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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견수행반

제29분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작성자묘상(妙祥)|작성시간26.06.07|조회수18 목록 댓글 2

[산스끄리뜨 금강경역해 합본]
현진 역해
불광출판사

제29강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금강경 제29품의 제목으로, ‘위의(수행자의 몸가짐·행동)가 적정(고요·집착 없음)해야 한다. 는 뜻입니다. 이 품에서는 ‘여래는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는 말로 여래를 단정하면 부처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며, 여래는 ‘오는 바도 가는 바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위의’는 행주좌와(行住坐臥)처럼 일상적 행동 전반을 가리키고, ‘적정’은 그 행동이 많아도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위의적정이란 ‘하되 함이 없는 행’, ‘머무는 바 없이 하는 행’처럼, 행동은 하되 집착으로 묶이지 않는 수행자의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은 일상 모든 순간이 수행의 자리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불교·선(禪) 맥락에서는 특정 시간의 좌선에만 한정하지 않고, 생활 전반에서 깨어있음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방편으로 눈을 지그시 감아 단전에 마음을 둡니다. 좌탈입망(坐脫立亡)은 앉은 자세나 또는 선 자세로 입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삼조(三祖) 승찬 대사는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고 열반하였습니다.

항상 단전을 관하며 스스로에게 찾아옵니다.

백장선사 들오리 날 때
그곳에 따라 가지 않고
무명 눈을 지그시 감아
단전의 고요함에 있네.

2570. 6. 2.

항상 배움을 베푸시는 교수사 스님의 공덕에 수희 찬탄 드립니다.

삼보에 귀의하며 합장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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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위의적정분


 ‘위의(수행자의 몸가짐·행동)가 적정(고요·집착 없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의’는 행주좌와(行住坐臥)처럼 일상적 행동 전반을 가리키고, ‘적정’은 그 행동이 많아도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위의적정이란 ‘하되 함이 없는 행’, ‘머무는 바 없이 하는 행’처럼, 행동은 하되 집착으로 묶이지 않는 수행자의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須菩提 若有人 言 如來 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우리는 ‘존재’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해합니다. “누가 온다”, “어디에 간다”는 것은 상(相), 즉 ‘형상’과 ‘움직임’이라는 개념에 기대고 있죠. 그러나 **여래(如來)**는 상(相)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시간적 흐름이나 공간적 이동에 제한되지 않는, 절대적 진리 그 자체이므로,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어요.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무소종래 無所從來: 어디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역무소거 亦無所去: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즉, 여래는 유위(有爲: 인위적 행위)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며, 변화나 이동, 시작과 끝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이는 열반의 경지를 뜻하기도 하며, 곧 "본래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여여如如)"를 상징합니다.
"如來"라는 이름도, 이러한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진리의 본성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여래를 형상과 동작으로 보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길을 걸으셨고, 보리수 아래에 앉으셨고, 열반에 드신 것은 역사적 사실의 차원에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금강경이 말하는 여래는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래는 진여에서 온 분,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진여 그대로인 자리입니다.

그 진여의 자리는 공간적으로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앉아 있다고 더 참되고, 누워 있다고 덜 참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가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겉모습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몸은 보았지만, 부처님의 법신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제29분은 금강경 전체의 무상·무주·무아 사상을 아주 짧게 응축합니다.

모든 상은 변합니다. 몸도 변하고, 자세도 변하고, 말도 변하고, 인연도 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본래 오고 감이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여래라 이름합니다.

정지견수행반 묘상妙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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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위의적정분 威儀寂靜分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온다, 간다, 앉는다, 눕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내가 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왜 그런가?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라 이름한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으러 간다.
진리를 찾으러 간다.
열반에 도달한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강경은 말한다.

찾으러 갈 곳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지견수행반 박정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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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금강경 제29품의 제목으로, ‘위의(수행자의 몸가짐·행동)가 적정(고요·집착 없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품에서는 ‘여래는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는 말로 여래를 단정하면 부처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며, 여래는 ‘오는 바도 가는 바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정지견수행반 청련안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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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산스끄리뜨역해
제29
위의적정분 (위의가 그윽하다)

