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케돈 신경 (451년)
네스토리우스 와 키릴로스의 논쟁 -제3차 에베소 공의회(431) 381년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에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간의 신앙을 빙자한 추악한 정치싸움이 끼어있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 비교적 동정적일 만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만약 신성과 인성이 합치면 신성만 남을 것이 아닌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결혼하면 가난한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할 때 당연히 인성은 신성에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표 성품이 신성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성모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Theotokos, the Mother of God)라는 칭호를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안디옥에 있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구분되어야 하며, 둘이 섞이는 것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 곧 크리스토코스(Christokos, the Mothe of the Man, Christ Jesus)는 될지언정 신성(神性)의 어머니인 데오토코스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Kyrillos, 376-444)는 신성과 인성사이에 서로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가 일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분리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에 성모는 하나님을 잉태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를 두 개의 분리된 인격으로 나누었다고 비판했다.
다시 한 번 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동방황제는 제3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에베소에서 소집했다. 이때 키릴로스는 해로를 통해서 많은 인원과 금은보화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안디옥의 감독 요한은 육로로 여행을 하였기에 무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예정일이 보름이 지나 급한 전갈이 왔는데 곧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키릴로스는 요한이 도착하기 전에 자기파들만 가지고 회의를 시작하였다. 안디옥 파들이 도착하기 4일 전에 회의는 끝났다. 그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는 두 개의 분리된 인격(2 Persons)을 가졌다고 가르쳤다(네스토리우스는 명백히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이렇게 곡해했다)고 정죄하였다.
한 편 나중에 도착한 안디옥 파들은 키릴로스의 회의에 불참하고 기다리던 감독들과 별도의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반대로 키릴로스의 감독직을 파면시키고 그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이 작업을 마치기도 전에 서방측 감독들과 로마 감독 사절들이 로마로부터 도착하여 키릴로스와 그들 중심의 공의회를 인정하고 곧바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면시켰던 이전의 결정들을 승인해 버렸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매우 혼란을 가중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분열을 싫어하여 모든 당파들에게 중재안을 내고 타협하라고 강력하게 압박했다. 그러면서 공의회가 결정한 네스토리우스의 파면은 지지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를 지지했던 안디옥의 감독 요한의 뒤를 이어 추방당했다. 그리고 황제는 키릴로스에게 두 본성 교리를 정통 기독론으로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키릴로스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이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 그 교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본성들의 구분(distinction)은 필요하지만 분리(division)는 비난 받아야 한다. 두 본성들(duo physeis)을 말하는 것은 구분을 하자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분리하자는 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키릴로스는 분명히 ‘두 본성이 연합한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만 있다는 교리를 주장해 왔었는데, 종전 입장을 선회하고 안디옥 측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주장하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동료들과 추종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결국 교회를 분열시켰던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네스토리우스를 향한 키릴로스의 미움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앙적으로 승리하고도 현실적으로는 유배를 당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감독직에서 파면되어 고향의 수도원으로, 후에 이집트의 테베 사막으로 추방되었지만, 시리아와 페르시아에 많은 추종자를 가졌다. 그들은 네스토리안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여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 그 다음에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교세를 확장했다.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은 계속 동쪽으로 교세를 넓혀 635년 대진국(大秦國:로마) 사람 아라본(阿羅本,Alopen) 일행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까지 당도했다. 지금도 네스토리안 교회는 무슬림의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유티케스 유티케스(Euthches)는 콘스탄티노플의 연로한 수도사로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을 강력히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키릴로스의 기독적인 원리, 즉 ‘속성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극단화시켰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의 신성이라는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포도주’처럼 간주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참다운 인성을 부인했다. 유티케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인격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개별적인 인간 존재도 아니며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본성을 전혀 갖지 않았다.
강도회의 (Robber Synod)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키릴로스가 444년 죽자 그의 후계자로 디오스코루스(Dioscorus)라는 정치꾼이 등장했다. 키릴로스가 죽을 당시 그는 안디옥과 로마,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키릴로스가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거나 드러내 놓고 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안디옥의 감독 요한도 그러하였으며, 로마는 야만족의 침략으로 신학 논쟁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디오스코루스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등장하면서 사태는 급변하게 변하였다. 그의 관심과 동기는 진리를 발견하고 옹호하는 것보다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안디옥 학파의 세력들을 단번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키릴로스가 이전에 주장했던 ‘연합 이후의 한 본성’ 교리를 주장했다. 디오스코루스의 상대자는 안디옥의 신학자 데오도레투스(Theodoret of Cyrus)였다. 그는 안디옥 학파의 위대한 신학자로써 콘스탄티노플의 차기 감독이 될 만한 후보자였다. 그는 ‘연합 이후 한 본성’ 교리를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를 정통으로 간주했다. 디오스코루스와 테오도레투스 간의 일촉측발의 상황에 불꽃을 튀긴 이가 유티케스였다.
디오스코루스는 448년 유티케스의 가르침을 심판하기 위한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겉으로는 유티케스를 정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유티케스를 일단 알렉산드리아로 피신시킨 다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유티케스로 하여금 안디옥 학파와 콘스탄티노플 감독과 대결하도록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유티케스는 이 노회에서 정죄되었다.
