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백산 남파길, 천지를 오르며 / 신영우 장백산, 우리에게는 백두산이다. 장백현을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 숲 사이를 두 시간 남짓 달렸다. 331국도는 숲을 가르며 곧게 이어지고,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와 전나무, 낙엽송이 층층이 숲을 이룬다. 계곡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들은 초록 물결처럼 흔들린다. 남파의 풍경은 웅장함보다 부드러움이 먼저 다가온다. 서파가 드넓은 파노라마라면, 북파가 장엄한 절벽이라면, 남파는 오래 바라보고 싶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백두산은 송화강과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지다.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난 물은 맑음을 넘어 투명한 슬픔처럼 흐른다. 바위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차가운 운무가 되어 계곡을 떠돌고, 숲은 그 물을 품어 생명을 키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경도 달라진다. 습지와 하천이 한몸이 된 숲은 건강한 숨결로 가득하다. 차창 밖으로 수많은 곤충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짧은 생을 마치는 작은 존재들마저 백두산 아래에서는 거대한 생명의 군무를 펼치는 듯하다. 그때부터 숲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진다. 눈부신 햇살 아래 숲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흐른다. 보이지 않는 경계와 금지된 땅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서고, 남파 들머리에서 소형 셔틀버스로 갈아탄다. 가파른 산길을 숨차게 오르는 동안 차 안의 사람들은 어느새 말을 잃는다. 모두가 천지를 향한 기대와 설렘을 품고 있다. 마치 오래된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의 마음처럼. 세 번의 검문을 지나자 화산지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둣빛 숲 사이로 회흑색 주상절리가 우뚝 솟아 있고, 곳곳에는 6월의 잔설이 남아 있다. 흰 꽃과 보랏빛 꽃, 붉은 꽃들이 짧은 여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골짜기마다 피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가파른 암릉과 잔설 사이로 거대한 푸른 호수가 문을 열 듯 모습을 드러낸다. 천지다. 순간 숨이 멎는다. 하늘은 맑고 천지는 깊푸르다. 산정호수를 둘러싼 절벽들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남겨진 눈은 신비를 더한다. 수천 년의 시간과 침묵이 빚어낸 풍경 앞에서 말은 사라지고 경외만 남는다.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곳, 민족의 영산. 천지를 바라보며 나 또한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날 천지는 두 시간 남짓 맑은 얼굴을 허락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 황량한 화산지대에 피어난 작은 흰 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철조망 너머의 땅을 생각한다. 하나의 산줄기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현실이 가슴 한편을 먹먹하게 한다. 잠시 후 천지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우박이 쏟아진다는 소식이 들린다. 뒤돌아본 하늘은 이미 표정을 바꾸고 있다. 우리가 만난 청명한 천지가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동토의 땅에도 생명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끼와 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작은 꽃들이 웃음처럼 피어난다. 겨울과 봄, 여름이 한 계곡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 장백산은 내게 웅장함보다 겸손을 가르쳐 주었다. 열정이라 쓰고 겸손이라 읽는 삶. 천지를 품은 장백산은 그렇게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푸른 물빛으로 남아, 삶의 방향을 비추는 깊은 거울이 되었다. 삶도 백두대간의 마루금처럼 높아지기보다 더 멀리 이어지는 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다. 돌아서는 길, 천지는 구름 속으로 천천히 몸을 감추고 무심한 여름비가 차창을 차갑게 스치며 흘러내렸다.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