는, ‘책임’이라는 그 단어로 포장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될 만큼, 위대한 것이라는 전제가 그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꼭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길은 아니라는 거죠. 예수의 십자가와 보혈만이, 절대적인 구원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요즘 전 세계 기독교의 추세가, 내용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보편구원론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가고 있어요. 긍정이라는 단어를, 아예 자기 사전에 등록을 해버린,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나,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 오스틴도 보편구원론자입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사죠.
인간들은 지옥이라는 어두운 곳에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중한 존재이며, 그런 소중한 존재가 어떻게 지옥에 가느냐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그 행복은,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지향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긍정적 사고를 하든, 뭘 하든, 행복에 도달하라는 것이죠.
이 보편구원론!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은 어제 오늘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이 판을 치던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고, 원래 보편구원론, 유니버설리즘은 영지주의에서 나온 거예요.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고,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나, 그 보편구원론의 전도사죠? 오리겐은! 그리고 심지어 칼 바르트까지도, 보편구원론을 은근히 지지했을 정도로, 확 펼쳐서 이야기는 안 했지만, 그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그도 보편구원론을 지지했던 사람이에요.
그야말로 보편적인 인간들의 구원관이, 바로 유니버설리즘이에요.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편적 부성인,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를 해서, 결국 모든 만유는, 보편적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의 자리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을, 주체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듯 하죠. 자존감이 팍팍 살아나지 않아요?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그러한 보편구원론의 기저에는 어떤 사상이 깔려 있습니까? ‘인간 존재의 소중함!’ 미국의 건국이념의 핵심인 인간행복추구의 당위성! 토마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 안에다가’ 인간의 행복추구권은 필연적이라고 적어놨죠. 여러분이 사는 미국이요. 그거 당연한 겁니까? 인간의 행복추구권이? 그리고 존재라는 것의 그 목적성! 그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에 어울리는 존재고, 그토록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들의 행위 또한, 책임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는 말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주장할 수 있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
그런데 성경은 인간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이요, 수단이요, 도구일 뿐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이 따로 있단 말이에요. 그 목적을 위해, 동원된 수단에 불과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하야 하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거예요. 우리 교회 교인이면, 다 외우고 있어야 하는 이사야서 43장 7절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이사야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름을 주신 자라는 말이에요. 그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뜻이에요. 이름을 준 자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준다는 건, 이름을 주는 이가, 이름을 받는 자의 존재와, 내용을 정의하고, 결정하고, 채운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창세기 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그들에게 이름을 줬는데, 뭐라고 이름을 줬어요? ‘사람’이라는 이름을 줬어요. 그리고는 바로 밑에, 3절에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줬는데, 그의 이름이 ‘셋’이라 그래요. 그런데 아담이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줬다 그러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 자라는 건, 하나님의 형상을 받는 자란 뜻이죠?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진 자! 하나님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인간이 지어졌다는 그런 뜻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의 이름을 스스로에게 줄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받는 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져야 되는 게, 바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주는 자의 속성과 내용과 뜻이, 이름을 받는 자에게 이렇게 드러나게 될 때, 어떤 존재의 보편적 속성과 본질이 드러나는 걸, 뭐라 그런다 그랬어요? 독사! 영광이라고 한다 말이에요. 그것을! 그래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내 이름을 주는 자를,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사야서 43장 7절이! 그것이 피조물의 존재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속성을 설명해내는 그릇이, 바로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피조물을 비하할 필요도 없고, 피조물을 존경할 필요도 없어요. 누가 누구를 존경해요? 그냥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담아내는 그릇들인데! 이 세상에 존경받을 만한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피조물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해서는 안 돼요. 그걸 성경이 죄(罪)라 그래요.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정의하려고 하거나, 스스로의 미래를 설정하여 추구하는 것 그 자체가, 자기의 이름 주는 거잖아요? 그게 죄라니깐요.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의 정의해놓은, 세상의 복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 그것이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 이름을 주는 거잖아요? 그게 죄(罪)란 말입니다. 복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아니라니깐요. 행복추구권은 인간에게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인간 역사 전체의 죄악상을, 원시적이면서 선명한 그림으로 표현을 해놓은 바벨탑의 현장에서, 그 자리에 있는 죄인들 전체를 스스로에게 이름을 주는 자라고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다시 한 번 볼까요? 창세기 11장 4절 보세요.
(창세기 11:4)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기에서 ‘이름을 내다’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뭐라 그랬어요? 원어대로 직역을 하면, ‘이름을 새기다. 이름을 주다. 이름을 쓰다’ 누가? 자기가 자가에게! 그게 바벨탑 쌓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인간들의 타락상이에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는 거!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고, 자기의 선악구조로 선악판단을 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기로 했잖아요? 하나님이 그걸 타락(墮落)이라고 하잖아요? 그걸 진멸하겠다고 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은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탑 건설현장에 내려오셔서, 바벨탑을 부수지 않으시고, 사람을 흩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바벨탑 부셨다는 말이 나와요? 성경에? 안 부셨어요. 사람을 부셨습니다. 흩어버리셨어요. 바벨탑 건축이라는 건, 인간의 죄가, 사건화 되어서 드러나는 것이 불과한 거예요. 보다 근본적인 죄의 뿌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하나님의 역할을 해보겠다고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한 인간들의 오만불손인 거예요.
그렇게 오만불손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위! 즉 바벨탑 건설의 열심을 통하여,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믿어요. 인본주의예요. 그것이! 그걸 유대주의라고도 하고, 율법주의라고도 하죠. 거기에서 더 나가게 되면, 신의 존재의 의미 자체가 미미한 것이 되어서, 자연주의(自然主義)로 흐르게 되죠. 초월적인 존재와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까지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 열심! 운운하는 거죠. 그게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한 열심과 노력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공덕사상으로 반드시 빠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이 두시는 장기판 위의 장기 말에 불고한 존재예요. 장기판 위의 장기 말은, 절대 스스로의 비전과 야망을 근거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예요. 장기판 위의 졸이, 지 맘대로 이리 저리 움직이면 돼요? 안 돼요? 그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겼다고 자기를 자랑할 수도 없고, 졌다고 스스로 비관할 수도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왜? 그걸 움직이는 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존재성을 챙겨가질 수가 없는 존재라니깐요. 피조물은 그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몸으로, 삶으로, 표현해내다가 부르시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세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를 모형하고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교회의 구원사건을 그대로 모형 하는 거죠? 그런데 구약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어요?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훨씬 순결하고 선하고 착하게 살았나요? 뭐가 특별했나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그건 이스라엘에게 어떤 근거도 없었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됨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발라서예요. 그 이유밖에 없습니다. 바르고 뭘 해서가 아니라, 그 피만 바르면 나오는 거예요. 그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자는 다 죽었어요.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도! 애굽인이건, 이스라엘 민족 이외의 이방인이건, 피를 바른 자는 다 살았어요. 그래서 중다한 잡족이 다 같이 나오는 거예요. 그 말은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부터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다시 재구성되는 거예요. 거기서 살아나온 이들이, 이스라엘이 된다니깐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가 은혜로 가입을 하여, 선택된 어떤 무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다 죽어야 되는데!
