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배우는 강의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밑에 제가 올렸던 글에 리플 다신 분들이나
그동안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던 분들 보시라구 올립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난 현대적 환상성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의 핵심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그 경계의 모호함이며, 그 판단의 망설임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자 환상적인 것이나 경이로움 그리고 괴기스러움 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일단 현실세계에서 기초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현실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게 되면서 부터이라고 했다. 특히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문예사조가 주도한 19세기에 있어서 대안적 문학형태로서 환상문학의 등장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 19세기적인 환상문 학 내지는 환상성은 20세기에 와서도 유효한 가에 대해서 토도로프는 20세기에는 이미 환상문학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소위 20세기 환상문학의 하나 예라고 일컬어지는 카프카의 「변신」에 있어서의 20세기적 환상성을 이야기한다.
문학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통칭하여 환상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토도로프식의 정의에서 환상이란 현실을 기준 하여 그것이 현실적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인척 하는 허구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어로 als ob( 마치 ...인척)의 세계로서 ...와 같은 세계이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대상물들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19세기 전통 미학에서는 예술은 가상으로서 현실과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문학의 고유행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환상문학이라고도 볼 수 잇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작가의 소유물로서의 문학이 아닌 독자와의 소통 속에서 구체화되는 문학작품이라는 수용, 영향미학이 대두되면서 문학이 현실과 허구라는 존재론적 대립보다는 문학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보완적 기능으로서 인식되었다
환상이란 19세기적인 실증주의 앞에서 어디까지나 속임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동의 외적 현실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현실의 충실한 모사로서 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자율성을 언어적 실험을 통해서 얻기도 한다. 토도로프는 이러한 20세기적 현상 속에서 언어적 전복을 꾀하려했던 환상문학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의 예로 카프카를 든다.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카프카의 변신에서 어떻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환상성의 핵심인 망설임을 어떻게 철저하게 확인되는 과정으로 바꾸는 가를 이야기한다. 그 방법은 거꾸로 이다. 19세기적 환상문학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인 것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처음에 막바로 가장 극단적인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처음에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현실이 아닌 꿈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다가 점차로 애초에 일어난 사건이 진짜 현실임을 하나 하나 입증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리 잠자가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위에 한 마리의 거대한 딱정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일종의 망설임의 가능성으로 간단한 지시를 준다. 즉 잠자가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도 사실이 그 반대임을 안다는 것이다. 망설임은 계속되지 못하고 이야기 전체 진행 속에 매몰되면서 주인공인 잠자 또한 변신한 자신을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자신이 동물로 변한 것에 익숙해지는데, 육체적으로 인간의 식사나 쾌락을 거부한다. 그에게 양분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음악에 대한 동경이다. 여동생을 좋은 바이올린 연주자로 키우겠다던 자신의 옛 소망을 기억하며 음악을 듣고자 열망한다. 가족들의 잠자의 변신에 대한 반응은 의아함이나 망설임보다는 놀라움으로, 이 변화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에만 초점을 맞춘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변화된 잠자를 여전히 아들과 오빠로 여기면서 되돌아오기를 고대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냉엄했다. 그레고리의 변신으로 경제적 기둥을 잃게 된 가족들은 다시 생활력을 획득하고 자립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적개심이 담긴 사과 던짐으로 죽게된 그레고리는 더 이상 슬픔의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 동안 증오스럽고 귀찮은 짐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했다. 하녀가 납작하게 눌려 말라비틀어진 그레고리의 사체를 치워버리고, 가족들은 모처럼 봄 소풍을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더욱이 그 동안 몰라보게 성숙한 누이동생이 새로움 삶, 다시 말해서 관능에 곧 눈을 뜰 것이라는 예감으로 끝난다. 이를 두고 블랑쇼는 <무서움의 극치>라고 했다.