449년 열린 4차 에베소 에큐메니컬 공의회(강도 회의)에서 디오스코루스는 중무장한 깡패 수도사들과 함께 참석하여 재빨리 회의 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그리하여 유티케스의 교리인 ‘연합 이전에는 두 본성,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을 정통교리로 인준했다. 그리고 안디옥의 테오도레투스와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였고 그 직위를 박탈해 버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일부 감독들과 많은 수도사들은 그들을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그 때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플라비안(Flavian)은 로마의 감독 레오 1세가 보낸 서신 한 통을 들고 회의에 도착했다. 이 서신에는 유티케스를 반대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이 서신은 ‘레오의 토메 (Leo's Tome)'로 알려져 있는데 후에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리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플라비안은 로마의 레오가 보낸 장문의 교리서신을 낭독하려 했다. 그러나 디오스코루스가 동원한 깡패 수도사들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플라비안은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강도회의가 끝난 직후, 이 회의에서 패배했던 피해자들은 황제와 로마의 감독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로마감독 레오는 즉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회의결과를 번복할 것을 요구했다. 레오는 유티케스는 정죄되어야 하며, 테오도레투스는 안디옥의 지도자로 복권되어야 하고, 플라비안의 죽음에 항의하면서 그를 죽인 살인자들을 체포하도록 요구하였으며, 강도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의회를 열도록 요청하였다. 450년에 황제 데오도시우스2세는 레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다.
황제의 지지를 받을 수 없자 레오는 서방에서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하는 절차를 밟았다. 로마의 감독은 황제의 동의절차 없이도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개최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황제는 이단을 정통으로 인준했던 ‘강도회의’ 의 결과들을 변호하였다. 4세기 중엽의 교회가 아리우스 주의를 거의 정통으로 간주했던 것처럼, 5세기 중엽의 교회도 가현설(Docetism)을 거의 정통으로 삼았다. 그런데 데오도시우스 황제2세가 갑자기 말에서 낙마하여 죽었다. 권력은 황제의 누이 풀케리아(Pulcheria)와 그녀의 배우자 마르키안(Marcian)에게 넘어갔다. 풀케리아와 마르키안은 449년의 강도회의의 결정들을 무효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에베소에 묻혀있던 플라비안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소피아 대성당에서 영예롭게 장례를 치렀다. 강도회의를 대체할 4회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 근처 칼케돈(chalcedon)에서 소집되었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제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5백명의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칼케돈에서 개막되었다. 레오의 추종자들과 안디옥 학파 사람들이 한 쪽에, 디오스코루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이 다른 쪽에 자리하였다. 강도회의에 의해 면직되고 하마터면 화형에 처해질 뻔했던 테오도레투스도 입장하였다. 에베소에서 열렸던 강도회의의 결정들이 큰 소리로 낭독되고 토론되었다. 점차 디오스코루스의 지지자들은 디오스코루스와 강도회의의 결정들을 포기하였고, 플라비안의 죽음과 테오도레투스의 박해에 가담한 것을 후회한다고 표현했다. 디오스코루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서 파면이 결정되었고 그는 사막으로 쫓겨났다.
칼케돈 회의는 이미 죽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를 정죄하였다. 칼케돈은 안디옥 학파의 온건한 신학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인성과 그의 두 본성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두 본성(two natures)은 분리나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각 본성은 온전한 상태로 하나의 위격(one Person) 안에 함께 거한다고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연합과 통전성을 부인했던 것을 정죄하였다. 그런 한편 칼케돈은 극단적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론도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반드시 혼합(섞이거나 합쳐지는 것)되어서는 안 되며 로고스 안에서 그들의 친밀한 본질적인 결합을 통하여 변질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이 주장하였다. 칼케돈 신조의 핵심은 “한 위격 안에 그리스도의 두 온전하고 완전한 본성-신성과 인성-이 혼합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할이 없고, 분리가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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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신경 (451년, The Definition of Chalcedon)
우리는 모두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만장일치로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고백하게 한다. 그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완전한 분이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합리적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지신 참으로 사람이시며; 신성(神性)을 따라서는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고, 인성(人性)을 따라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며;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신 데 죄는 없으시며; 신성을 따라서는 모든 세대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인성을 따라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어머니 (Deotokos),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한 분 이시요 동일하신 그리스도요, 아들이시며, 주시요, 독생하신 자는, 양성(兩性)에 있어서 혼돈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음을 인정 받으며; 성품의 구별이 연합으로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성품의 특성이 보존되고,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실재로 작용하며, 두 인격으로 갈라지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 말씀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독생하신 자이신 바, 이는 선지자들이 그에 관하여 처음부터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들에게 가르치셨으며, 거룩한 교부들이 우리들에게 전하여 준 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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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then, following the holy Fathers, all with one consent, teach men to confess one and the same Son, our Lord Jesus Christ, the same perfect in Godhead and also perfect in manhood; truly God and truly man, of a reasonable [rational] soul and body; consubstantial [coessential] with the Father according to the Manhood; in all things like unto us, without sin; begotten before all ages of the Father according to the Godhead, and in these latter days,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born of the Virgin Mary, the Mother of God, according to the Manhood; one and the same Christ, Son, Lord, Only begotten, to be acknowledged in two natures, INCONFUSEDLY, UNCHANGEABLY, INDIVISIBLY, INSEPARABLY; the distinction of natures being by no means taken away by the union, but rather the property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concurring in one Person and on Subsistence, not parted or divid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 begotten, God the Word, the Lord Jesus Christ, as the prophets from the beginning [have declared] concerning him, and the Lord Jesus Christ himself has taught us, and the Creed of the holy Fathers has handed down to us.” --
단성론(Monopysitism) 그러나 예수님의 일위 양성(一位 兩性, one Person two natures)이라는 칼케돈 공의회 결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일부 교회에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 양성(兩性)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성만 가지신다는 단성론(單性論)은 계속 주장하고 자기들만의 교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날의 시리아의 자코바이트(Jacobite) 교회, 이집트의 콥틱(Coptics)교회, 그리고 에디오피아(Abyssinia)교회가 단성론을 신조로 하고 있다. 이들은 다 아폴리나리우스와 키릴로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동방교회와 계속 교류하는 이집트 교회을 멜키트(Melkite)교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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