그렇게 살아난 그들이 광야 40년을 살죠. 광야 40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도가 살아야 하는 이 역사와 인생의 비유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며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는지를 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뭘 해야 되는지, 왜 살아야 되는지, 왜 와 있는지를 알거 아닙니까? 그죠? 출애굽기 12장 12절 보세요.
(출애굽기 12:12-14, 26-27)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지니라
26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이게 유월이에요. 패스 오버(pass over)!)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내가 죽어야 할 너희를 대신해서, 어린 양을 죽여, 너희를 살려주었으니까, 이제 자자손손 너희들이 어떻게 산 존재가 되었는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라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이걸 나를 기념하라고 이야기하죠. 신약에 가면, 유월절이 어린 양을 잡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대신 되잖아요?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에, 양을 안 드시고 떡과 포도주로 바꿔버린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나를 기억하라!’ 하는 거죠? 출애굽기! 이 유월절을 기념하라는 그게 새 언약 속에서 이제 실체로 드러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인생 속에서, 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기념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며 살아야 했던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 세상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증명하는 자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명용 도구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요! 우리 자체가 구원의 목적이 아니었다니깐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구원이 필요했던 거고, 거기에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고만장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기념이라는 말 자체가, 과거의 역사가 경험한 걸, 각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 시대 속에서 현재화 하여 받아들이는 걸, 기념이라고 하잖아요? 과거에 경험됐던 게, 현재의 나에게, 현재화 되어 들어오는 걸 기념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그분의 속성과 능력과 성품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요, 수단일 뿐인 거예요. 교회는, 그 존재 자체에 목적을 갖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모든 피조물은요! 에베소서 2장 4절 보세요.
(에베소서 2:4-7)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구원을 하셨어요. ‘가르, 왜냐하면’ 이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교회를 왜 구원하셨어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온 세상에 나타내려고 구원했대요.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라니깐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내 이름을 준 그들을 내게 오라’고 그러잖아요? 우리는 목적이 아니란 말이에요. 수단(手段)이란 말입니다. 방법이며, 도구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걸 알고 가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난 죽은 흙이구나!’ 이거 알고 가는 거! ‘그 선악과 먹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거 먹고 이렇게 된 거구나!’ 이거 알고 가는 거예요. 우리는요!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역할을 맡은 존재일 뿐이에요. 출애굽기 2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살리셨는지가 명확하게 나와요. 2장 23절 보세요.
(출애굽기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신 거예요? 지금 출애굽기 2장이에요. 이스라엘이 뭘 잘 해서, 부르짖어서? 아녜요. 그건 하나님이 만들어낸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니까! ‘내가 계획한 거니까, 내가 이룰 거야!’ 하고,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니깐요. 여러분이 예뻐서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뭐가 잘 나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공덕사상이 웬 말입니까? 여러분? 연도미사가 웬 말이에요? 그러면 선조, 림보(Limbo)에 있던 사람이, 천국으로 간다고요? 천만의 말씀! 창세기 15장 13절 보세요.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나와요.
(창세기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약속이에요. 이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 약속대로 이제 내가 시행한다! 때가 됐어! 왜? 하나님께서 연도까지 딱 정해주셨거든요. 때가 됐어!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인 예수님이, 정월 14일 저녁에, 해질 무렵에, 죽으시는 거예요. 정확하게 그 시간에! 해질 무렵이란 그 단어가, 저녁과 저녁 사이거든요. 저녁과 저녁 사이!
이스라엘에게는 두 저녁이 있어요. 오후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애프터 눈(afternoon)이라는 저녁과, 6시 이후의 밤, 나이트(night)이라는 저녁이 있어. 그 두 저녁 사이를, 해질 무렵이라고 해요. 그러면 12시부터 6시 사이가 몇 시예요? 3시! 예수님이 몇 시에 돌아가셨어요? 3시에 돌아가셨다니깐요. 성경은 정확하게, 구약을 신약에서 그대로 풀어내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내가 한 약속대로 이제 이룬다! 시작 하고 이루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도, 그가 뭐가 남달라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듯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도,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 등을 따지지 않으셨어요. 그냥 당신의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만,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내신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은 내가 살릴 거야!’라고 했기 때문에 살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굳이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여 버리시죠? 그것도 약속하셨잖아요? 이스라엘을 종으로 잡고 있던 그들은 내가 징치하겠다. 왜? 교회에게 뭘 가르치기 위해서! 그래서 죽은 거예요. 괜히! 죽기 위해 창조된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징치되어 죽어야 할 자들이 만들어져서 그 때 보내지고, 그 때에 구원받게 될 그들이 또 만들어져서 보내진 거란 말입니다.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쓰시고, 거기에 맞는 등장인물들을 만들어서 내려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지옥 보낼 자 보내고, 천국 보낼 자 보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은 흙들은 ‘나를 왜 이리로 보내냐?’고 항의를 할 수가 없어요. 죽은 자거든요. 원래! 없음이거든요. 없음을 없음의 자리로 돌려보낸다는데, 어떻게 없음이, 하나님에게 항의를 합니까? 안 된다 말이에요.
마찬가지예요.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거지처럼 살다가 간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세상에게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이 땅에서 살다 간 거예요. 자기의 몸에서 고름이 흘러나오는데, 개가 와서 핥아먹었어요. 그런데 그 개를 쫓을 힘이 없는 자로 살다가 갔는데, 천국 갔어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살다간다고 해도, 그게 ‘저주가 아니다’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긴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데 이 사람이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왜 나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살게 만드셨어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냐고요?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놨는데…. 안 된다 말입니다.
