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니 파타 [화살의 경] 총정리
이 경전은 부처님 당시에 설해진 경전으로 재가
신자인 불자의 아들이 죽어서 슬픔이 극도에
달하니 침식을 끊은지 일주일이나 되었으므로
석가 세존께서 재가 불자를 연민하는 마음에
재가 불자의 집을 방문하고 경전을 설하신
것이니 모두 20개의 시로 구성이 되어 있다.
석가 세존의 경우 보통은 새벽에 일어나시면
제일 먼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시는 명상을
하시고 명상을 마치면 오늘 내가 도움을 줄
인연이 있는지와 누구 인지를 파악하시고 해가
뜬 후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그 인연있는
사람있는 곳으로 가신다.
이 경전의 경우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는 절의
신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도 제법 열심히 스님
들을 시봉하며 공양하는 성실하고 신심있는 불자로
볼 수 있으니 아들이 죽어 슬픔에 빠져 약 일주일간
먹을것을 끊고 있다는 소식은 탁발이 일상생활화
된 당시에는 쉽게 파악이 가능하므로 석가 세존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알고 가신것이 아닌 제자가 보고
하였거나 소문을 전해주어 알게 된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며 세존께서 연민심으로 그 불자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설해진 20개의 게송은 내용상으로는
어렵지 않으나 무거운 주제이고 모르는 주제이다
보니 글은 쉬워도 쉽게 모든 내용이 파악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재성 역주본에서 시작하는 게송 네 개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74
[세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575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삶의 운명은 이러한 것입니다.
576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577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
네 개의 시를 다 읽어보면 이해가 어느정도는
될 것이니 마지막 시의 비유까지 마치 짜임새
있는 시 한수 같은 네 개의 시는 함께 읽어보면
한 게송 같이 느껴집니다.
죽음이란 주제는 태어났기에 피할 수 없는
주제이므로 우리가 태어나면 기쁘다고 생일을
축하하고 좋아하지만 죽음은 슬퍼하고 싫어하며
눈물 흘리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관찰해 바르게 알고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은 평등한 입장이며 차별할 것이
아니므로 만약 생일이 기쁜 것이라면 죽음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고 죽음이 두렵고
슬픈 것이라면 태어남도 두렵고 슬픈것 일 수도
있으니 마음작용에서 생긴 기쁨이나 슬픔은 그저
마음작용일 뿐이기 때문이며 그러나 태어나는
인연과 상황에 따라 기쁨이 아닌 슬픔과 곤란이
기다리니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 태어났다든다
건강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병든 아이라든가
잘못된 만남으로 태어난 아이라든가 모두가
원하지도 않은 아이가 태어났다든가 이러한
경우는 모두 예를 든다면 차고 넘칠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이 모두 기쁨이 아닌것은
주변의 환경 인연이나 그러한 냉정한 현실에
처한 아이는 더더욱 불행하니 슬프고 곤란하고
어쩌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인연이 분명하다.
죽음으로 보더라고 반드시 슬픈것은 아니니
백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돌아가신 분 돌아가신
날짜까지 다 아시고 돌아가신 분 완전한 해탈을
얻어 돌아가신 성자 나쁜짓만 골라서 하다 죽은
사람등의 다양한 인연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부친은 제가 아는 범위안에서 참으로
점쟎고 학식이 풍부하며 훌륭한 어른이셨는데
형님과는 사이가 썩 좋지를 않아 형님이 부친
에게 반기를 들고 부딪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다행스러운 것은 형님이 양심이 있었는지 부친의
위엄에 눌렸는지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형님은
계속적으로 밖에서 사건 사고를 만들고 결국 둿
수습은 자신이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를 학생때 체험을 하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형님의 한 마디는 울림이
컸는데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속이 시원
하다는 표현은 당시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속으로 체감되는 부자의 갈등에서 그 매듭의
끈이 부친의 죽음으로 풀어지는 인연이 되어
그런 말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큰 아들이고 부자지간인데 부친의 죽음을
좋아하지는 않았을것이라는 추측인데 억눌린
마음에 일은 안풀리고 자존심은 있고 부친이니
어찌 해보지 못한 그 마음의 매듭이 그런 말의
원인이라 본다.
그러니 극악무도한 사람이 죽으면 잘죽었다는
표현을 쓰듯이 안타깝고 슬픈것이 아니라 기쁘다니
모순인 듯 하나 그렇지 않다.
백수를 누린 분의 죽음을 좋은 죽음[호상]이라고
하기도 하는것도 기쁨은 아니나 나쁘지 않은 죽음
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돌아가신 날짜까지 알고 가신 분은 보통 스님들
이나 신부님도 있지만 일반인도 있는 경우로 아는
사람이나 참석한 사람도 그 내용을 알면 슬픔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완전한 해탈을 얻은 성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기에 다른 인연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성자의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않고 해탈이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삶과 죽음이 동일한 선상의 연결이며
인연이라면 태어남은 결론적으로 죽음으로
향해 가니 슬플수도 있고 죽음은 새로운 태어남의
시작이니 기쁠수도 있으니 만약 완전한 해탈자가
아니라면 생각이라도 잘 정리해서 쓸데없는 고민과
슬픔에 놀아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남도 죽음도 있는 그대로 바로 알고
보는것이 핵심이니 어디로 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운 마음이 결국은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이라며 대명천지
밝은 날 어두움이 없는 곳에서 태어남과 죽음을 바로
알고 본다면 두려움은 없는 것이니 이러한 해탈의
체험과 해탈의 앎과 봄은 완전한 성자의 진정한 자유
자재이니 걸림과 치우침이 없고 그 어떠한 애착도
두려움도 없는 진정한 해탈이 아닐까 한다.
시에서 슬피울며 비탄해하는 이유를 전재성
역주 본 582번은 아래와 같다.
582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 끝을 통찰해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오거나 가는 사람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대는
그 양끝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찰력의 부족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기며 부질없이 슬피운다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결론에 해당하는 전재성 역주
590번부터 593번까지를 그대로 옮기면
590
거룩한 님께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591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님이라면,
보금자리가 불난 것을 물로 끄듯,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없애야 합니다.
592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님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애착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593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최종의 번뇌의 화살을 뽑고 집착과 애착과 걸림이
없는 평안을 얻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불교의
이상인 최상의 열반에 드는것을 결론으로 화살의
경은 마무리 된다.
죽음이란 주제를 화살에 비유해서 풀어낸
경전으로 결론은 역시 열반이다.
----2570. 6. 9 법주도서관 & 자주선림
교수사 자림 심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