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활동]6. 세상에 이런 일이! 대명14현과 경현당 / 대구향교신문 연재물 / 2019년 1월 1일

작성자풍경 송은석|작성시간19.01.08|조회수269 목록 댓글 0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6. 세상에 이런 일이! 대명14현과 경현당

 

·송은석 (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숭정처사(崇禎處士)’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랑캐인 청나라의 백성임을 거부하고 중화(中華)의 맥을 잇는 명()나라의 백성임을 표방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懿宗·1628-1644)의 연호(年號). 그래서 명나라 선비가 스스로를 숭정처사라 자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이웃나라인 조선의 선비들도 숭정처사를 자임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4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 예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몇 년하는 식의 표기법이 그것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대구의 숭정처사 대명14과 이들을 추모하는 재실인 경현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번 이야기 역시 만만치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날한시에 집단이주를 하면서까지 숭정처사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무려 14명이 동시에 말이다.

 

 

 

동촌유원지의 오래된 기와집, 경현당(景賢堂)

 

동촌유원지 아양아트센터 동쪽 담장 옆 언덕 위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대로변에다 밤이면 유흥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 대해 아는 이는 드물다. 이 기와집은 대명14(大明14)’으로 칭하는 대구의 숭정처사 14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경현당이라는 재실이다. 언덕 위 넓은 대지에 세워져 있는 경현당은 정면 3,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단촐한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을 두었다. 뜰 한 편에는 ‘14현대명동유적비(14賢大明洞遺蹟碑)’가 있다. 이 집의 내력은 대청 벽에 걸려 있는 경현당기(景賢堂記)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1876년 류근홍(문화 류씨)이 지은 것으로 주요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때는 1868년 무진년. 만촌동에 사는 전씨(全氏)성을 지닌 인물이 자신의 집에 전해 오던 서책들 중에서 명동제현수계맹첩(明洞諸賢修稧盟帖)이란 것을 발견했다. 이 수계첩은 그간 전설처럼 전해져 오던 대명14현이라는 계모임에 관한 기록으로, 대명14현의 인적사항과 결사(結社)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명동제현수계맹첩의 발견은 곧장 대명14현 현창사업으로 이어졌다. 14현의 후손들이 모여 황무지로 변한 옛 대명동(大明洞) 터를 뒤로 하고, 18829월 지금의 위치에 대명14현을 추모하는 경현당을 세운 것이다. 현재 경현당 종도리에는 임오구월초칠일(壬午九月初七日)’로 시작하는 상량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원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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棣峯北麓 尊賢表準 琴江南瀦 營此廣居
(체봉북록 존현표준 금강남저 영차광거)
昇堂章甫 貯架琴書 於千萬斯 維持剩餘
(승당장보 저가금서 어천만사 유지잉여)

체봉 북쪽 산기슭에 현자를 높이는 법도가 있고,
금호강 남쪽 언저리에 군자의 터를 경영하도다.
당에는 선비들 가득하고 시렁에는 거문고와 책이 가득하니
천세, 만세 오래토록 유지되고 남음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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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처사(崇禎處士) 대명14(大明14)

 

숭정처사라는 말은 대국(大國)이자 군자(君子)의 나라로 여겼던 명나라를 끝까지 사모하며 따르겠다는 뜻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황당무계하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역사를 이해할 때는 현재가 아닌 역사 속 그 당시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명14현이 살았던 1600년대 초중반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집어 삼키던 때였다. 평소 오랑캐라며 무시했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는 물론 조선도 정묘·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다. 이에 당시 대구의 선비 14분이 통한을 가슴에 품은 채 팔공산 자락[현 동구 도동]으로 집단 은거에 들어갔다. 숭정처사를 표방하며 도()가 행해지지 않은 세상과 단절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은거지의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새롭게 명명했다. 또한 14명이 모두 ()’자를 넣어 새로운 자호(自號)를 짓고, 결사의 맹서로써 ()’자를 운으로 하여 각자 시 한 구절씩을 지었다. 말 그대로 명()에서 시작해 명()으로 끝을 맺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 20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정신과 은거지였던 대명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먼지를 털어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앞서 언급한 명동제현수계맹첩이다. 이 한 권의 책이 200년이 넘도록 긴 잠을 자고 있던 대명14을 부활시키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경현당 대청에는 대명동동은록(大明洞同隱錄)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다. 여기에는 대명동 은거의 유래와 함께 14현 개개인의 인적사항과 ()’자 운을 사용한 시 한 구절씩이 새겨져 있다. 참고로 동은록에 나타난 대명14현의 인적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명

자호

본관

성명

자호

본관

최도남

(崔道南)

명동주인

(明洞主人)

경주

(慶州)

양시좌

(楊時佐)

명암거사

(明巖居士)

중화

(中和)

이언직

(李言直)

명호산인

(明湖散人)

영천

(永川)

도신행

(都愼行)

명애병수

(明崖病叟)

성주

(星州)

전극초

(全克初)

명천어자

(明川漁子)

옥천

(沃川)

류여장

(柳汝樟)

명당거사

(明塘居士)

문화

(文化)

정기

(鄭錡)

명루노수

(明樓老叟)

동래

(東萊)

이찬

(李贊)

명포노인

(明圃老人)

덕산

(德山)

허계

(許誡)

명곡유인

(明谷幽人)

김해

(金海)

임이현

(任以賢)

명와은사

(明窩隱士)

풍천

(豊川)

서장태

(徐長泰)

명령처사

(明嶺處士)

달성

(達城)

우석연

(禹錫璉)

명야일민

(明野逸民)

단양

(丹陽)

채생만

(蔡生晩)

명계학사

(明溪學士)

인천

(仁川)

여위흥

(呂渭興)

명월산인

(明月山人)

성주

(星州)

 

 

 

 

에필로그

 

유가(儒家)에서는 선비의 거취를 논할 때 ()’의 유무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면 나아가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세상이 어지럽다고 다들 산중으로 숨어버리면 세상은 어찌 되느냐는 것이다. 그 말도 맞긴 맞다. 하지만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군자(君子)의 진퇴(進退)에 대해 시비(是非)를 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했던 조선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유학에 매진했을 대명14. 조선이 곧 중화(中華)라는 소중화 의식이 팽배했던 그 시절.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겪었을 그 끔찍한 문화적 충격. 이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논어󰡕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무리 한다.

나라에 가 있을 때는 빈천함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가 없을 때는 부귀함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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