부자?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떵떵거리면서, 열락을 일삼고 살아도, 저주받은 지옥에 자식일 수 있다는 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소유나 됨됨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카운트가 안 된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부자가 역할을 맡고 지옥 가는 거예요. 뭘 대단히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부터 깨야 돼요.
우리는 인본주의에 너무 푹 젖어서, 우리가 잘못해서, 내 행위가 뭔가 가치가 있는 건데, 내가 그 가치 있는 행위를 많이 내놓지 못해서, 지옥 간다고 착각해요. 이게 오만불손이라니깐요. 그리고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가치 있는 행위를 많이 내어놓아서, 천국 간다고 착각해요. 여러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카운트가 되지 않아요.
예수와 함께 하는 자의 삶 속에서, 예수가 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기뻐 보이는 거지, 인간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으로 천국과 지옥이 전혀 갈라지지 않아요. 그건 기준이 되지 않는다니깐요.
그런데 그러한 도구에 불과한 자들이, 하나님의 부성! 보편적 속성! 이런 것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은 이러셔야 된다는 둥….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실 수가 없는 분이라는 둥…. 하나님에게 훈수를 두는 게, 오늘날 신학이에요. 신학! 다 부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 인본주의 적 발상에서 나온 게, 복사상이라는 거고, 공덕사상이라는 거예요. 그건 에덴동산에서 출발해서 전 역사를 아우르면서, 지금을 관통하여 미래로 흐르는 인간들의 본질적 죄성이에요. 그러니까 신학 했다고 뻐기지 마세요. 안 한 게 훨씬 나아요. 하나님은 그걸 부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폭격을 당한 이들이, ‘저는 죽은 흙! 토기장이의 쓸모대로 몸을 맡겨야 하는 빈 그릇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지옥에 가라 하시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피조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걸, 올바른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사사기의 내용이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성이 있는 내러티브예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사사기 전체의 결론 부분이에요.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공부한 사사기 16장에서, 사사의 이야기는, 삼손으로 다 끝나요. 그리고 17장, 18장에서, 미가라는 인물과, 엉터리 레위 제사장! 그리고 그들과 정확하게 같은 욕망으로 살고 있는 단 지파가 등장을 하므로, 지금까지의 사사기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요약해주고, 19장부터 21장까지에서 다시 한 번 율법주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과, 베냐민 지파의 행태를 통하여,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고발을 하고 마치는 거예요. 다음 주면 사시기가 이제 다 끝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자신들이 이 역사와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고 싶어 하는 세상 왕들의 그 실체를 폭로시키고, 그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을 해 내시는가가, 잘 기록이 되어 있는 게, 사사기라는 책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사사기의 결론 부분에, 몰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 대접하지 않고, 자신들의 왕 됨을 위해 살던 존재였다는 것을, 아주 몰아서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사기가 이 이야기였다. 결론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사사기 17장 6절 보세요.
(사사기 17:6)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8장 1절.
(사사기 18:1)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 19장 1절.
(사사기 19:1)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사시기 21장 25절.
(사사기 21:25)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보세요. 사사기의 맨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 삼아 살지 않고, 하나님 절대의존의 존재로 살지 않고, 선악과 따먹은, ‘하나님처럼의’ 존재로 존재하는 한, 그들은 이렇게 처참한 지옥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왕이 없으므로, 그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로 사사기를 끝내고, 룻기에서 하나님이 준비한 왕! 다윗을 등장시키는 거예요.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 나오고, 오벳의 아들 이새!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로 끝내는 거예요. 왕은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더라, 그래놓고, 이어지는 사무엘 상하에서, 인간들이 세운 인간의 왕!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인본주의의 왕! 사울이 기각이 되고, 사무엘하에서, 다윗 왕이 메시아를 모형 하는, 하나님의 왕으로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사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의 필연성을 확실하게 붙들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 사사기의 결론 부분에, 첫 등장인물이 나와요. 그의 이름이 미가입니다. 성경은 굳이,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토를 달아요. 에브라임은 입다 때, 기드온 때, 계속 등장했어요. 질투의 화신으로,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그리고 성경은 항상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아! 에브라임아!’라고 표현을 하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이 전체의 이야기가 지금 ‘이스라엘의 이야기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 6절을 보면, 미가의 그 오류를 설명하면서, 이때에 ‘미가에게 왕이 없으므로’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라고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끌고 간다고요. 미가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이 미가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에브라임이 등장하고, 그 밑에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미가는 바로, 영적 이스라엘! 오늘날 교회의 모형이기도 한 거예요. 우리 안에 실제 하고 있는 죄성! 마귀성!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미가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나쁜 놈!’ 그럴 게 아니라, ‘이게 나입니다!’를 배우셔야 돼요. 그걸 고백할 수 있어야, 진짜 성경을 올바로 읽은 사람입니다. 사사기 17장 5절 보세요.
(사사기 17:5-6)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미가가 신당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또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 세우고, 이런 잘못을 했다 그래놓고, 밑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미가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끌고 간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미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 돼요. 미가의 어머니가 은 천백 냥을 잃어버렸어요. 당신 은 한 냥이 노동자 4일치의 임금이에요. 그러니까 천백 냥이면, 노동자가 4천 4백 일을 꼬박 일하고, 하나도 안 써야 모을 수 있는 거예요. 큰돈이에요. 꽤 큰돈이죠. 그 돈을 누가 훔쳐갔어요. 그래서 미가 엄마가 저주를 해버렸어요. ‘손모가지가 부러져라!’ 내지는 ‘똥통에 빠져라’는 둥, 자식이 삼 대가 저주를 받으리라! 뭐 그랬겠죠. 돈 잃어버리면, 여러분도 그러잖아요? ‘확 교통사고나 나서 죽어라!’ 뭐 이런 거!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 아들이에요. 그 도둑놈이! 그래 옆에서 미가가 듣고 있으니까, 자기네 엄마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를 저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한테 돈을 천백 냥을 다시 갖다 줬어요. 맞아 죽어야 되는데, 엄마가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 취소!’ 그런 다음에, ‘복으로 바꿔주세요.’ 그랬어요. 너무 웃기죠? 이건! ‘그게 알고 보내 내 아들이네요. 그건 안 되겠으니까, 복으로 바꿔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본문 2절 보세요.
