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다음 문장 / 이경란
담장 위 금 간 석류 하나
아직 열리지 않은 문장처럼 붉어지고
골목 끝 그늘은
늦게 도착한 바람의 셔츠를 붙잡고
덜 익은 매실 몇 알
입안에서 초록빛 소문을 굴린다
장마 전 구름은 낮게 엎드려
지붕마다 물의 이름을 연습한다
먼저 젖는 것은 길이 아니라
주머니 속 접힌 약속 한 장
오기보다 여름은
등 뒤에서 문장을 먼저 넘기는 손이었고
계절이 사람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사람이 계절의 밑줄이 된다는 걸 알았다
끝내 읽지 못한 페이지에서
새 계절이 책갈피를 꽂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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