도토로프는 이런 이야기의 전개는 자신의 환상문학 정의와는 완전히 거꾸로 전개된다고 했다. 가장 초자연적인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점차로 아주 자연스러운 현실로 보이게되고, 이야기 종말 역시 초자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망설임은 미지의 사건을 지각하는 준비로 자연에서 초자연으로의 이행을 특징짓는 것이다. 변신의 기술은 역방향으로 설명되지 않은 사건이 터지고 점점 그에 적응하는 초자연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이다. 다른 장르인 경이에고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변신에서의 초자연적 요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다만 충격적이고 불가능한 사건이 문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레고리 적인 작품으로 간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의적 해석 가능성에 대한 명시적 제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 알레고리의 독법은 자의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잇는 것이며, 변신의 사건은 어떤 다른 문학적 사건에도 뒤지지 않는 현실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환상에는 자연법칙과 현실적 합의에 대한 침범 내지는 일탈이 들어 있는데, 변신에서의 이러한 일탈은 망설임을 촉발시키지 못하는 것은 초자연 사건만큼이나 전체 이야기가 기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비합리적인 것을 규칙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논리에 따르기 때문에, 19세기 환상문학의 핵심적 특징인 망설임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서 < 환상적 대상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인간이다. 반만 현세와 연결되어 있는 종교나 심령술에서의 인간이 아니라, 잇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의 인간, 사회적인 인간이며, 노상의 장례식에 목례하고 찬가에서 수염을 깎고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폭을 선두로 보조를 맞춰 걸어가는 인간이다.>라고 했다. 20세기에 와서 정상적인 인간은 바로 환상적 존재인 것이다. 환상은 이미 예외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20세기는 카프카와 더불어 환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도토로프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카프카는 문학적인 것과 초자연의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문학의 좋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란 일상언어가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명을 얻는다. 문학은 언어적인 것과 초언어적인 것, 현실과 비현실의 이율배반을 한 몸에 지닌다. 그런데 카프카 작품은 문학이 그 중심에서 또 하나의 다른 모순을 체험시키는 지를 보여준다. 이 다른 모순은 블랑쇼가 공식화 한 것으로 '문학이란 자신을 불가능케 하는 한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해지는 바가 바로 거기 현존하는 한 문학의 장은 있을 수 없다. 문학에 그 장이 주어지면 이미 말해야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 특히 문학의 언어가 미리 자신의 죽음으로 돌진하지 않는 다면 , 문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불가능성으로 향하는 운동이야말로 언어의 조건이요, 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블랑쇼) 자신의 불가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카프카 문학은 그러므로 19세기적 환상문학과 구별되는 <보편적 환상성>을 지닌 작품으로 가능과 불가능의 오락가락의 망설임으로서 환상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세계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의 메타문학인 것이며, 환상적(?) 현대적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밑에 제가 올렸던 글에 리플 다신 분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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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에 나타난 현대적 환상성
토도로프는 환상문학의 핵심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그 경계의 모호함이며, 그 판단의 망설임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자 환상적인 것이나 경이로움 그리고 괴기스러움 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일단 현실세계에서 기초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현실적인 것,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게 되면서 부터이라고 했다. 특히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문예사조가 주도한 19세기에 있어서 대안적 문학형태로서 환상문학의 등장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 19세기적인 환상문 학 내지는 환상성은 20세기에 와서도 유효한 가에 대해서 토도로프는 20세기에는 이미 환상문학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소위 20세기 환상문학의 하나 예라고 일컬어지는 카프카의 「변신」에 있어서의 20세기적 환상성을 이야기한다.
문학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통칭하여 환상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토도로프식의 정의에서 환상이란 현실을 기준 하여 그것이 현실적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인척 하는 허구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어로 als ob( 마치 ...인척)의 세계로서 ...와 같은 세계이다. 그것은 현실적 상황과 대상물들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19세기 전통 미학에서는 예술은 가상으로서 현실과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문학의 고유행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환상문학이라고도 볼 수 잇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작가의 소유물로서의 문학이 아닌 독자와의 소통 속에서 구체화되는 문학작품이라는 수용, 영향미학이 대두되면서 문학이 현실과 허구라는 존재론적 대립보다는 문학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보완적 기능으로서 인식되었다