(사사기 17:2)
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러분, 인간에게 있어서 직계가족은, 자기 존재의 확장인 거 아시죠? 자기 직계가족이 저주를 받으면, 내가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철회를 하는 것이죠. 안 되는 거예요. 얼른 말을 바꾸죠?
보세요. 미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자기 기도를 듣고 자기에게 손해 입힌 자에게 벌이나 내리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종이에요. ‘벌주세요. 저주하세요.’ 그러잖아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리고는 언제든지 자신이 기도를 바꾸면 그 기도를 듣고,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내는 여호와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가 믿고 있는 하나님 아닙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기도를 바꾼 미가의 어미가, 은 2백을 은장색에게 주어서,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지어요. 하나님에게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뇌물을 내놓고 있는 거예요. 은 2백을 내놓는다는 거죠. 헌금하는 거예요. 헌금! 복 달라고! 그리고 뇌물로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요. 그리고는 한 술 더 떠서,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세워서,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으로 삼아요. 구색을 다 갖추어서, 조작된 성전을 세우는 거예요. 이게 옛 성전! 율법이라는 거예요. 율법주의, 유대주의라는 거예요.
미가와 미가의 어미가, 자신들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자기들만의 조작된 작은 성전을 만드는 거예요. 본문 4절 보세요.
(사사기 17:4-5)
4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지금 이곳이 어디에요? 에브라임 산지라 그랬죠? 에브라임 산지에 실로가 있어요. 실로에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집이 있는 그곳에, 인간들이 만드는 가짜! 왜곡되고 조작된 하나님의 집이 서고 있는 거죠. 이게 교회라니깐요. 오늘날 교회! 인간들이 만들어낸 엉뚱한 기독교가, 진짜 교회를 버젓이 좀 먹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면, 단 지파 전체를, 이 가짜 성전이 다 장악을 해버려요. 그럼에도 실로에 하나님의 집이 있더라. 이게 18장 마지막 절이에요. 18장 31절 보세요.
(사사기 18:31)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이게 나중에 여로보암, 르호보암 때, 단에 금송아지가 서죠? 이게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이 단에! 그리고 이게 요한계시록에 14만 4천에서, 단 지파가 빠지는 대로, 이어지는 거라니깐요. 바로 이 이야기가 사사기 17장과 18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라는 거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곳에서 나오는 길은, 그들 속에 들어 있는, 그 조작된 성전 짓기를, 폭격당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 의도! 뜻 자체를 부수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성전을 짓다가 가죠. 그래서 그들을 건축자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그걸 다 허물어버리고,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도성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건축자들은 끊임없이 돌을 버리는데, 하나님은 그 돌로, 집을 지어, 새 성전을 지어, 그걸 버린 자들을 끌어들이는 거예요. 그걸 은혜(恩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이에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걸핏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별로 없고, 다 자기들의 구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집이 있는 실로에, 미가의 어미가 따로 신당을 짓는 모습인 거예요.
이 미가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에브라임이 나오고, 그 밑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가 붙어 있는 거라 그랬죠? 그런데 이 미가가, 가짜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미가가, 가짜 신당을 지어서, 그걸 우상으로 섬기고 있어요. 실로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그러니까 전체 이스라엘이, 전부 미가의 형국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건 오늘날로 바꾸면,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한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그게 진짜가 아니라, 대부분이 가짜이고, 극소수가 진자라는 거예요. 실로에 그래도 하나님의 집은 있더라! 남은 자는 그래도 있더라!
결론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의 대부분이, 결국, 자신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짜들이라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님께서 남긴 하나님의 진짜 백성들이 소수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미가가 지은 또 다른 가짜 신당이, 단 자손 전체를 장악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진짜 집은 실로에, 그래도 여전히 있더라고 18장이 끝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열심은 절대 실패될 수 없더라!
아무리 온 세상이 다 손을 잡고, ‘이게 진짜 기독교야!’라고 가더라도, 진짜 실로에 하나님의 집ㅂ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은 그렇게 신실하게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고 계시는 거예요. 그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게, 드라빔이에요. 드라빔!
드라빔은, 라헬이 야곱과 도망칠 때, 아버지로부터 훔쳐간 가정 수호신이에요. 그 드라빔은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성경에서 경고되어지는 거죠. 열왕기하 23장 보세요. 24절.
(열왕기하 23:24)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스가랴서 10장 2절.
(스가랴 10:2)
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 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이렇게 드라빔은, 구복과 점술! 나의 형통과 나의 복! 그걸 위해서! 그리고 신탁행위에 사용되기 위해, 인간의 형상으로 만든 반신상이에요. 사람 크기까지 큰 것도 있었다 그래요. 우상이에요. 그래서 그 드라빔을 그냥 우상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우상! 에스겔서 21장 21절 보세요.
(에스겔 21:21)
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살은 화살이에요.) 우상에게 묻고 …
여기서 ‘우상에게 묻고’가, 이 드라빔이라는 단어예요. 이게 드라빔! 그러니까 드라빔은 점을 치는 거예요. 구복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우상!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장의 옷인 에봇과,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지은, 성전을 지은, 미가의 어미가, 집 안에 조작되고 왜곡된 작은 성전을 지은 미가의 어미가, 드라빔을 함께 만들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가 한 모든 신앙생활이라는 게 뭐였다는 거예요? 결국은 ‘우상 섬김이었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신의 복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놓는다 할지라도, 그건 우상 섬김인 거예요. 자기의 인기나 체면을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전부 구제에 썼다 하더라도, 그건 우상 섬김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성전 건축 자체가 우상을 짓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당신의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었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떠냐? 말이에요. 우리는 미가나, 미가의 어미처럼, 자신의 돈이나 시간! 노동력들을 내놓고, 결국 자기의 세상적 유익을 챙기기 위해, 이곳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나의 구원! 나의 천국! 나의 형통! 나의 복! 나의 소원! 나의 문제 해결! 어때요? 그거 우리 목적 아녜요? 그러면 미가나 미가 어미, 그 사람들과 우리가 뭐가 다릅니까?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나의 천국과 나의 구원! 이건 뭔가 좀 고상한 목적인 거 같으세요? 거기에 주인공이 누구예요? ‘나’라니깐요. 여러분, 그걸 기복주의라고 그래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돈 주세요! 건강주세요!’ 이게 기복주의가 아니라! 이건 순진한 기복주의죠. 내 천국, 내 구원 이거 챙기기 위해 난 신앙생활 합니다. 이게 진짜 무서운 기복주의라니까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는 그곳에 가기 위해서, 내가 잠깐 고생해주지 뭐! 이게 우상 섬김이에요. 아니 그게 올바른 목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깐요.
