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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시모음

장백평원에서 / 신영우

작성자cbdc반대(박윤억)|작성시간26.06.12|조회수16 목록 댓글 0

장백평원에서 / 신영우


 
장백산에 오르지 못한 날이었다. 심한 비바람 때문에 천지는 모습을 감추고, 우리는 장백산 주변의 평원과 원시밀림을 따라 길을 달렸다. 처음에는 아쉬움이 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오히려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비에 젖은 숲은 더욱 짙은 초록으로 빛났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침엽수들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릴 뿐 쓰러지지 않았고, 숲길 옆으로는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장백평원은 마치 초록의 바다 같았다. 
 
멀리 장백폭포는 흰 물기둥을 토해내며 협곡 아래로 쏟아졌다. 굽이치는 물소리는 골짜기를 넘어 산허리를 울리고, 마치 잠든 천하를 깨우는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안개가 원시밀림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금방이라도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올 듯한 야생의 기운이 살아 있었다. 
 
그 순간 장백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다가왔다. 천 년 전 이 땅을 누볐을 고구려의 기상과 발해의 꿈이 안개 너머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드넓은 하늘 아래 말을 달리며 나라를 일구었던 사람들, 그리고 변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수많은 이들의 숨결이 평원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백 년 전 이 땅에 불어닥쳤던 혹독한 시절도 떠올랐다. 빙벽보다 차가운 겨울과 눈보라 속에서도 독립을 꿈꾸며 견뎌낸 사람들. 지금은 말발굽 소리도 총성도 사라졌지만, 그들의 뜻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흰 꽃들을 바라보았다. 연약해 보였지만 끝내 꺾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꽃들은 역사의 풍상을 견뎌낸 영혼들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붉은 피와 눈물이 긴 세월을 건너 순백의 꽃잎으로 피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백평원은 아름다운 자연만을 품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상처와 희망, 기억과 미래를 함께 품은 거대한 시간의 들판이었다.
문득 하늘 높이 검독수리 한 마리가 거센 바람을 가르며 솟구쳤다. 넓은 날개로 장백의 하늘을 품고 비상하는 모습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날아오르는 역사의 상징 같았다. 
 
그 비상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지 견디는 일이 아니라 기억하는 일이며,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다시 미래를 향해 날아오르는 일이라는 것을. 장백평원의 푸르름은 바로 그런 시간의 힘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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