"그럼에 또한 실로 거듭, 수보리여! 어떤 누가 '그처럼어신분께서
가신다.'거나'오신다.'거나 '서계신다.'거나 '앉아계신다.'거나' 누워계신다.'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수보리여! 그는 내가 말하고 있을때 (그 말하는) 목저을 잘 알지
못한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처럼오신분이라고 일컫어지는 이는,
수보리여! 어떤 곳으로 가지도 않으며 어떤 곳에서 오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응당공양올려야될분으로서 바르고동등하게깨달으신 그처럼오신분'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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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적정분(威儀寂靜分)**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를 언급하는 것은 여래(부처)의 본성이 그 어떤 조건과 상황, 외적인 모습에도 흔들림 없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말씀입니다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본성: 육신을 가진 인간은 움직이거나 누우며 끊임없이 변하지만, 진정한 부처의 본품(법신)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오고 감이 없는 자리: 원래부터 온 우주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새롭게 '오는 곳'도 없고, 사라져 '가는 곳'도 없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말 것: 우리가 눈으로 보는 부처님의 움직임(오고 가고 앉는 모습)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일 뿐, 진짜 여래는 그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고요하고 청정한 자리(寂靜)에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팔정도의 길을 열반을
발원합니다

보현화합장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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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제29]
{부처님 모습은 고요하고 평화롭다}제29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에 여래라고 표현하느니라.

** 해설 **

제29분에서는 일상의 삶을 통해 여래의 모습을 밝혔다. 갖가지 모습으로 중생을 만나고 계시는 화신(化身)의 모습이 청정하고 적멸한 법신의 모습과 별개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오거나 가거나 않거나 눕는다는 표현은 전반적인 삶의 모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돌아다니거나(行) 머무르거나(住) 앉거나(坐) 눕는다(臥)고 표현하며, 네 가지 위엄 있는 모습과 행위라는 뜻에서 4위의(四威儀)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거나(語) 침묵하거나(黙) 움직이거나(動) 쉰다(靜)는 네 가지를 더하여 우리 삶의 가장 흔한 특징으로 표현한다. 선가에서는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 선(禪)이 아닌 것 없다고 선수행의 특징을 강조한다.

육조 혜능선사는 깨달은 사람의 삶을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로 표현했다. [육조단경] <부촉유통(咐囑流通)>에서 혜능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어떤 경우라도 관념에 집착하지 않아서 증오와 애착을 일으키지 않고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이익과 손해 등을 생각지 않아서 편안하고 고요하며 마음이 비고 조화로우며 맑으면 그것을 일상삼매라고 한다.’
수행자의 깨달음이 이와 같은 경지인데, 부처님의 경지는 어떠하겠는가?

이미 앞에서 부처님의 휼륭한 모습만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 가르침이 여러번 되풀이 되었다. 완벽한 몸매만으로는 여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29분은 행위에 대한 집착을 끊어주려고 하는 가르침이다. 만약 오가는 모습이나 앉거나 눕는 모습으로 여래를 파악하려고 하면 진짜 여래를 볼 수도 없고 참된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가르침을 오해하여 여래는 어떤 모양도 없고 어떤 행위도 없다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보살행을 하고자 발심하여 수행하는 이가 위와 같은 편견을 갖게 된다면 수행의 결과로 이루게 되는 원만한 보신(報身)도 무시하게 될 것이고, 자비의 실천을 보여주는 화신(化身)도 부정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며, 깨달음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지혜와 자비의 교화(敎化)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불교라고 하면서도 실제는 불교가 아니다. 결국 세속적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게 되고, 수행자가 정치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로 투쟁하는 작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잘못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현재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흔히 불교를 수행의 종교라고 하거나 마음 공부하는 종교라고 한다. 이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가치관에 따라 일상의 삶을 바르게 하려 노력하는 종교라는 뜻이며, 또한 다양한 우리의 삶의 형태 속에서 언제나 그 마음이 청정하고 걸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행을 완성하여 원만해진 모습을 보신불(報身佛)이라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비로 알맞게 교화하는 모습을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며, 청정하고 적정(寂靜)한 깨달음의 본체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한다. 수행하여 마음의 눈이 열리면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여래를 봤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를 봐야 그 가르침도 온전히 자기의 것이 된다.

----2570. 6. 8. <송강스님의 다시 보는 금강경>에서 혜연 무구행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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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견수행반 묘상妙祥 편집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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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阿含相應 | 작성시간 26.06.08 [삼보찬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지상에 사는 것이건 공중에 사는 것이건,
    신과 인간이 다 같이 섬기는 완성된 눈 뜬 사람에게 예배하자.
    행복하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지상에 사는 것이건 공중에 사는 것이건,
    신과 인간이 다 같이 섬기는 완성된 진리에 예배하자.
    행복하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지상에 사는 것이건 공중에 사는 것이건,
    신과 인간이 다 같이 섬기는 완성된 승단에 예배하자.
    행복하라.
    ■숫타니파타 23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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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阿含相應 | 작성시간 26.06.08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청련안은 삼보를 염불하면서 법당에서 절할때가 가장 안정이 됩니다.🙏🙏🙏

    스님 강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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