신앙생활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지금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 없는 자입니다.’ 이 고백하고 가는 거지! 내 구원, 내 천국 챙기기 위해, 내가 이 땅에서 잠깐 손해를 보죠. 무슨 손해를 봐요? 없음이었던 자가, 손해 볼 게 뭐가 있어요. 손해는 ‘있음’이 보는 거라니깐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렇게 기고만장한 거예요. 그거 자체가 사사기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죄였어요. 진멸 당할 죄!
그래서 미가 다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수호하는 그런 자들의 대표인, 레위인이 또 등장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강화하여 설명해주는 거예요. 율법의 대표! 율법주의의 수호자! 레위인 제사장! 성전의 사람!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에서 엉뚱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자에서 미가와 미가의 어미! 즉 옛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의 정체가, 이제 레위인이라는 성전의 제사장에게서 다시 한 번, 그 실체를 폭로 당하게 돼요. 점층적이며, 반복적인 성경의 기법이라 그랬어요.
이 레위인 소년은, 사사기 가자에 의하면, 모세의 손자입니다. 사사기 18장 37절을 보세요.
(사사기 18:30)
30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그러죠? 그 레위인이 모세의 손자라 그래요. 한글 개역성경이, 그 레위 소년을 모세의 손자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그 때가 사사시대 말기인 것을 감안할 때, 손자는 아녜요. 그렇게 오래 못살았다 말이에요. 그 때 이 ‘벤’이라는 단어가 후손이라는 단어예요. 자손! 유다 벤 허 그러면, 훌의 자손 유다란 뜻이잖아요? ‘벤’이라는 단어는 후손이에요. 자손! 그 레위인 소년은 모세의 후손이었단 말이에요. 성경이 왜 그를 모세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할까요?
모세는 구약의 율법! 그 구약의 성전을 대표하는 선지자죠? 옛 언약의 대표! 사사기가 지금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을 허물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 성전이 허물어져야, 하늘의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모세로 대표되는 구약을 허물고 있는 거라니깐요. 구약의 옛 성전!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옛 성전을 헐어라! 사흘 만에 내가 짓는다! 그 성전은 나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직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라고 그래요. 바울은요!
원래 레위인은, 여섯 개의 도피성을 포함한 40여개의 성읍에 흩어져 살도록 되어 있었죠. 그건 하나님의 명령이었어요. 나머지 지파에게, 레위인들이 거할 성을 주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지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인이라는 사람이, 여기 저기 거처를 찾아서 떠돌고 다니고 있는 거예요. 살 데가 없어서! 안 준거예요. 뿐만 아니에요. 레위인은,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못 받는 대신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다른 지파들로부터 생활비를 받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게 십일조예요. 장자가 바쳐야 할 자리에, 대신 바쳐진 자에게, 고맙다고 드리는 속전이, 십일조란 말이에요. 그래서 십일조는 구약에서 완료된 거란 말입니다. 그 액수가 보통 다른 지파 사람들의 평균 생활비의, GNP의 네 배 정도 되었어요.
그러니까 레위인들은 꽤 잘 살았던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레위인은 거할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이러 저리 떠돌고 있어요. 본문 8절 보세요.
(사사기 17:8)
8 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자, 이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어디서 오는지 유의해서 보세요. 유다 베들레헴에서 와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척 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던 거예요.
레위인도 마찬가지예요. 레위인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도록 바쳐진 사람들이었어요.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 죽고,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게, 하나님 앞에 바쳐진 레위인이에요.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만 생활해야 돼요.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 저기 떠돌면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궁리를 하고 있어요. 레위인이나, 나머지 열한 지파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을 어기고 있는 거예요. 총체적 타락(墮落)인 거예요.
복에 기갈이 들린 미가가, 레위인을 돈을 사요. 왜? 그를 중재자로 세워서, 샤먼으로 세워서, 하나님에게 복을 얻어내기 위해서예요. 사사기 17장 10절 보세요.
(사사기 17:10)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연봉을 제시하죠? 은 열! 연봉으로 주고, 양복 한 벌! 해마다 해주고, 먹을 거 다 대준다, 그랬더니, 레위인이 오케이! 들어갔어요. 레위인은 이렇게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똑같아요. 오늘날 회중들이 모여서, 우리들에게 좋은 이야기해주는 사람 모여라! 그러고, 연봉을 막 제시하죠. 맞는 사람이 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허허 해주는 거죠. 설교도 해주고, 안수도 해주고, 축복도 해주고, 똑같은 거예요. 해 아래 새 것 없어요. 역사는 계속 그 죄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걸 교회라고 하나요? 이게 성전입니까? 진짜 제사장이 왔다고, 레위인이 왔다고, 거기에 하나님의 신이 임할까요? 돈에 고용된 제사장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할까요? 월급 주는 사람이 사람인데! 그리고 돈으로 샤먼을 고용한 그 자가, 어떻게 올바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까? 이미 애시 당초 글러먹은 거예요.
그래서 이 미가가, 그 레위인을 고용하면서 뭐라고 하는 지 보세요. 본문 13절
(사사기 17:13)
13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진짜 레위인이! 그 동안에는 내 형제가 제사장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진짜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내 제사장이에요.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여러분 신령한 목사 만나면, 복 받습니까? 하하 저는 그런 면에서 여러분에게 늘 죄송해요. 어쩌다 이런 목사를 만나서, 계속 망하고, 망하고, 또 망하는지!
이게 바로 인간들이 고안해낸, 종교의 모습인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복을 얻어내기 위해서, 성전까지도 조작해내는, 미가와 미가의 어미!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가짜 성전에서, 가짜 제사장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레위인!! 모두 다 힘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 아담군상들의 전형이에요.