환상이란 19세기적인 실증주의 앞에서 어디까지나 속임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동의 외적 현실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현실의 충실한 모사로서 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자율성을 언어적 실험을 통해서 얻기도 한다. 토도로프는 이러한 20세기적 현상 속에서 언어적 전복을 꾀하려했던 환상문학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의 예로 카프카를 든다.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카프카의 변신에서 어떻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환상성의 핵심인 망설임을 어떻게 철저하게 확인되는 과정으로 바꾸는 가를 이야기한다. 그 방법은 거꾸로 이다. 19세기적 환상문학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인 것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처음에 막바로 가장 극단적인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처음에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현실이 아닌 꿈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다가 점차로 애초에 일어난 사건이 진짜 현실임을 하나 하나 입증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리 잠자가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위에 한 마리의 거대한 딱정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일종의 망설임의 가능성으로 간단한 지시를 준다. 즉 잠자가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도 사실이 그 반대임을 안다는 것이다. 망설임은 계속되지 못하고 이야기 전체 진행 속에 매몰되면서 주인공인 잠자 또한 변신한 자신을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자신이 동물로 변한 것에 익숙해지는데, 육체적으로 인간의 식사나 쾌락을 거부한다. 그에게 양분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음악에 대한 동경이다. 여동생을 좋은 바이올린 연주자로 키우겠다던 자신의 옛 소망을 기억하며 음악을 듣고자 열망한다. 가족들의 잠자의 변신에 대한 반응은 의아함이나 망설임보다는 놀라움으로, 이 변화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에만 초점을 맞춘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변화된 잠자를 여전히 아들과 오빠로 여기면서 되돌아오기를 고대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냉엄했다. 그레고리의 변신으로 경제적 기둥을 잃게 된 가족들은 다시 생활력을 획득하고 자립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적개심이 담긴 사과 던짐으로 죽게된 그레고리는 더 이상 슬픔의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 동안 증오스럽고 귀찮은 짐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했다. 하녀가 납작하게 눌려 말라비틀어진 그레고리의 사체를 치워버리고, 가족들은 모처럼 봄 소풍을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더욱이 그 동안 몰라보게 성숙한 누이동생이 새로움 삶, 다시 말해서 관능에 곧 눈을 뜰 것이라는 예감으로 끝난다. 이를 두고 블랑쇼는 <무서움의 극치>라고 했다.
도토로프는 이런 이야기의 전개는 자신의 환상문학 정의와는 완전히 거꾸로 전개된다고 했다. 가장 초자연적인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점차로 아주 자연스러운 현실로 보이게되고, 이야기 종말 역시 초자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망설임은 미지의 사건을 지각하는 준비로 자연에서 초자연으로의 이행을 특징짓는 것이다. 변신의 기술은 역방향으로 설명되지 않은 사건이 터지고 점점 그에 적응하는 초자연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이라는 것이다. 다른 장르인 경이에고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변신에서의 초자연적 요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다만 충격적이고 불가능한 사건이 문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레고리 적인 작품으로 간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의적 해석 가능성에 대한 명시적 제시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 알레고리의 독법은 자의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잇는 것이며, 변신의 사건은 어떤 다른 문학적 사건에도 뒤지지 않는 현실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환상에는 자연법칙과 현실적 합의에 대한 침범 내지는 일탈이 들어 있는데, 변신에서의 이러한 일탈은 망설임을 촉발시키지 못하는 것은 초자연 사건만큼이나 전체 이야기가 기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비합리적인 것을 규칙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논리에 따르기 때문에, 19세기 환상문학의 핵심적 특징인 망설임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서 < 환상적 대상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인간이다. 반만 현세와 연결되어 있는 종교나 심령술에서의 인간이 아니라, 잇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의 인간, 사회적인 인간이며, 노상의 장례식에 목례하고 찬가에서 수염을 깎고 교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폭을 선두로 보조를 맞춰 걸어가는 인간이다.>라고 했다. 20세기에 와서 정상적인 인간은 바로 환상적 존재인 것이다. 환상은 이미 예외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20세기는 카프카와 더불어 환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도토로프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카프카는 문학적인 것과 초자연의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문학의 좋은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란 일상언어가 모순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명을 얻는다. 문학은 언어적인 것과 초언어적인 것, 현실과 비현실의 이율배반을 한 몸에 지닌다. 그런데 카프카 작품은 문학이 그 중심에서 또 하나의 다른 모순을 체험시키는 지를 보여준다. 이 다른 모순은 블랑쇼가 공식화 한 것으로 '문학이란 자신을 불가능케 하는 한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해지는 바가 바로 거기 현존하는 한 문학의 장은 있을 수 없다. 문학에 그 장이 주어지면 이미 말해야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 특히 문학의 언어가 미리 자신의 죽음으로 돌진하지 않는 다면 , 문학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불가능성으로 향하는 운동이야말로 언어의 조건이요, 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블랑쇼) 자신의 불가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카프카 문학은 그러므로 19세기적 환상문학과 구별되는 <보편적 환상성>을 지닌 작품으로 가능과 불가능의 오락가락의 망설임으로서 환상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세계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의 메타문학인 것이며, 환상적(?) 현대적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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