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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1

쉼표 같은 공간을 찾아

작성자아이사랑|작성시간26.06.23|조회수21 목록 댓글 0
쉼표 같은 공간을 찾아
이지연
 
 
휴일 아침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불굴사라는 절에 몇 번 가 봤는데 조용하고 좋더라거기에 홍주암이 아주 괜찮은데 구경시켜 줄게.”
새로 시작하는 일이 있어 머릿속이 복잡했는데친구의 사찰 나들이 제안에 머리도 식힐 겸 따라 나서자는 생각이 들었다집 앞까지 태우러 온 친구 차에 오르며 쾌재를 불렀다.
운전 안 하고 나들이 가는 게 어디야!’
 
팔공산 남쪽 무학산 기슭에 자리 잡은 불굴사를 향한 차는갓바위 가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빠졌다우리 차는 오르막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 바로 앞까지 올랐다가파른 길을 넓혀 사찰 가까이에 주차장을 만드는 곳이 많던데 불굴사도 그러했다주차장에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사찰 경내가 한눈에 보였다.
 
나를 이끈 친구의 루틴은 금강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오랜 기간 사찰 봉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불심이 깊다친구는 족두리를 쓴 여성상 약사불에 이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나를 안내했다불심이 없는 나는 친구를 따라 합장하고 향을 피우며 예를 배웠다.
 
부처님 전을 나와 경내를 거닐다 보니 한 무리 보라색 꽃이 어우러져 눈길을 끌었다가느다란 줄기에 잘게 갈라진 꽃잎은 여려 보이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든 것이 당당해 보였다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자세히오래 보니 더욱 예뻐 보였다꽃 이름을 몰라 휴대용 만물박사에게 물어보니 수레국화라고 알려 주었다.
 
수레국화 무리와 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어울린 우리는 벤치로 옮겨 앉았다친구가 사찰에서 제공하는 믹스커피를 용케 찾아내어 내게 한 잔 내밀었다평소 믹스커피를 즐기지 않지만 몸을 마사지하듯 스치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 맛이 썩 괜찮았다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사찰 경내에서 몇 시간 쉬는 것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친구는 참 좋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친구의 편안함이 내게도 전이되었는지 내 마음도 더없이 편안했다.
경내를 거닐다 보니 친구에게 들었던 홍주암 이정표가 보였다그 아래에는 김유신 장군 삼국 통일 성취기도 굴이며 원효대사 최초 수행 굴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대업을 이루거나 큰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좋은 기운 정도는 받지 않을까 싶어 친구를 재촉하였다홍주암으로 가는 길에는 키 큰 나무가 많아 내리쬐는 여름 볕을 잘 막아 주었다.
 
홍주암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행복 108계단 공덕비가 있었다.
인간의 불행은 백팔번뇌에서 시작된다이 계단을 오르는 모든 이들은 번뇌망상에서 벗어나 성불인연을 지어 행복을 찾으라는 의미로 행복백팔계단이라 이름하였다.
행복백팔계단이란 이름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행복이 주는 어감이 편안해서일 것이다자연 동굴이라는 홍주암을 올려다보니 그저 웅장한 바위 같았다다만 둥그렇고 붉은 기둥과 지붕이 있어 사찰 느낌을 풍겼다. ‘행복백팔계단을 따라 올라 바위 속으로 들어가야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옛날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수행하고던 홍주암이다홍주는 태양을 뜻한다고 한다부처님 전 앞에 태양을 의미하는 붉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친구가 구슬을 만지면 좋다기에 가족의 건강을 염원하며 구슬을 쓰다듬었다건강을 유지하는 기운쯤은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홍주암에는 붉은 구슬 외에 약수가 유명한 것 같았다바위에 크게 쓴 아동제일약수라는 붉은 글씨는 눈에 잘 띄었는데 약수가 보이지 않았다이리저리 자세히 살피니 바위틈에서 미세하게 물이 흘렀다옆에는 약수를 받아둔 물통과 플라스틱 바가지가 보였다소화와 신장에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 있어 아직까지는 제 기능을 잘하는 소화기와 신장에 탈나지 않기를 염원하며 약수 한 바가지를 부어 마셨다.
 
약수를 마시고 홍주암 꼭대기 독신각에 올랐다석벽에서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소나무의 꿋꿋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다바위틈에서 뿌리는 긴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제약을 받았을까마음껏 운신도 못 했을 소나무를 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보드레한 흙은 아닐지라도 하다못해 좀 거칠어도 씨앗을 품을 만큼은 된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이지 어쩌자고 바위틈에 자리 잡았나괜한 연민에 젖어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잎을 보니 내 연민이 기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려움 속에서도 훌륭하게 몸피를 키워내고 천 년을 살아낸 소나무에게서 인내를 배우고 순응과 적응도 배울 일이다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를 보며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조금 척박한 자리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시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중요한 것은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지 않겠나.
 
아득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도시의 소음은 안개처럼 멀어지고바람 소리만 귓가를 채웠다특별한 기도를 올린 것도 아니고소원지에 간절한 소원을 적은 것도 아니었다다만 친구를 따라 나선 길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얻었다.
 
불심 깊은 친구는 사찰이 주는 평온함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날만큼은 향내가 머물던 대웅전과 바위 속 천 년 수행처그리고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던 한 바가지 약수가 마음속까지 맑게 씻어 주는 듯했다어쩌면 사람들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절을 찾는 것이 아니라소원을 품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산길을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참 좋다.”라는 말을 번갈아 했다팔공산 중턱의 사찰에서 보낸 반나절은 편안한 쉼이었다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누군가를 따라 산길을 걷고바람을 맞고약수 한 모금을 마시며 마음을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날의 불굴사는 나에게 기도의 장소라기보다 잠시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돌아보게 한 쉼표 같은 공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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