그렇게 이제 18장으로 넘어가면, 17장의 그 모든 아담들의 총화로, 이제 단 지파가 등장을 하는 거예요. 그 단 지파 역시 힘의 원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모습이, 이러저러한 그림으로 계속 드러나고 있는 거예요. 단 지파가, 자기들이 거할 땅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그 미가의 집, 레위 제사장을 만나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거해야지, 자기들이 거할 땅을 자기들이 찾아다니면 안 돼요. 이 단 지파는, 사사기 초입에서,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서 산꼭대기로 쫓겨 가더니, 여태까지 헤매고 있어요. 이 단 지파가! 그 단 지파가,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형통을 점쳐 달라 그래요. 미가와 똑같죠? 드라빔 취급하는 거예요. 레위인을! ‘야! 점쳐봐라! 지금 우리가 잘 되겠니? 안 되겠니?’ 물어보는 거예요. 18장 5절 보세요.
(사사기 18:5)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무당 취급하는 거예요. 이게 무당잡교라는 거예요. 무당굿이에요. 이것이! 보시다시피,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복과 형통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레위인이 좋은 말을 해줘요. 어차피 반반인데, 이왕이면 좋은 말 해줘야죠. 뭐 그런데 또 이런 원수들이 하는 말은 다 맞아요. 또 ‘평안히 가라! 형통할 것이다.’ 그랬더니, 딱 맞아떨어졌어요. 좋은 땅을 찾아냈어요. 그러니까 신기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야! 쟤 아주 신통하네. 야! 우리 쟤 잡아가자!’ 그래서 가서 제안을 하죠. ‘너, 50명 있는 교회 목사 할래? 5천 명 교회 목사 할래?’ 그러잖아요? ‘야! 한 가정의 제사장이 낫니? 한 지파의 제사장이 낫니?’ 그러니까 이 레위인이 5천 명, 그리고 금방, 금방 갔어요. 이 레위인이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금방 들통 난 거죠. 자기를 거두어준 사람을, 그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배반하고, 그냥 따라가 버렸어요. 큰 교회로! 사사기 18장 17절 보세요.
(사사기 18:17-20)
17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할 때에 제사장은 병기를 띤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 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흐흐흐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힘으로 힘을 뺏는 거죠. 미가가 힘으로 축적해놓은 걸,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와서 뺏어 가는 거예요. 이게 세상입니다. 그리고는 에봇과 드라빔과 우상까지 다 빼앗아 가요. 오직 목적은 하나! 복과 형통이에요.
그랬더니 미가가 이웃사람을 모아서 다시 또 좇아가요. 힘으로 다시 뺏어 오겠다는 거예요. 이게 세상이라니깐요. 그런데 가보니까, 단 지파가 의외로 숫자가 많아요. 그래도 가서 할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너희들 왜 그걸 훔쳐갔니?’ 그랬더니, 단 지파가 뭐라 그래요? ‘너, 말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여!’ 그랬더니 돌아서 갔어요. 집으로! 흐흐흐흐
이 약자 앞에서 한없이 강해지고, 강자 앞에서 한없이 약한 이 인간 군상들의 모습인 거죠. 이게 세상인 거예요. 정의고 뭐고 없어요. 강함이 정의예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에요. ‘강한 게 정의다!’ 니체의 초인사상 마찬가지예요. 강한 게 정의다!
힘을 추구하기 위해서 힘을 동원하고, 그 힘을 가진 자가 계속 힘을 축적해나가면서, 약자들을 밟는,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 이게 마귀의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이게 마귀세상이에요. 여기는요! 공산주의? 똑같아요. 여러분? 마귀세상이에요. 여기는 다! 사사기 18장 22절 보세요.
(사사기 18:22-26)
22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23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
24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이제 다시 한 번 한 마디만하면 죽여! 이런 뜻이에요.)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이게 무슨 조폭 영화도 아니고, 말이죠? 이거! 이렇게 단 지파와 레위인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요. 결국 나중에, 단 지파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게 끝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뭐예요? 그러니까 ‘너희들 이제 다 죽었다!’예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니까, 이게 끝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미가나, 미가 어미나, 레위인이나, 단 지파나, 모두 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의 투영이잖아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현제의 모습의 투영이에요. 과거에 그랬었다. 아녜요. 지금 더 해요. 우리요!
심지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갖고도, 이걸 파워로 쓰는 인간들이우리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구원! 나의 천국! 나의 지옥을 모면하기! 나의 소원성취! 나의 형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모습에 투영이라면, 이렇게 끝나면 안 되잖아요? 구원의 이야기가 있어야죠? 여기에 예수가 어디 있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죄인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대신하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유다 베들레헴으로부터, 맏아들 하나가 우상을 섬김으로 죽어 마땅한 미가의 집으로 찾아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레위 소년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와 성공주의, 기복주의와 자연주의로 똘똘 뭉친 죄인을 모형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러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유대 베들레헴으로 오신 진정한 하늘의 레위인! 진짜 제사장!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하늘의 대제사장! 그 참 제사장! 진짜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거예요. 동시에!
마치 삼손을 포함한 사사기의 사사들이 전부 추악한 이스라엘의 실체를 함의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들을 구원해내는 메시아의 모형으로 쓰인 것처럼, 유다 베들레헴에서 오는 제사장에 의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그 레위인을 굳이 모세의 후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레위인을!
모세는 신약의 안경으로 바라볼 때,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죽는 것으로, 그 역할을 마감하는 거예요. 율법은 절대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를 보여주는 거니까. 그렇다고 모세가 천국 못 갔나? 아니죠. 변화산 위에 있었단 말입니다. 역할을 하고 간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그 모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면서,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한 거란 말입니다. 내가 바로 예수의 모형이라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오늘 본문의 그 레위인은, 멸망 받아야 마땅한 율법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그래서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멸망 받아 죽어야 할 미가와 단 지파를 살리는, 메시아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거예요.
레위인 때문에, 그 미가의 집의 신당이 헐리고, 우상이 탈취당하고, 에봇과 드라빔이 탈취당해요. 그거 있으면, 하나님 앞에 죽는 거예요. 그런데 레위인 때문에, 레위인이 미가의 집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게 세워놓은 조작된 옛 성전이, 파괴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미가는 사는 거예요. 힘 없이 돌아서므로 말미암아, 망해서 돌아서므로 말미암아!
