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기록 / 박미라
고래가 있었다
캄캄하고 뜨겁고 기다란 몸을 가진 고래였다
우리 집 고래는 불을 잘 먹는단다 할머니는
고래 속으로 고래 속으로 불을 밀어넣었는데
고래가, 욕심껏 삼킨 불을 어쩌지 못해
꾸역꾸역 게워낼 때면 내 등짝이 후끈거렸다
할머니가 죽고, 동생이 죽고, 뒤란 감나무가 죽고,
숨죽여 울다가 차디차게 식어버린 고래
더는 불길 들이지 않는 저녁을 견디던 고래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내가, 고래 없는 세상으로 숨어든 다음
고래는 바다로 갔다던데
더는 불길 삼킬 고래도 없는 옛집을 떠난 후
불꽃 같은 분수를 짊어지고 떠돌더라는
고래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고래가 없이도 등짝을 데우는 방법이 우거진 세상에서
내 등짝은 마른장마에도 눅눅해서
가끔 바다에 들려 고래 소식을 수소문해보는데
바다가 지피는 불은 참, 뜨겁기도 하더군
얼마나 다행인지
-시집<죽음의 쓸모>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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