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변을 지나며 / 신영우
초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 천지를 내려와 삼지연시를 비켜 압록강 지류를 따라 내려갔다. 연둣빛으로 물든 협곡 사이로 맑은 강물이 흐르고, 긴 겨울을 견뎌낸 동토의 밭고랑에는 봄을 심는 더딘 손길들이 간간이 보였다.
강을 따라 이어진 길에서는 국경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기찻길이 산허리를 감돌고, 압록강 건너 혜산시는 비에 젖은 채 낡은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집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산줄기를 오르는 신작로 위로는 트럭들이 힘겹게 오르내렸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둔 풍경은 삶의 간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압록강은 그런 풍경을 모두 품은 채 묵묵히 흘렀다.
장백현 동산 정상에서 만난 영광탑은 발길을 오래 붙잡았다. 발해의 흔적으로 남은 오층 전탑은 1000여 년의 풍화와 침식을 견디며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스듬히 기운 탑은 마치 무너진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듯 하늘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산 아래 거리에는 "千年崖城 梦游渤海古国"이라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천 년의 세월을 건너온 발해의 이름은 낯선 땅에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이른 새벽 찾은 시장은 어린 시절 고향 장터를 떠올리게 했다. 좌판에는 크고 반듯한 개량종 대신 오밀조밀한 채소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다. 흙냄새 묻은 먹거리들은 투박했지만 싱그러웠다. 시장을 지키는 이들 대부분은 노년층이었다. 굽은 등과 주름진 손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묻어났다. 이곳 역시 고령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압록강을 바라보니 비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날 내리던 초여름 비는 발해의 슬픈 잔상 같기도 하고, 오래전 백두산이 토해낸 화산재의 기억 같기도 했다. 먹빛 하늘 아래 강물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갔다.
압록강변을 지나는 동안 나는 풍경만 본 것이 아니었다. 동토에 씨앗을 심는 사람들의 삶과 천이백 년을 버텨온 영광탑의 침묵, 그리고 발해의 기억을 함께 마주하고 있었다.
역사는 돌에 새겨지고 삶은 사람에게 새겨진다. 압록강은 오늘도 그 모든 것을 품은 채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