단 지파는, 그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못 찾고 있었어요. 그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못 받았다는 건, 하나님의 나라의 이방인으로 지금 살고 있단 뜻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그들을 형통케 하여, 결국은 아름다운 땅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내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표피적으로, 껍데기만 보면 안 되는 거예요. 항상 예수로, 안에서부터 훑어 올라와야 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사사기가 어떻게 시작되죠? 유다 지파가 선봉에 서서, 마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을 대표로 수행하는 것처럼 시작되죠? 사사기 1장 1절부터, 유다 지파가 나와요. 그게 결론에서 유다에 레위인이 죽어야 할 자들을 살리는 모습으로 다시 반복되어 설명되는 거예요. 이걸 인쿨루지오 구조라 그랬죠, 그죠?
그리고 사사기 1장에서도, 단 지파는 계속해서 헤매고 있었어요. 땅을 못 찾고, 그런데 마지막 결론에서도, 단 지파가 땅을 못 찾고 헤매고 있다니깐요. 이건 어떤 주석서에도 없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놓치면 끝이에요. 그냥! 사사기 1장 1절 보세요.
(사사기 1:1-3)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 갈 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렇게 시작이 되어서 무려, 21절까지가, 다 유다 지파의 전쟁이에요. 제가 사사기 강해 초기에 이 부분을 설명해 드리면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사사기 서론에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유언에서 저주를 받아, 흩어지도록 되어 있는 지파죠? 그렇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칼을 뽑아든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 흩어져서 멸망 되어야 할 자들인데, 유다 지파의 기업에 빌붙어서 살아나게 되는 자로 시므온 지파가 성경 전체에서 설명 된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줄어드는 거 같다가, 유다지파 때문에 다시 부흥하게 되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시므온 지파가!
그래서 사사기 초입에서, 이 유다 지파와 시므온의 이야기가, 이렇게 펼쳐지면서, 내가 이제 이 유다 지파와 단 지파를 갖고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펼쳐보겠다고 해서, 34절에서, 다른 지파는 다 기업을 받는데, 단 지파만 기업을 못 받고 쫓겨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게 사사기 결론에서, 뭉뚱그려 결론지어지고, 이게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져가는 거예요. 북 이스라엘, 남 유대의 이야기를 거쳐서! 그게 단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사사기는 그렇게 유다 지파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기업에 참여해서, 거저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 속 시므온들의 구원 이야기예요. 그건 다른 말로, 유다 지파의 후손인 예수에 의해, 구원받게 되는, 단 지파! 죽어야 할, 없어져야 할 단 지파의 구원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단 지파고, 여러분이 레위인이에요. 여러분이 미가고, 여러분이 미가 어미란 말입니다. 자, 사사기 1장 34절 보세요.
(사사기 1:34)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그죠? 이제 18장으로 가 보세요. 1절.
(사사기 18:1)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했다는 거예요. 힘이 없다는 게 아녜요. 어차피 가나안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싸운 전쟁이 아니었잖아요? 그게 사사기 전체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땅을 못 얻었다는 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거죠. 하나님 절대의존존재로 살지 않고, 자기들의 힘과 세상의 힘을 의지했다는 거 아녜요? 이게 죽어야 할 사사기 전체의 이스라엘이었잖아요? 그걸 부수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단 지파가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지금! 단 지파는, 창세기의 야곱의 유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뱀의 역할을 하도록 투입된, 그런 지파라 그랬습니다. 다시 보고 갈게요. 창세기 49장 16절.
(창세기 49:16-17)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발뒤꿈치를 무는 뱀의 역할을 하는 게, 단 지파예요. 그러니까 이 단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성을 총칭하고, 함축하고 있는 게 단 지파죠? 그러니까 14만 4천에서 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빠져야 할 단 지파 대신에, 엉뚱한 므낫세 지파가 들어가 있어요. 14만 4천에!
그러니까 므낫세 지파는, 죽어야 할 단 지파가 역사 속에서 죽고, 부활한 부활의 지파로 등장하는 게 므낫세 지파예요. 그러니까 이 단 지파의 모습이, 미가와 미가의 어미의 모습이, 레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렇게 죽여서, 단 지파처럼 죽여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부활의 므낫세로 살려낸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이며, 사사기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죽어야 할 우리 안에 단 지파가 유다 베들레헴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얻고, 므낫세로 부활을 해서 하늘의 기업을 얻게 되는 이야기! 그게 바로 사사기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는, 반드시 그 레위인으로 말미암아 빼앗기는 게 있어야 돼요. 에봇! 빼앗겨야 되고, 드라빔! 빼앗겨야 되고, 신상! 빼앗겨야 되고, 여러분이 건축한 성전! 부수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걸 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걸, 지옥이라 그래요.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그걸 뺏기지 않고, 영원 속에서 그걸 빼앗기는 게, 영원한 지옥이라니깐요.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거예요. 성도는!
그런데 지옥이 없다고요? 이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지옥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는데, 지옥이 없다니요! 미국 최고의 신학교 총장들이 지옥이 없대요. 모든 인간은 다 천국 간대요. 다 회복될 거래요. 아뇨. 하나님은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은혜 베풀 자, 저주할 자를 구별하여 만들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다 회복시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만유의 회복은, 하나님의 나라 안의 만유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 운운하면서 너스레를 떨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우리가 뭔데? 뭔데 이 세상에서 복을 달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구약에서 복을 간혹 말씀하신 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의 실체가 아직 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들어서, 그 복이 뭔가를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 구약이 닫혔단 말이에요.
신약 어디에 하나님의 복 받은 자는 건강하고, 부자 되고, 병 안 걸리고, 자식이 잘 되고, 이런 구절이 어디에 나와요? 여러분, 복 설교하는 목사들이 신약 성경에서 구절 선택하는 거 보셨어요? 다 구약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만약에, 그런 세상적인 구약의 복을 원하신다면, 여러분, 지금 예배하러 올 때, 소 한 마리씩 끌고 오셔야 돼요. 저는 여기서 맨날 잡아야 돼! 그건 안 하면서, 왜 구약의 복은 여전히 원하고 계세요?
제가 보기엔 이 시대에 기독교는 없어요. 그냥 실로에 가짜 신당이, 버젓이 지어져 있고, 그 속에서 무당굿들 하는 거예요. 구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형통을 위해서 공덕을 쌓는 건, 불교나 무속신앙인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가치 있게 쳐주거든요. 왜? 인간은 신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브라만의 일부예요. 모든 존재가!
