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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공부

밧세바의 넷째 아들 솔로몬

작성자개그맨|작성시간20.11.06|조회수4,340 목록 댓글 0

밧세바의 넷째 아들 솔로몬

 

 

<삼하12: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그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대상3:1~5>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이 이러하니 맏아들은 압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세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소생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 여섯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라 다윗이 거기서 칠년 육개월을 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밧세바)의 소생이요.

 

위의 성경 두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특별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 분명 역대상에 기록되었듯이(첫째는 압논, 둘째, 셋째...로 순서상 기록이 되었음을 전제함) 솔로몬은 밧세바의 넷째 아들이다. 그런데 삼하12장의 기록을 보면 마치 다윗의 범죄로 인해 잉태된 첫 아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자마자 그 슬픔에 젖어있던 밧세바를 위로하고 재차 난 아들이 솔로몬인 것처럼 되어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하나님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시려는 것일까?

 

만일 솔로몬이 밧세바의 첫 아들이라면 아주 큰 넌센스가 발생한다. 우선 하나님은 다윗이 저지른 범과에 대해 아직 어떠한 처벌도 시행치 않으신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죄가 너무도 크고 중대한 사안인지라, 이놈을 어떻게 엄벌에 처할까 고민 중이신데, 다윗 제가 무엇이 그리 당당해서 밧세바를 위로하고 아들을 낳는다는 말인가? 밧세바 또한 바보가 아닐진대, 하늘과 땅에 고개를 쳐들 수 없는 대죄인으로서 그 위로를 받고 희희낙낙 하겠는가?

 

게다가 생명을 잉태시키고 출산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이 금방 그의 범죄를 잊으시고 징계 받아야 할 그에게 복을 내려 아들을 낳게 하시고, 나단까지 보내어 닉네임을 선사하셨다는 말인가? 이런 하나님은 과연 한없이 좋으신 분인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법도 없고 기준도 없는 힘없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요, 배알도 없으신 분인가?

 

그런 분이 과연 우주를 호령하시며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으로서의 권위가 있으신 분인가? 그렇게 줏대가 없으시고 고무줄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편애에 따라 좌지우지 하시는 분이신가? 그래서 사울은 버리시고 다윗은 감싸 안으셨나? 사리판단 없이 잘못한 것을 싹싹 빌면 금방 사하시고, 설사 저주를 하셔도 삼대까지만 하시되, 복은 천대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이실까? 이것이 용서와 자비가 풍성하다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반대로 법집행에 있어서 추상같이 엄하시고 단호하시다. 심고 뿌린 대로 거두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버리실 자는 인정사정없으신 분이시다. 말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으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여서 백보좌 심판대를 비켜갈 수가 없다. 이러한 당신의 통치철학과 행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다윗의 사건이 등용된 것이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다윗의 욕심에서 발발된 것이기에 다윗도 할 말은 없다. 다윗만큼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사건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셨을 것이다. 모두가 주시하는 만대에 흐르는 교훈의 표본으로서 말이다. 장성한 자가 하나님을 배신하여 짐짓죄를 짓는다면 누구든지 뼈를 추릴 수 없다는 심판의 사례다. 예외는 없다. 목숨만 제외하고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고 나서야 자유를 되찾는 걸 보여주는 교과서이다.

 

이제 그 비밀을 열어보고자 한다. 장성한 자의 범죄->그에 따른 철저한 보응->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넷째 아들과 솔로몬과 위로라는 말에 숨겨 놓으셨다. 솔로몬이란 히브리어로 평강, 평화, 배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평강과 배상이 어떻게 동의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단서이다. A와 B사이에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평강과 평화가 없다. 이같이 솔로몬이라는 말은 원인과 결과가 함께 있는 특이한 단어이다.

 

그러니까 다윗의 범죄에 대해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정하신 징계에 혹독한 댓가(배상)를 치른 후에 솔로몬을 낳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은 죽어 마땅하겠지만 다행히 다윗은 진실되게 회개하고 뉘우침이 있어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말이다. 자신의 계획적이고 악랄하고 가증한 범죄에 대해 너무도 후회스럽고,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날밤을 지새며 애통해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열려져서 회복이 된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인 마음의 변화를 솔로몬에 앞서 난, 세 아들의 이름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들은 그 사람의 삶의 표현이다. 시므아, 소밥, 나단의 이름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의 처신을 보여주는 말들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다윗은 밧세바를 통해 실제로 아들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이면의 영적인 뜻이 그렇다는 말이다. 시므아-소밥-나단의 의미와 심리적인 표현은 강해설교에서 설명했으니 참고 하시면 된다.

 

이제는 밧세바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자. 문자적으로 첫 아들이 죽자마자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니까, 그녀가 마음이 풀려서 기쁨을 회복했다면 그녀는 아주 비양심적인 사람이다. 지나치게 경박하고 호색적이며 이기적이며 가벼운 여자이다. 그런 여자를 미래의 대왕 대비감으로 하나님이 택하실 리가 없다. 성경을 문자대로만 보고 잘못된 추측으로 밧세바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 당시의 밧세바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았을 심경이었을 것이다. 한 지아비(우리아)의 아내로서 너무도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잠시 틈탄 춘풍에 마음이 넘어가서 옥외 목욕한 것이 발단이 되어 지아비의 목숨을 빼앗고, 처음으로 잉태한 생명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아픔을 맛보야만 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으로 말이다. 그녀가 어찌 평안을 가졌겠는가? 죄책으로 인한 깊은 절망 속에서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을 것이다.

 

비록 육신은 살아있어, 다윗은 총애를 받으며 세 아들을 낳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두움이 짓눌려있는 우울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왕궁의 산해진미가 입에 맞을 리가 없다. 밤마다 뜬 눈으로 지새기가 일쑤다. 첫 사랑 우리아가 날마다 눈에 어른거리고, 단초란 살림이나마 마음편한 그 때가 얼마나 그리운지... 옛 집의 향수에 눈물을 흘리며 자학으로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중죄를 저질렀고, 그리고 그 죄의 쓰디쓴 맛을 아는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지 않는가? 이제 남은 삶은 어리석은 과거를 회개하며 절대 근신하며 사는 여자로 서서히, 그리고 단호히 마음을 다잡아 사는 여자로 탈바꿈 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을 표현한 것이다. 밧세바는 다윗의 속사람의 비유일 수가 있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찾으신다. 자신이 죄 앞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는자! 그리고 죄의 댓가가 얼마나 크고 엄중한지를 체험하여 깨달은자! 그래서 다시는 그 죄를 쳐다보기도 싫게 되어진자! 눈앞에 펼쳐진 죄의 달콤한 유혹 속에는 마귀의 궤계가 숨겨져서,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미끼인 것을 잘 아는자! 죄의 본질은 마귀이고, 그 결과는 사망임을 체득한자!

 

그녀는 아주 커다란 죄의 면역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다. 이제는 어떠한 죄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심령으로 탈바꿈 되었다. 아가서는 이런 여자를 슬람미로도 표현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여자, 슬람미! 범과하여 그 죄로 인한 정죄와 심판의 댓가를 치르느라 심령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여인, 슬람미!

 

다윗에게 19명의 여인이 있었지만, 밧세바를 유독 사랑한 다윗-

예루살렘에 많은 여인이 있었지만, 유독 슬람미를 사랑한 솔로몬-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죄의 정체성을 알고,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자를 유독 사랑하시는 주님-

(주인공들의 이름만 다를 뿐, 구원의 대상자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한 주제이다.)

 

주님은 그런 성도를 발견하시면 언제나 와락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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