기독교는, 하나님 측에서 일방적으로 쏟아 부으시는 하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지, 힘을 얻어내어서, 하늘을 정복하겠다는 오만불손한 자리로 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기독교는,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교, 이런 다른 종교와 윤리, 도덕의 경쟁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누가 더 착하게 사는 지 보자! ‘야, 불교인들도 저렇게 착하게 사는데, 우리가 쪽팔리게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니? 더 착하게 살자!’ 이거 기독교가 아니라니까요. 기독교는 윤리 경쟁을 하는 종교 아녜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냥 존재도 아니구나! 그냥 그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너무 소중해서 지옥에 가면 안 된다고요? 설사 지옥이 있다 해도, 인간의 선한 행위가 그 지옥을 모면하게 해줄 수 있다고요? 하늘에 있는 세인트(saints), 성자들에게 기도하고, 그 성자가 마리아에게 부탁하고, 마리아가 예수에게 부탁을 해서 연옥에 있는 자도 언제든지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요?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모든 인간은 전부 미가고, 미가의 어미이며, 레위인이며, 단 지파이며, 에브라임이며, 시므온이에요. 그들은 모두 다 지옥에 보내져서, 하나님 없는 삭막한 삶을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성도가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그리고는 자신을 주인 삼아 살던, 자신을 왕 삼아 살던, 진짜 왕을, 왕 대접하지 않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그 삶을 폭격당하고, 하나님의 도성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지옥의 그 처절함을 맛보셔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인생의 결국을 조금이라도 경험하셔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와야 돼요. ‘하나님!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그래서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지옥을 사셔야 된다니깐요. ‘하나님!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땅을 내게 주세요. 나의 유익과 나의 쾌락을 위해서, 내가 만든 이 가짜 성전! 이거 부수어주세요. 가짜 에봇! 이 망할 드라빔! 다 빼앗아가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 살과 피가 되어 있는 그걸 빼앗아갈 때, 거기에서 내 마음을 끊어낼 때, 우리가 지옥을 산다니깐요. 내가 그게 아프다는 건, 하나님보다 그게 더 소중하다는 거 아녜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거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끊어내세요. 그 순간에 우리는 지옥을 경험해요. 하나님도 완전히 모르겠는데, 내가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던 게,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니깐요.
여러분, 지옥을 무슨 불이 소금처럼 떨어지고, 야차들이 눈알을 뽑아서 저글링을 하고 껍데기를 벗겨서 마차를 끌고, 이런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불교의 무간지옥이란 말입니다. 왜 불교의 지옥관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그런 엉터리 지옥이 된 거예요. 그거보다 더 무서운 지옥이 있다는 걸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셔야 돼요.
어떤 때, 그런 생각 안 드세요? ‘하나님! 차라리 내 껍데기 벗기세요. 차라리 나를 불태워버리세요.’ 이런 경험 말고, ‘하나님 내 눈알을 차라리 뽑으세요.’ 이런 경험을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하셔야 돼요. 이 세상 속에서! 그 불타는 지옥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이 나에게 진짜 하나님으로 와 있지 않고, 내가 다른 것을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갈 때 느끼는 그런, 그 지옥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셔야 된다니깐요. 그래야 그 하나님을 붙들 수 있어요. ‘내가 다른 건, 다 놔도, 예수님 손은 절대 못 놔!’ 이리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예수를 끌어 올리니까, 그 밑에 예수의 동생들이 줄줄이 따라 올라오더라. 이거 안 놓더라는 거예요. 다른 건 다 놓고, 예수의 발만 꼭 붙들고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그 지옥이 없다고요. 영원 속에서 그 지옥을 살 사람들이 있다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세상에서 그 지옥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성령 받은 자 아녜요. 성령은 이 세상에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한다고요. 그 성령의 책망이, 지옥이에요. 내가 레위인이구나! 내가 미가구나! 내가 미가 어미구나! 내가 단 지파구나! 내가 시므온이구나! 이게 나에게 폭로될 때, 그거보다 무서운 지옥은 없어요. 그게 우리 성도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것이면, 여러분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바로 그 자는, 긍휼의 대상인 거예요. 어차피, 그도 하나님의 그릇인 거예요. 가여운!
저는 오늘 새벽설교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큰 자유함을 얻었어요.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어요. ‘아! 이 지옥 같은 인생을 어떻게 더 살아야 하나?’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세요. ‘내가 이걸 계속해야 되나? 난 비행기를 타고 어디로 떠나버릴까’ 하고 있는 찰나에, 하나님이 ‘그게 맞는 거야!’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는데, 내 삶이 왜 이 모양이야? 불평하지 마세요. 지옥의 불은, 성령의 불이에요. 여러분, 지옥을 마귀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입니다. 지옥의 주인도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떨어지면, 그것에 탄다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세상 속에서 성령의 불을 받아요. 그리고는 그 성령의 불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나의 점과 흠을 다 태워버리는 은혜의 불이라는 걸 알고, 하나님나라에서 그 성령과 연합! 기쁘게 연합되어 사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훨훨 타야 돼요. 성령의 불에! 성령 받으면, 방언이나 하고, 병이나 고치고, 이 따위 것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타서 죽는 거예요. 그게 성령충만입니다. 그게 성령의 불인 거예요. 지옥 불을 역사 속에서 사는 이를,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받으며 사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그 지옥의 성령의 불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영원 속에서, 그 처참하게 불에 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왜 이렇게 취급하느냐’고 하나님께 대들 수 없어요. 그게 피조물의 올바른 자리인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없는 어둠이 무엇이며, 하나님 없는 지옥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리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를, 배우고 증명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우리의 소유를 조금 내놓고, 이 세상에서의 구복과, 내가 바라는 미래의 소원과, 내가 원하는 천국과, 내가 원하는 그런 구원! 그것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하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안에 예수가 왕 되어 들어오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만 삽니까? 예수가 끌고 가시는, 밖에서 띠 띠우고 나를 끌고 가시는, 그 왕의 인도하심에, 내 몸을 맡길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김성수목사 강해설교 사사기(28) - 미가, 레위인, 단 지파, 그리고 나 (삿17:1-13)|작성자 클래식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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